횡포가 나를 키운다 (유병근 유고 수필집)

횡포가 나를 키운다 (유병근 유고 수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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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유족인사말

책과 메모지를 끼고 사셨던 아버지
유종훈(고인의 3남, 소방공무원)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어느새 2년이 지났습니다. 저희 가족들에게는 아버님의 존재가 너무나 커 어떤 말로도 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그 빈자리가 늘 허전하고 가슴을 아립니다. 아직까지 집안 곳곳이 아버님의 흔적이기에 그 황망함이 더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저희 어머님이 더 하실 테지요. 그래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잘 계시는 어머님이 자식으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레문학회〉에서 저희 아버님을 기억하고 또 수필작품들을 모아 유고수필집을 펴내신다니 반가움에 앞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만의 아버지가 아님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또 늦었지만 장례식장에서 마음을 다해주신 선생님들께, 특히 〈드레문학회〉 선생님들께 이 지면에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문학 인생을 늘 곁에서 봐 온 터인지라 그리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아버님이 하시는 일이겠거니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성년이 되고 세상을 살면서 문학의 길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어렴풋이 알아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버님이 지닌 문학의 깊이를 저는 가늠할 수도 없지만 마음으론 ‘우리 아버지, 참 대단한 분이시다’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집에서도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가족끼리 어딜 가더라도 항상 틈틈이 메모지에 무얼 쓰곤 하셨습니다. 그것이 나중 아버님의 시와 수필로 탄생 되었음을 짐작만 합니다.

저도 한때는 아버지처럼 글을 써볼까? 한 적도 있지만 마음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아버님을 볼 때 스스로의 엄격함이 대단한 분이셔서 문학을 하려면 먼저 아버님 같은 자세가 되어야 하기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말씀 하나, 행동 하나에도 늘 진중하고 바르셔서 저희들은 아버님 앞에서는 언제나 모범생이 되었습니다. 저절로 그리되었습니다. 이리 하라! 저리 하라!가 아닌 생활 속에서 가정교육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하셨기에 아버님의 자세로 문학을 한다는 것은 더욱 힘겨운 일임을 자각했습니다. 막연한 동경과 실제 창작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느끼곤 글쓰기를 포기했습니다. 언제인가 제게도 아버님의 문학 기운이 차오르는 날 다시 도전해보겠습니다.

이번에 펴내는 아버님의 유고 수필집이 매주 얼굴을 마주하여 함께 문학이야기를 하셨던 〈드레문학회〉 선생님들의 애정으로 발간된다는 사실을 아버님은 저세상에서나마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버님의 기뻐하시는 잔잔한 미소가 벌써 떠오릅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모쪼록 저희 아버님을 기억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충만한 문학의 샘물들이 가득 채워지시기를 빌어봅니다. 감사합니다.
저자

유병근

유병근시인이자수필가는1932년8월5일경남통영시광도면죽림리187번지에서출생했다.1954년고석규조영서손경하하연승시인등과「신작품」동인으로시단활동을시작했으며1970년《월간문학》을통해등단절차를마쳤다.수필집으로는『협주곡』,『허명놀이』,『목재수필』,『연등기행』,『춤과피리』,『덫을찾아서』,『술래의꿈』,『유병근수필기행』,『꽃이멀다』,『아이스댄싱』,『아으동동』이있으며시집으로는『沿岸集』,『遺作展』,『西神캠프』,『지난겨울』,『사일구유사』,『설사당꽃이떠나고있다』,『금정산』,『돌속에꽃이핀다』,『곰팡이를뜯었다』,『엔지세상』,『소낙눈』,『까치똥』,『통영벅수』,『어쩌면한갓지다』,『어깨에쌓인무게는털지않는다』,『꽃도물빛을낯가림한다』가있다.수상으로는현대수필문학상,우봉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최계락문학상,부산예술상,부산시문화상,부산시인협회상,올해의수필가상,부산원로문학상등을수상했다.

유병근선생은평생중앙문단의눈치보기를외면하고오로지문학작품성에만몰두해온올곧은작가이다.특히수필을‘붓끝의글’에서시처럼상상력의작품으로승화시켜수필문학의위상을한국문단에서공고히재정립시켰으며그러한고집과선비적사유의문학인생을거닐다2021년4월23일(금)새벽향년90세로영원한문학의숲에서상상에들었다.

목차

발간사|유고집에붙이다-신서영
유족인사말|책과메모지를끼고사셨던아버지-유종훈

제1부

돌담에등을기대고
개골개골
산길
하얀천장
그때나는
왠지자꾸
불안에관한연구
Omyear!
건물을보고있다
먼것이가까이보인다
그리움이사라지고
하늘천따지

제2부
굴렁쇠같은
그래서쓴다
속쓰린날
지각한비
횡포가나를키운다
부스럭거림에대하여
일억사천만년전
무엇이떠오르는듯

제3부
까마귀
모른다는쪽지
저울
오목한호수
쓰라린밥
그렇게사는거다
시간의변두리에서
빈집골목
에또
떡볶이꼬치

제4부
낡은신발
포켓몬
구미호의탈
소리,알맞은
쭉쭈우!
나무나무나무
잠투정
물때가온다
무설당

제5부
비를생각한다
프로와아마
legato와staccato
농사꾼이야기
가파른푸새
벽이벤트
어쩐지좀어지러웠다
산그늘에묻힌달력
서툴게살며
어쩔것인가,더위야
너덜거리는벽지
별표
월미도
전자파세상

출판사 서평

한국수필계에서가장창의적인수필을쓰셨던유병근(2021년4월21일타계)선생의유고수필집『횡포가나를키운다』(작가마을)가발간됐다.이번유고수필집은유병근선생의제자들의글모임인〈드레문학동인회〉(회장김복혜)에서출판사와협력하여선생님의평소작품들을추려확인을거쳐빛을보게된것.유병근수필가는“모든수필에상상력이결여되면일기잡문이지수필이아니다.한편의수필속에저자의사유와상상력이보이지않는다면제대로된수필이라할수없다.”는평소의소신속에작품활동을해오셨다.그래서유병근선생의수필을읽으면잘직조된한편의산문시를읽는느낌이었다.“시와수필은동격이다.”고설파하신것처럼선생은시와수필을동일선상의문학작품으로여기고또그렇게창작해오셨던것이다.이로인해한국문단에서수필문학의비중을시와소설등타장르에뒤처지지않게문학적위상을한층높여놓은대표적수필가로알려져있다.또유병근선생은고석규,조영서,김규태시인등한국의내노라하는시인들과1950년대〈신작품〉동인으로활동을해온시인이기도하다.하지만이러한창의적인수필작품으로인해시단보다는수필문단에그이름이더많이알려져있다.

유병근선생은또중앙(문단정치)을멀리하고진솔한작품위주의활동을또온몸으로실천해온분이시다.문학작품은작품으로독자에게보이면되는것을중앙문단에줄서기하여이름을얻고자하는사람들을외면했다.작품이외에다른요소가끼어드는것을무척이나싫어하셨던것.이는자신이가르치는시와수필을공부하는문학친구(유병근선생님은제자가아닌문학친구들이라고표현)들에게도언제나작품위주의활동을주지시켜왔다.선생의제자인신서영수필가는“구순을바라보는스승님앞에서는백발이된제자도문학소녀였다.우리가배우는것은시와수필만이아니었다.눈앞에보이지않는내면의나와조우하면서문학외적인삶과인생사도학습했던것이다.”라고문학과인생을배웠음을고백한다.
무엇보다이번유고수필집『횡포가나를키운다』는유병근수필가의문학작품만을담은것이아니다.선생께서평생쌓아온문학인의올바른자세를같이담아주셨다.제자들이스승의뒷자리를살뜰히챙긴다는것부터가우리문단에서요즘은보기드문현상이다.모두다개개인화가극심한문단이고예술계가아닌가?

발간사

유고집에붙이다
신서영(수필가)

둥치큰벚나무들이빚어내는그늘이깊다.그악스럽게울어대던매미소리도숨을고른다.사람들의발길마저뜸하다.눈에익은시인들의시가적힌팻말이드문드문꽂혀있는골목길에선발걸음도레가토다.문득호젓한이길을수없이오갔던스승님이간절하게그립다.
우거진나무들로하늘이보이지않는길이느닷없이아득하다.불을환하게밝힌빈빈의통유리창이눈에들어온다.뜰을차지한감나무가창문가득농담을조절하며수묵화를그린다.사방벽면엔책이가지런히꽂혀있어서점같다.큰탁자를마주하고스승님은정갈한모습으로제자들을기다리고계셨다.숱한세월이지났어도한결같았던그시간이오늘따라더그립고애틋하다.구순을바라보는스승님앞에서는백발이된제자도문학소녀였다.우리가배우는것은시와수필만이아니었다.눈앞에보이지않는내면의나와조우하면서문학외적인삶과인생사도학습했던것이다.
스승님가신지도벌써두해가지났다.올여름은더위가맹위를떨친다.장작불앞에앉은것처럼열기가뜨겁다.피서는생각지도못할때는방콕이정답이다.집안에쌓여있는책을정리하기로한다.오랜만에스승의시집과수필집을꺼내본다.『싸리꽃풍경』과『꽃이멀다』를펼치니행간에서빙그레웃고계신그모습이보이는듯하다.스승님의문하에들어가처음으로받은수필집이다.한두번내리읽어도무슨의미인지알수가없었던문장에연필로밑줄을그어놓았다.

“소나무의껍질은소나무의공책이다.바람이오면바람을받아적고눈비몰아치면눈비를받아적었다.바람에꼿꼿하게버티고선등줄기,그속의심지를줄줄이받아적었다.”
“잠자리두마리장대끝에앉아있다.가위바위보처럼눈을두리번거린다.하나는왼쪽으로눈굴린다.잠자리는어느새널따란보를가위질하고있다.”
“통영이란말속에는잔잔한파도소리가있다.통영이란말속에는그림엽서같은바다풍경이깔려있다.”

언젠가문학기행때분재와수석을수집한곳을들렸다.주인장은나무와돌의얼굴을찾아주는것이사물의진정한아름다움이라했다.나무마다생김새가다르고,수석도형체가다양해그신비로움을극찬하며감탄사를연신토해내고있었다.그때스승님은아무런문양도없고,어느한쪽기운데도없는그냥매끈하고두루뭉술한큰돌을좋은수석이라하셨다.사람이보살핀흔적이느껴지지않을수록가치가있다고덧붙였다.산수경석이나물형과문양을품은돌은겉모양만으로도이목을끌지만,감상하는사람의마음으로읽히는것이좋은돌이라고나름의안목을피력하셨다.
아!그렇구나.시시때때로표정이변하지않고침묵하는돌이라면자연그대로에있는것아닌가,순간정신이번쩍들었다.큰바위가험준한계곡을굴러내려오는동안모진풍상을다겪었으리라.깨지고마모되어뭉툭한돌덩이가내앞에있음에야.고난과역경속에서무슨아름다운문양을욕심내겠는가.나도모르게선생님얼굴을훔쳐보았다.이렇듯사물하나에도사색과철학으로이끌어주셨다.그래선지집필하신저서에는누구나흉내낼수없는상상력과감수성이깃들어있다.또한시적인언어로조탁한문체는기발하고참신하다.이러한교수법으로우리를가르치셨다.하지만그그림자도따라가지못한채안개속에서헤매고있었으니함께한시간이두고두고아쉽고그리울뿐이다.
불교에서는사제간이되려면일만겁의인연이필요하다고한다.더군다나이십여년을매주스승과제자로서마주하고글공부를했으니귀하고특별한인연이다.수업시간틈틈이글을쓰는것보다가정에충실하고,문학상에연연하기보다누구나감동하는글한편남기라고당부하셨다.사람의됨됨이는물론자연현상이나사물을관찰하는안목을가르치셨다.말수가적어제자들의수다에도내색없이그냥통영벅수같은웃음을지으셨다.인생숙제가대충끝난인생2막에이렇게고졸한인품을가진스승을만났으니내삶도성공한삶이아니던가.때로는인생까지되어주신우리스승님!
우리제자들은스승님이만들어주신큰그늘에서모두작가로등단했고,2010년에(드레문학회)를결성했다.벚꽃흩날리는하동의봄,순천만의갈대밭,전국유명한곳곳에문학기행을다녔다.오키나와에갔을때는‘마부니언덕’에있는화살표를꼭봐야한다며청년처럼앞장서시던모습이아직도눈에선하다.2015년에는동인지(에스프리드레)를창간했으며올해9호동인지가발간된다.

생전에책한권분량의수필을작가마을출판사에보관해두셨다는소식을전해듣고놀랍고반가웠다.어떤작품인지궁금하기도했다.그래서제자들은유고집을펴내기로했다.어려운시기에도선뜻비용을찬조해주신동인들의깊은정에감동할따름이다.동인이아닌데도스승님과인연이닿아동참해주신수필가님들에게도고마움을전한다.또한스승님의작품을보관하고출판해주신작가마을배재경사장님에게도감사드린다.
얼마지나면골목길의벚나무도단풍이들고,빈빈의감나무도열매가탐스럽게익을것이다.스승님은발갛게익은감을감나무의심장이라고하셨지만,나는이유고집이스승께서이세상에남기신꺼지지않는불꽃이라고말하고싶다.머나먼곳에서타임머신을타고오신듯유고집행간에서생생한언어로다시뵙게될그날이기다려진다.
붉디붉은가을이저만치오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