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말 따로 글 따로 ‘성지聖旨’는 춤췄다
색다르게 본 여말선초 공식 외교 이면
색다르게 본 여말선초 공식 외교 이면
대조선 외교는 명 황제의 개인 비즈니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 때까지에 해당하는 1368년부터 1449년까지, 명나라 초기 네 명의 황제들의 말과 글을 통해 조-명 외교의 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당시는 양국의 왕조가 교체되면서 철령위 설치, 만산군 처리, 만주 여진의 관할 등 굵직한 과제가 산적해 있던 시기다. 해서 후대에 비해 양국 간에 활발하게 사신이 오갔지만 그 이면엔 황제 개인의 기호를 충족하기 위한 압력이 가해지곤 했다.
고려시대사와 전근대 국제관계사를 천착하고 있는 지은이는 말과 글, 전달 통로에 따라 명 황제의 메시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주목해, 명 조정에 있어 외교는 황제의 개인 비즈니스였다는 흥미로운 결론을 끌어낸다.
눈 가리고 아웅, 명 황제의 두 얼굴
황제의 말은 글과 달랐다. 조서, 칙서, 선유성지 등 황제 메시지의 형식을 설명하면서 홍무제가 직접 쓴 수조手詔에는 고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정벌에 나서겠다고 거친 협박을 했던 사실을 들려준다. 반면 뒤를 이은 영락제나 선덕제는 환관들을 통해 사냥개, 매 등은 물론 “전에 보낸 공녀들이 별로 예쁘지 않으니 새로 뽑아 보내라”든가 “짐이 늙어서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을 보내라”, 심지어 “두부 만드는 법을 익힌 여자를 보내라” 등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메시지를 슬며시 건네기도 했다. 문서에 남기고 싶지 않거나 외정의 원로들은 물론 내정의 어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요구사항들을 말로 전달한 것이다.
약한 자의 설움, 조선의 속앓이
황제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조선의 조정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태종은 아버지의 상복을 입고서도 명에 보낼 미녀 선발 심사에 임해야 했고, 세종은 무려 열여섯 번이나 심사장에 나서야 했다. 그러기에 세종은 선덕제를 “멍청한 임금”이라 비난하는가 하면 환관들의 구두 요구에 응하되 이를 문서화해 보고하려는 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런 내밀한 외교 이면은 전말을 꼼꼼히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덕분에 파악할 수 있거니와 지은이는 선덕제가 “사냥개와 매 같은 것은 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명측 기록을 두고 “당장 잡아서 보내라”는 조선 측 기록을 바탕으로, 선덕제를 성군聖君으로 묘사한 중국 역사책의 평가는 거짓말로 지은 집이라 비판한다.
눈뜨고 못 볼 환관 사신들의 호가호위
황제들의 은밀한 요구를 전달하는 통로는 조선 출신 환관들이었다. 황제들과 가까워 가려운 데를 잘 긁어주기도 했고, 보안 유지에 편했으며 조선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영락~선덕 연간에 조선에 온 사신단의 90% 이상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유교적 체면이나 염치와 거리가 있었던 이들의 위세는 대단해서 뇌물을 요구하고, 이를 쌓아둘 창고를 지어달라 청하고, 친척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반면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후안무치에 치를 떨면서도 세자가 명 황제를 찾아 인사하는 조현 준비나 부담스러운 소 무역 경감에 활용하는 등 조-명 외교관계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데 이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황제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요동치던 조-명 관계는 1435년 조선에 관심이 없었던 7살의 정통제가 즉위 후 조선에서 보냈던 여종 등 50여 명을 모두 돌려보내면서 안정기에 접어든다. 환관 대신 조관이, 말 대신 글이 외교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비정상화의 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책은 그 과정을 촘촘히 따라가며 황제들의 속내와 이를 감추려 했던 명나라 지식인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황제의 글과 함께 야비한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 말을 그대로 적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자들, 그리고 눈 밝은 한 연구자의 노고 덕분이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 때까지에 해당하는 1368년부터 1449년까지, 명나라 초기 네 명의 황제들의 말과 글을 통해 조-명 외교의 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당시는 양국의 왕조가 교체되면서 철령위 설치, 만산군 처리, 만주 여진의 관할 등 굵직한 과제가 산적해 있던 시기다. 해서 후대에 비해 양국 간에 활발하게 사신이 오갔지만 그 이면엔 황제 개인의 기호를 충족하기 위한 압력이 가해지곤 했다.
고려시대사와 전근대 국제관계사를 천착하고 있는 지은이는 말과 글, 전달 통로에 따라 명 황제의 메시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주목해, 명 조정에 있어 외교는 황제의 개인 비즈니스였다는 흥미로운 결론을 끌어낸다.
눈 가리고 아웅, 명 황제의 두 얼굴
황제의 말은 글과 달랐다. 조서, 칙서, 선유성지 등 황제 메시지의 형식을 설명하면서 홍무제가 직접 쓴 수조手詔에는 고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정벌에 나서겠다고 거친 협박을 했던 사실을 들려준다. 반면 뒤를 이은 영락제나 선덕제는 환관들을 통해 사냥개, 매 등은 물론 “전에 보낸 공녀들이 별로 예쁘지 않으니 새로 뽑아 보내라”든가 “짐이 늙어서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을 보내라”, 심지어 “두부 만드는 법을 익힌 여자를 보내라” 등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메시지를 슬며시 건네기도 했다. 문서에 남기고 싶지 않거나 외정의 원로들은 물론 내정의 어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요구사항들을 말로 전달한 것이다.
약한 자의 설움, 조선의 속앓이
황제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조선의 조정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태종은 아버지의 상복을 입고서도 명에 보낼 미녀 선발 심사에 임해야 했고, 세종은 무려 열여섯 번이나 심사장에 나서야 했다. 그러기에 세종은 선덕제를 “멍청한 임금”이라 비난하는가 하면 환관들의 구두 요구에 응하되 이를 문서화해 보고하려는 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런 내밀한 외교 이면은 전말을 꼼꼼히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덕분에 파악할 수 있거니와 지은이는 선덕제가 “사냥개와 매 같은 것은 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명측 기록을 두고 “당장 잡아서 보내라”는 조선 측 기록을 바탕으로, 선덕제를 성군聖君으로 묘사한 중국 역사책의 평가는 거짓말로 지은 집이라 비판한다.
눈뜨고 못 볼 환관 사신들의 호가호위
황제들의 은밀한 요구를 전달하는 통로는 조선 출신 환관들이었다. 황제들과 가까워 가려운 데를 잘 긁어주기도 했고, 보안 유지에 편했으며 조선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영락~선덕 연간에 조선에 온 사신단의 90% 이상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유교적 체면이나 염치와 거리가 있었던 이들의 위세는 대단해서 뇌물을 요구하고, 이를 쌓아둘 창고를 지어달라 청하고, 친척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반면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후안무치에 치를 떨면서도 세자가 명 황제를 찾아 인사하는 조현 준비나 부담스러운 소 무역 경감에 활용하는 등 조-명 외교관계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데 이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황제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요동치던 조-명 관계는 1435년 조선에 관심이 없었던 7살의 정통제가 즉위 후 조선에서 보냈던 여종 등 50여 명을 모두 돌려보내면서 안정기에 접어든다. 환관 대신 조관이, 말 대신 글이 외교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비정상화의 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책은 그 과정을 촘촘히 따라가며 황제들의 속내와 이를 감추려 했던 명나라 지식인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황제의 글과 함께 야비한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 말을 그대로 적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자들, 그리고 눈 밝은 한 연구자의 노고 덕분이다.
황제의 말과 글 : 조선을 대하는 명나라 황제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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