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고백, 임금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 군주 평전 시리즈 4

세종의 고백, 임금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 군주 평전 시리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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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안민安民’ ‘위민爲民’ ‘편민便民’의 32년
젊은 정치학자, 세종 ‘신화’에 도전하다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을 넘어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는 세종을 떠날 수 없다. 당장 지금 이 글도 세종이 창제한 한글 덕분이다. 뿐이랴 자주 쓰는 만원권 지폐를 통해서도 세종을 만난다. 그러니 그는 아주 성공적인 통치자, 한국사 최고의 성군聖君, 명군名君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세종 스스로는 말년에 자신의 통치를 돌아보며 실패투성이로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세종은 무수한 실패를 겪으면서 성장해 간 인물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저자는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위대한 통치자로서 세종 이도의 실체를 모색하고 있다.

세종이 아닌 인간 이도
이 평전은 ‘이도李裪’라는 한 인간의 정치적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각 문장의 서술에서부터 주어로 세종이 아니라 이도라는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세종世宗’이라는 묘호는 이도가 죽은 후에 임금으로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평전은 사후의 칭송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국왕이라는 정치행위자로 살아간 한 인간의 행적을 고찰한다. 독자들은 이 평전에서 결코 완성형이 아닌, 성장하는 국왕으로서 이도의 정치적 여정을 함께하면서 세종 이도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기록에 대한 비판적 접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세종 이도의 정치적 삶을 기록하고 있는 《세종실록》은 그의 사후에 만들어졌다. 이도 자신도 재위 중에 《태조실록》, 《태종실록》을 신하들을 시켜 몇 차례 수정하며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의 정변을 정당화했다. ‘신화와 성역’을 넘어서기 위한 비판적 사료 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젊은 정치학자인 저자는 이 지점에 대담하게 도전했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이 평전은 권력과 이념의 대립에 주목하고 있다. 정치적 현실과 도덕적 이상의 대립이다. 저자는 도덕과 윤리로 점철된 역사의 기록들 속에서 정치적 수사들을 발견한다. 그렇게 해서 화폐 및 공법 개혁, 영토 개척, 사민 등 정책을 둘러싼 시행착오, ‘공론정치’를 위한 의정부 서사제 도입 배경 등을 통해 세종 정치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장형 양녕의 처우, 골칫거리 며느리 처리 등 군주 이전에 왕실의 가장인 인간 세종의 민낯을 만날 수 있다.

‘견습국왕’에서 ‘국왕 아닌 국왕’까지
평전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크게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국왕이 된 셋째 왕자’는 왕자 이도가 태종의 선택을 받아 ‘견습국왕’ 생활을 하던 시절을 다룬다. 겨우 2개월의 세자생활을 거친 젊은 국왕이 살얼음판 같은 처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2부 홀로서기’는 태종의 서거 이후 본격적인 친정을 시작한 이도의 집권 전반기를 다뤘다.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관리하고, 흉년으로 인한 국내정치와 사대교린의 국제정치, 그리고 재정 문제까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해결해가는 젊은 국왕의 모습을 제시했다.
‘3부 태평의 시대’와 ‘4부 야망과 교착’은 근면한 통치자로서의 그의 통치 스타일이 제시된다. 3부가 국내정치의 안정화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4부는 영토 개척의 지난한 과정을 소개했다.
‘5부 전환의 시도’와 ‘6부 국왕 아닌 국왕’은 자신에게 몰린 업무와 권한을 대신들과 세자에게 분산시킨 이후, 국왕의 행적을 분석했다. 그는 더 많은 재정의 확보를 위한 세금 개혁 나아가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역사서 편찬, 통치 지침서 편찬, 궁중의례에 사용하는 신악 등 앞으로 수백 년간 지속할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것으로 왕업을 마친다.

세종의 통치 전반을 정리, 평가한 첫 번째 시도
세종에 대한 연구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의 통치 32년을 제대로 정리하고 평가해낸 저작은 없었다. 그동안은 주제별 혹은 특정 분야의 분석에 그쳐왔다. 문文, 사史, 철哲의 인문학적 연구성과를 섭렵한 저자는 젊은 정치학자의 패기로 세종 이도의 통치 전반을 정리, 분석해냈다.
무엇보다 전문 학술 연구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을 위해 간결하고 쉬운 서술을 추구했다는 점이 이 평전의 미덕이다.
꼭 일 년 전인 지난 해 12월 선보인 《태종처럼 승부하라》를 시작으로, 조선왕조 초기 군주 4인의 통치술과 인간적 면모를 살핀 기획 ‘군주 평전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걸맞은 수작이다. 비록 재위 순서에는 어긋나지만.
저자

송재혁

고려대학교정치외교학과를졸업하고,같은대학대학원정치외교학과에서석사와박사학위를받았다.현재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원연구교수로재직중이다.전공분야는한국및동양정치사상으로,그동안조선초기국가건설의구체적인내용을당대의정치가들이활용한서적들을통해밝히는연구를수행해왔다.

최근에는조선초기의정치지성사연구에관심을기울이고있다.주요논문으로는〈정도전의국가론:《조선경국전》과원제국의유산〉,〈정도전은왜인용한자료를밝히지않았나?:창업군주를위한통치론의저술과원제국의유산〉,〈세종과《소학》:민풍과사풍의교화〉,〈세종,역사를고치다:세종20년신개의상소와무인정변의재구성〉,〈헌장의수호자:세종시대황희의정치적역할〉등이있다.

목차

책을내며
프롤로그
세종연보

1.국왕이된셋째왕자[출생부터아버지의죽음까지:1397~1421]

1장세자가아닌왕자
1.정안군이방원의셋째아들
한양에서태어나다|의심스러운기록들|이도가수정한실록들|정치적인간
2.셋째왕자로서의삶
형제와자매|대군시절의스승들|“보통사람이아니다”|세자가아닌왕자
3.우연히찾아온기회
확고했던후계자|태종이세자를쫓아내다|또한명의태종,양녕

2장태종이선택한국왕
1.세자가되다
경쟁자들|세자로낙점되다|2개월을채우지못한세자생활
2.국왕의자리에오르다
태종의전격적인양위|경복궁에서즉위하다|즉위교서를발표하다|국왕으로서의삶
3.첫걸음을딛다
준비되지않은국왕|“상왕께아뢸것이다”|제왕학의교과서《대학연의》

3장입지를구축하다
1.견습의시기
왕위의왕,태종|태종의음모|처가의몰락을막지못하다|허수아비국왕
2.인내하며역량을기르다
집현전과경연|군사의중요성을터득하다|국왕의대권을배우다
3.어머니와아버지의죽음
태종의이궁을오가다|어머니민씨가죽다|상왕의신뢰를얻다|아버지태종이죽다

2.홀로서기[집권전반기:1422~1427]

4장친정을시작하다
1.신중히왕위를계승하다
위험인물양녕|또다른위협을제거하다|아버지의신하들
2.하늘의시험
시작부터흉년|9년의홍수와7년의가뭄|구휼에힘쓰다|정부규모를축소하다
3.외교의시험대에오르다
영락제의횡포|태종의지성사대를계승하다|남방의왜인과북방의야인

5장시행착오를겪다
1.본격적인통치에나서다
누이와맏딸의죽음|태종의상제를마치다|강무를재개하다|성실한국정운영|성군현상의시대
2.실패를맛보다
동전의보급을시도하다|이론과다른정치|책임을회피하다
3.위기에빠지다
병이나다|수도한양이불타다|용두사미로끝나버린개혁

6장주도권을가져오다
1.기강을확립하다
태종의총신을벌하다|부패단속을시작하다|가벼운처벌로마무리짓다|국왕의대권|‘살림의정치’를지향하다
2.군사君師정치를표방하다
학문적성취를자부하다|신유학의정치론|경연을제도화하다
3.양녕대군을불러오다
전초전|의지를관철하다|새로운시대

3.태평의시대[집권중반기1:1427~1432]

7장사대와교린
1.지성으로사대하다
세자의조현을시도하다|약소국의외교|굴욕과인내
2.사대의실제와성과
금은세공의면제|조선출신의환관들|황제의신뢰를얻다
3.교린과기미
또하나의외교,교린|일본에통신사를보내다|북방의경계를고수하다

8장사회안정을꾀하다
1.민풍의교화
부민에서교민으로|범죄에강력히대처하다|교민방안을모색하다|성왕의정치를표방하다
2.신분제도를강화하다
법제화를추진하다|신분의이동을금지하다|정치의도리에대해고민하다
3.유가와법가사이
유가적군주의이면|또하나의통치수단,형벌|법전의정비에힘을쏟다

9장통치기반을확립하다
1.재정안정을꾀하다
조세제도개혁을선언하다|개혁의정당성으로백성을내세우다|17만명이상의여론을듣다|개혁을철회하다
2.수취체제를정비하다
양전을시행하다|농사를권면하다|지리서와지도를제작하다
3.근면한통치자
신하들과만날수있는자리|법궁경복궁을쇄신하다|“백성들은태평하고평안하네”

4.야망과교착[집권중반기2:1433~1437]

10장야인정벌을단행하다
1.북방의골칫거리
야인이침입하다|정벌의의지를밝히다|껄끄러운명나라의황제
2.정벌의의지를관철하다
건주위의이만주|공론정치의전제,강력한리더십|정벌을단행하다
3.거센후폭풍
초라한성과|무의정치를내세우기시작하다|황제가정벌을책망하다

11장영토개척을시작하다
1.수확의계절
어느야인추장의죽음|“영토를넓힐시기가무르익었다”|수사를동원해설득하다
2.김종서를함길도로파견하다
인재를육성하고시험하다|총애와질투|파격적인발탁
3.어렵고지루한북방개척
사민과축성의시작|군사기지를건설하다|신뢰와위임

12장교착상태에빠지다
1.소란스러운북방
지속적인소요|야인과갈등이고조되다|다시정벌을모색하다
2.재정위기에봉착하다
지독한가뭄|긴축정책을펴다|무엇을위한정치인가
3.고뇌를토로하다
골칫거리며느리|“통치한보람이조금도없다”|신하와격려를주고받다

5.전환의모색[집권후반기1:1436~1442]

13장통치제도를전환하다
1.의정부서사제를시행하다
6조직계제에서의정부서사제로|첫번째권력의이양|정치적책임을분산하다
2.정치적동반자,황희
치세를함께하다|헌장의수호자|유위의정치와무위의정치
3.실질적인수상,신개
“내신개를얻음이늦었다”|2차야인정벌을주도하게하다|총애를선사하다

14장누적되는피로
1.권력의이양을시도하다
준비된세자|세자의섭정을꺼내들다|논전에서물러나다
2.무인년의정변을재구성하다
이상한기록|신개의건의|민감한정변의기록|이숙번을소환하다|정변의완결
3.사그라드는의욕
경연을중단하다|“나이제늙고병들었다”|여러번의온천행

15장조세제도를개혁하다
1.다시개혁을모색하다
선봉에선정인지|공법상정소를설치하다|공법의포기를선언하다
2.개혁을강행하다
마침내공법을시험하다|세액을고정하고답험을배제하다|더많은세금을위한개혁
3.부국과안민
취렴의군주|개혁의마지막진통|개혁을완수하다

6.국왕아닌국왕[집권후반기2:1443~1450]

16장일선에서물러나다
1.권력을이양하다
후계자육성|편법을동원하다|태종의그림자
2.이름뿐인왕위
세자에게국왕의일을맡기다|깊은궁궐에은거하다|대군들의집을전전하다

17장영원한왕국을꿈꾸다
1.새로운문자를만들다
25년통치의결과물|중화에서이적으로|표준의수용과동국의탄생|훈민과편민
2.건국과정변의정당화
실록을수정하다|공덕과천명으로건국을정당화하다|망국의역사를완성하다
3.통치의표준을남기다
통치자를위한다이제스트|후계자들을위한감계|왕조의영원을노래하다

18장먹구름이드리우다
1.고뇌와신앙
두아들의죽음|왕비가먼저떠나다|불사를벌이다
2.수양이부상하다
혼란한국제정세|세자가쓰러지다|수양이사신을맞이하다|죽음을대비하다

에필로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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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성공과실패의이분법을넘어
이땅에살아가는우리는세종을떠날수없다.당장지금이글도세종이창제한한글덕분이다.뿐이랴자주쓰는만원권지폐를통해서도세종을만난다.그러니그는아주성공적인통치자,한국사최고의성군聖君,명군名君으로기억된다.하지만세종스스로는말년에자신의통치를돌아보며실패투성이로평가했다.그의말처럼세종은무수한실패를겪으면서성장해간인물이었다고말하는편이사실에가까울것이다.저자는성공과실패라는이분법을지양하고,위대한통치자로서세종이도의실체를모색하고있다.

세종이아닌인간이도
이평전은‘이도李?’라는한인간의정치적삶을다루고있다.그러기에각문장의서술에서부터주어로세종이아니라이도라는그의이름을사용하고있다.‘세종世宗’이라는묘호는이도가죽은후에임금으로서의공적을기리기위해붙여진이름이다.이평전은사후의칭송이아니라당대의정치적현실속에서국왕이라는정치행위자로살아간한인간의행적을고찰한다.독자들은이평전에서결코완성형이아닌,성장하는국왕으로서이도의정치적여정을함께하면서세종이도의진짜모습을만날수있을것이다.

‘견습국왕’에서‘국왕아닌국왕’까지
평전은시간적흐름에따라크게6부로구성되어있다.‘1부국왕이된셋째왕자’는왕자이도가태종의선택을받아‘견습국왕’생활을하던시절을다룬다.겨우2개월의세자생활을거친젊은국왕이살얼음판같은처지에있었음을보여준다.‘2부홀로서기’는태종의서거이후본격적인친정을시작한이도의집권전반기를다뤘다.왕위를위협하는요소들을관리하고,흉년으로인한국내정치와사대교린의국제정치,그리고재정문제까지시행착오를겪어가며해결해가는젊은국왕의모습을제시했다.

‘3부태평의시대’와‘4부야망과교착’은근면한통치자로서의그의통치스타일이제시된다.3부가국내정치의안정화에관련된내용이라면,4부는영토개척의지난한과정을소개했다.
‘5부전환의시도’와‘6부국왕아닌국왕’은자신에게몰린업무와권한을대신들과세자에게분산시킨이후,국왕의행적을분석했다.그는더많은재정의확보를위한세금개혁나아가훈민정음창제를비롯하여역사서편찬,통치지침서편찬,궁중의례에사용하는신악등앞으로수백년간지속할조선왕조의기틀을다지는것으로왕업을마친다.

세종의통치전반을정리,평가한첫번째시도
세종에대한연구는무수히많다.그러나그의통치32년을제대로정리하고평가해낸저작은없었다.그동안은주제별혹은특정분야의분석에그쳐왔다.문文,사史,철哲의인문학적연구성과를섭렵한저자는젊은정치학자의패기로세종이도의통치전반을정리,분석해냈다.

무엇보다전문학술연구자임에도불구하고,대중들을위해간결하고쉬운서술을추구했다는점이이평전의미덕이다.
꼭일년전인지난해12월선보인《태종처럼승부하라》를시작으로,조선왕조초기군주4인의통치술과인간적면모를살핀기획‘군주평전시리즈’의마지막을장식하기에걸맞은수작이다.비록재위순서에는어긋나지만.

책속에서

이도의경우,1418년(태종18)에와서야갑작스럽게세자였던맏형이제대신세자가되었고,그로부터2개월뒤에전격적으로왕위에올랐다.그러한과정을기록하고있는《태종실록》은이도의재위기인1423년(세종5)에편찬을시작하여,1431년(세종13)에완성되었다.……그가왕위에오른1418년과그이전의기록그리고그후의기록까지도‘승자의기록’이라는점에유의할필요가있다(33쪽).

태종은맏이와셋째의위치를확실히구분했다.태종은이도에게서화,화석花石,금슬琴瑟등과같은좋은예술품을두루제공했다.“너는할일이없으니,편안하게즐기기나할뿐이다.”이때문에이도는다양한예술분야에정통하게되었고,세자에게금슬을가르쳐줄정도의실력도갖춘다.세자가아니었기에배울수있었던기예였다.그러나아이러니하게도왕위에오른후다양한분야의업적을쌓는데도움을준다(42쪽).

태종은자신이후의시기를“수문守文”,즉아버지와자신이이제까지건설해온국가를지켜나갈수성守成의시대로규정하고있었다.자신이권력정치를통해구축한비정상의정치를학문과이념의정치로정상화할수있는후계자를원했던것이다(48쪽).

1418년8월8일태종은세자이도에게국왕의상징인국새를넘겼다.이도의나이스물둘이었다.……그는손수임금의모자인익선관을아들이도에게씌워주고,국왕을상징하는의장을준비하여경복궁에가서즉위하게한다(59쪽).

이도는“시인발정施仁發政”이라는말을통해신민들에게좋은정치를펼칠것을약속했다.“시인발정”은유학경전인《맹자》에나오는말이다.맹자는주나라의문왕이펼친왕도정치를이상적인사례로설명하면서“발정시인發政施仁”이라는용어를사용했다.태조이성계와태종이방원은국가창건과제도정비에힘을기울여야만했다.이에따라지금까지는조선이라는국가의제도화작업만이루어졌다.앞으로는그것에내용을채우는것,즉이념적인정체성을불어넣는작업이필요했다(62쪽).

임금이지신사하연河演에게말한다.“내가인물을잘알지못하니,좌의정,우의정과이조,병조의당상관과함께의논하여벼슬을제수하려고한다.”……“의논해서벼슬을제수하고자한다”라는말을이른바세종식통치방식인‘공론정치公論政治’의시작으로해석하는견해도있다.그러나아무런준비없이갓국왕이된이도다.당연히신하들의의견에따를수밖에없다(65쪽).

이도는견습국왕이었다.그는형식상의국왕이었고,실권자는상왕태종이었다.곁에있던신하들도태종과함께잔뼈가굵은이들이었다.이도는신하들의말에“다시의논해야할것이오”라며유보하거나,“상왕께아뢸것이다”라고대답할수밖에없었다.인내하며자신의역량을키워가야했다(67쪽).

국가의통치는전례나원칙을따라야한다.국왕이라고자의적으로통치할수없다.특히조선은유교국가를표방했다.그러나태종은학자로서자신의학술적지식에의존했고,별도의자문기구를두지않았다.이러한측면에서이도가재위초기에학술자문기구인집현전을설치한것은정상화의의미를지닌다(78쪽).

태종이소천한해에이도는“유언비어를퍼뜨린죄를처결할때에,그말이임금까지미쳐서올바른도리에박절하고해로운자는참형으로처단하고,그렇지않은자는장100대,유배3년으로처결하라”는명령을내린듯하다.성군의이미지와는어울리지않는지시이다.그만큼재위초기왕권의확립이중요했다는말이된다(96쪽).

가뭄은끝없이이어졌다.후일“즉위한이래,22년동안재해가없는해가없었다”라고언급할정도였다.32년의재위기간중가뭄으로기우제를지내지않은해가6년에불과했다.거듭된흉년으로끝이보이지않는구휼작업이진행되었다.……구휼작업은당장먹을양식을주어구황하는진제賑濟와농사지을종자를환자還子로빌려주는방식으로진행되었다.이러한목적으로설립한것이의창義倉이다(105쪽).

부족한재정을타개하는별도의방안을모색해야했다.……이도는정부규모를축소하여정부운영에드는비용을줄이는방안을선택했다.우선각관사의인원중에서꼭필요하지않은인원을내보냈다.이해12월에는수도한양과지방의관원중에서쓸데없는관원을그만두게했다(106쪽).

이도는태종의이러한외교전략을계승했다.지성사대의외교전략은강대국인명의영향력을무시할수없다면,그영향권안에서최대한의안정성을확보하고소국으로서가능한것에힘을집중하는전략이다.……조선은제후국으로서자신의의무를충실히수행함으로써,명을중심으로구성되는국제질서내부에서공고한지위를추구했다.나아가성실한제후국으로서명의비호아래에서국내정치를안정적으로운영하면서다른제후국들과의관계를독자적으로구축해나갔다(110쪽).

이도는……매년강무를시행했다.군사적인대비만으로는볼수없다.부왕과마찬가지로이도역시권력을유지하는수단으로무력을활용했음을확인할수있다.……1424년이후1446년(세종22)까지매년강무를떠난다.최소4일에서최대14일이었고,대부분10일내외로강원도철원과평강등지에서시행했다(118쪽).

1446년(세종28)즈음이도는자신의실패들을거론한다.내가즉위한이래로새로입법한것이많았다.그러나내가현명하지못한이유로,문제가생길것을예측하지못했다.전폐錢幣,호패,수차,아악등의사례가그런데,모두셀수없을정도다.입법할때결과를미리헤아려서처리했더라면,이런지경까지는이르지않았을것이다(124쪽).

내가그말을믿고서저화를폐지하고동전을발행했다.그런데지금몇해도되지않아서백성들이즐겨사용하지않아저화처럼무용지물이되어버렸다.동전보급정책의실패를대신들의탓으로돌리고있다.여러신하가잘못된주장을해서사태가이지경이되었다는것이다.결정을내리고정책을추진한것은국왕인이도자신이었다(128쪽).

전왕조의말년에뇌물을공공연하게주고받더니,옛날습관이아직도남아있다.한양과지방의관리들이관가의물건을공공연하게뇌물로주고도태연하게여기면서조금도이상하게생각하지않는다.오히려주는것을받지않는자가비웃음을당할정도다.국가재산을훔치는관리들이계속해서나오니,내가매우민망하게여긴다(138쪽).

이도는부패문제를자신의책임으로돌렸다.……이도가통치한지얼마되지않았다.부패의씨앗을발아시킨것은따지고보면태종이었다.그렇다면부패문제는태종의정치,나아가그가일으킨두차례의정변,아예조선건국의정당성문제로도연결될수있었다.태종이이룬긍정적업적조차부정되고,이도자신의통치기반조차부정될수있었다(143쪽).

이도는현행법에따른죄와형벌의적합성을넘어서사고하고있다.요컨대“죽이지않겠다”라는것이다.사람을죽이지않겠다는이도의강한의지는다음의말에서도확인된다.“조말생의탐욕이너무크기때문에,그죄는목을베야만한다.그러나그는국가에공로가있으니죽일수는없다.더구나대신을죽이지않는다는조종의법이이미서있지않은가.”이도는정치적죽음을원하지않는다.태종의권력정치를통해발생했던정치적죽음에대한부정인듯하다.이도는‘인의정치’,‘살림의정치’를지향하고있다(144쪽).

이도는이제주도권을가져오기시작했다.그러나단순하게정치술이나신하들의약점을지적하면서우위에서는것만으로는부족하다.그렇다면이도는무엇을가지고국왕으로서의권위를확보하려했을까?바로학문적성취였다(145쪽).

이도가열었던경연에대해좀더자세히살펴보자.그의학술적성취는풍요로운통치의성과로연결된다.이도는재위기간에총1,898회의경연을개최했다.그는1439년(세종21)윤2월16일까지경연을열었다(149쪽).

정책적현안과관련된책들도경연에서다뤘다.그는법전을편찬하는과정에서《육전》을두번이나경연에서읽었다.음악서인《율려신서》를읽고는,음률을제정하여아악보를완성했다.중국어습득을위해《직해소학直解小學》을경연에서강의했고,수도의풍수지리를파악하기위해풍수학서적까지경연을통해다뤘다.후대의관성적인경연과는차이가엿보인다(152쪽).

이도는유학의도덕과윤리를백성들에게보급하는정책을시도했다.충과효의이데올로기를백성들에게내면화시켜정치공동체를안정시키고자한것이다.이시기에유교적의례들이보급된다.사당을세워제사를지내도록하고,그럴수없는가난한사람들에게는안방에서제사를지내게하는의례가이시기에보급되기시작했다(184쪽).

이도는노비에대한처우를획기적으로개선했던인물로알려져있다.노비에게도출산전이나후에휴가를주고,양로연을열면서나이가많은사람은노비라할지라도참여하게했다.나아가이도는노비의존재에의문을품을정도로시대를앞서간인물이었다(188쪽).

이도는결국백성들이억울함을호소할수있는법안을법전에포함했다.1433년(세종15)《신찬경제속육전》이라는새로운법전을발간했다.이안에부민고소조部民告訴條가있었다.“자기의억울한일을호소한것은고소장을수리하여다시판결한다”라는조항이다(193쪽).

이도는이상주의자였다.그는인간에대한믿음이있다.법을모르기때문에죄를짓는것이라는판단이었다.그래서법전을편찬하고보급을시도했다.다만이두와한문으로된법전은관리들이해석해서백성들에게알려줘야하는한계가있었다.법전의보급작업은후일백성들이직접이것을읽을수있는수단,즉문자의발명으로이어지게된다(197쪽).

백성들이싫어한다면이법을시행할수없다.그러나농작물의잘되고못된것을답험할때에각기제주장을고집하여공정성을잃은것이자못많았다.또간사한아전들이잔꾀를써서부유한자를봐주고가난한자를괴롭히고있어,내가매우우려하고있다.각도에서보고가모두도착하거든공법의편의여부와답사해서폐해를구제하는등의일들을모든관리에게숙의하여보도하도록하라(204쪽).

《세종실록지리지》에는각고을의연혁,성씨,성곽,사찰등다른지리지에기록된정보뿐만아니라,지역별경작지,군사의수,공물,토산물등다른지리지에서는확인하기어려운다양한정보들이수록되어있다.이도가종합적이고체계적인통치를구현하려했다는사실을보여준다(212쪽).

“상참을받고,정사를보고,윤대를행하고,경연에나아갔다.”이시기이도의일과를잘보여주는기록이다.신하들이국왕을알현해정무에관하여보고하는조회인상참常參과조참朝參,정무에대한토론을하는시사視事,각관아의관리들이돌아가며국왕과접견하는윤대輪對,고전에토론하며성학을연마하는경연을정열적으로이어간다.관료들과직접접할수있는다양한통로들이활성화되면서,정책결정과정의객관성,합리성,공정성등을확보할수있었다(214쪽).

야인정벌의경우,이도는약3개월동안20여차례의회의를개최하며정벌을반대하는신하들을설득했다.요컨대공론정치는강력한리더십을전제로한다.단순하게여러사람의의견을듣는것만으로는정책이결정되거나진행되지않는다.논의는정책의방향을결정하는리더십이있어야만의미가있다(230쪽).

이도는인복이괜찮았다.그러나이도스스로많은인재를길러냈다는점이높게평가되어야한다.……많은시간을들여인재들을육성하면서,동시에쓸만한인물인지시험했고,최종적으로는적재적소에배치해활용했다.그중에서도김종서와정인지는이도가육성한대표적인인물이다(246쪽).

김종서는7년동안영토개척에헌신했다.1435년(세종17)3월27일이도는김종서를아예군사를관장하는함길도도절제사로임명했다.그는1440년(세종22)까지도절제사를맡았다.……오랫동안북방의전권을맡기고,작은허물에대해서는논죄하지않는다는것이이도의신념이었다(253쪽).

이도는6조직계제를물려받았다.그러나이제더이상중신들을견제할필요는없었다.……6조직계제는국왕의개인적인능력에의존하는통치제도이다.재위18년째인1436년즈음에이르러이도는그것을더이상유지하기어렵다고판단했다.이도가의정부서사제로통치제도를변경한다고교서를선포한것은4월12일이었다(280쪽).

“6조는안건을먼저의정부에보고하고,의정부에서는가부를의논하여아뢴뒤에임금의분부를받아서도로6조로돌려보내서시행하게하라.”이도는의정부의재상들에게자신이해야하는일들을배정했다.물론임금의대권만은자신이그대로가지고있었다(282쪽).

이도는32년이라는오랜기간국왕을역임했다.국왕으로서경험과연륜이쌓일수록,그는많은혁신을추구했다.……반면황희는보수적인입장을견지했다.한사직상소에서그는다음과같이자신의역할을이도와구분했다.“하고자하는바를반드시그대로하는것은임금의중요한권한[대법大法]이지만,할수없는것을그치게하는것은충성스런신하의지극한마음입니다.”(288쪽)

의정부에자신의의중을파악하고힘을실어줄수있는심복들을임명해놓았다.대표적인인물이신개申?(1374~1446)였다.그는이도에게배향된7명의배향공신중하나다(290쪽).

《서경》에서한임금은대신을자신의복심腹心으로비유했다.이도에게는신개가그러한복심이었다.의논할일이있으면번번이개인집무실로불러들였다.후궁의승급과같은지극히개인적인일까지도신개와상의를거쳐결정할정도였다(294쪽).

1442년이저물무렵,임금이신하들을접견하는자리에서말했다.“공법의법은백성들을편리하게하고자한것이었다.그러나백성들은내가가혹하게세금을거둔다고여길것이다.”공법을전국에시험했고,신개의예상대로예전보다두배가넘는세금이걷혔다.이제이도는백성들에게가혹한세금을거두는‘취렴聚斂’의군주가되었다.신유학에서가장중요한경전이라할수있는《대학》은다음과같이경계하고있다.“백성의재물을무자비하게긁어모으는신하[취렴지신聚斂之臣]를두느니,차라리도둑질하는신하를두겠다.”부국을위해안민의가치를해쳐서는안된다는경고이다(329쪽).

“내가늙었기때문에,국가의여러업무를세자에게전부맡겼다.”그는점점더많은권력을이양해갔다.1449년(세종31)즈음에는이도가판결하는일은아주소수에불과하게되었다.사대와제향때별도로의논할일,크고작은군사를움직이는일,당상관을제수하는일,사형수에대한일이전부였다.나머지정무는모두세자가맡아서처리했다.사실상의임금은세자였고,이도는이름만국왕이었다(344쪽).

1430년에편찬한농서《농사직설》,1432년에편찬한교육서《삼강행실도》,1433년에편찬한법전《신찬경제속육전》등은모두한자로되어있다.책의대상은한자를읽을수있는관료들이다.임금이농사를권면하는교서를내려도그대상은백성이아니라관료다.관료들이그것을읽고백성들에게임금의지시를알려줘야한다.문자가통치의효율을저해한다.훈민정음은이도가25년간의통치를결산한결과물이었다(350쪽).

실록의수정작업은태종이일으켰던무인정변의정당화에국한되지않았다.이도는수정을준비하는과정에서태조의조선건국을정당화하는작업도수정의범위에포함시켰다.이해3월1일임금은태조가왜구를소탕한사적을조사하여보고하도록경상도와전라도의관찰사에게지시한다(359쪽).

문자의창제,역사서의편찬작업과함께이도가수행한마지막과업중하나는후계자들을위해통치지침서를편찬하는작업이었다.그중에서가장심혈을기울인책이《치평요람治平要覽》이다(365쪽).

세종은부국강병을이루려했던임금이었다.화폐개혁,영토개척,공법개혁,축성,사민등은그것을위한대표적인정책들이다.부국강병은안민과는배치된다.물론세종이이뤄낸부국강병은후일안민의초석이되었다.조선은이후450년이상유지되면서공동체구성원들의삶을보장했다(3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