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말과 글 : 조선을 대하는 명나라 황제의 두 얼굴

황제의 말과 글 : 조선을 대하는 명나라 황제의 두 얼굴

$18.00
Description
말 따로 글 따로 ‘성지聖旨’는 춤췄다
색다르게 본 여말선초 공식 외교 이면
대조선 외교는 명 황제의 개인 비즈니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 때까지에 해당하는 1368년부터 1449년까지, 명나라 초기 네 명의 황제들의 말과 글을 통해 조-명 외교의 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당시는 양국의 왕조가 교체되면서 철령위 설치, 만산군 처리, 만주 여진의 관할 등 굵직한 과제가 산적해 있던 시기다. 해서 후대에 비해 양국 간에 활발하게 사신이 오갔지만 그 이면엔 황제 개인의 기호를 충족하기 위한 압력이 가해지곤 했다.
고려시대사와 전근대 국제관계사를 천착하고 있는 지은이는 말과 글, 전달 통로에 따라 명 황제의 메시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주목해, 명 조정에 있어 외교는 황제의 개인 비즈니스였다는 흥미로운 결론을 끌어낸다.

눈 가리고 아웅, 명 황제의 두 얼굴
황제의 말은 글과 달랐다. 조서, 칙서, 선유성지 등 황제 메시지의 형식을 설명하면서 홍무제가 직접 쓴 수조手詔에는 고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정벌에 나서겠다고 거친 협박을 했던 사실을 들려준다. 반면 뒤를 이은 영락제나 선덕제는 환관들을 통해 사냥개, 매 등은 물론 “전에 보낸 공녀들이 별로 예쁘지 않으니 새로 뽑아 보내라”든가 “짐이 늙어서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을 보내라”, 심지어 “두부 만드는 법을 익힌 여자를 보내라” 등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메시지를 슬며시 건네기도 했다. 문서에 남기고 싶지 않거나 외정의 원로들은 물론 내정의 어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요구사항들을 말로 전달한 것이다.

약한 자의 설움, 조선의 속앓이
황제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조선의 조정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태종은 아버지의 상복을 입고서도 명에 보낼 미녀 선발 심사에 임해야 했고, 세종은 무려 열여섯 번이나 심사장에 나서야 했다. 그러기에 세종은 선덕제를 “멍청한 임금”이라 비난하는가 하면 환관들의 구두 요구에 응하되 이를 문서화해 보고하려는 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런 내밀한 외교 이면은 전말을 꼼꼼히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덕분에 파악할 수 있거니와 지은이는 선덕제가 “사냥개와 매 같은 것은 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명측 기록을 두고 “당장 잡아서 보내라”는 조선 측 기록을 바탕으로, 선덕제를 성군聖君으로 묘사한 중국 역사책의 평가는 거짓말로 지은 집이라 비판한다.

눈뜨고 못 볼 환관 사신들의 호가호위
황제들의 은밀한 요구를 전달하는 통로는 조선 출신 환관들이었다. 황제들과 가까워 가려운 데를 잘 긁어주기도 했고, 보안 유지에 편했으며 조선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영락~선덕 연간에 조선에 온 사신단의 90% 이상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유교적 체면이나 염치와 거리가 있었던 이들의 위세는 대단해서 뇌물을 요구하고, 이를 쌓아둘 창고를 지어달라 청하고, 친척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반면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후안무치에 치를 떨면서도 세자가 명 황제를 찾아 인사하는 조현 준비나 부담스러운 소 무역 경감에 활용하는 등 조-명 외교관계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데 이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황제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요동치던 조-명 관계는 1435년 조선에 관심이 없었던 7살의 정통제가 즉위 후 조선에서 보냈던 여종 등 50여 명을 모두 돌려보내면서 안정기에 접어든다. 환관 대신 조관이, 말 대신 글이 외교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비정상화의 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책은 그 과정을 촘촘히 따라가며 황제들의 속내와 이를 감추려 했던 명나라 지식인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황제의 글과 함께 야비한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 말을 그대로 적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자들, 그리고 눈 밝은 한 연구자의 노고 덕분이다.
저자

정동훈

2016년서울대학교에서〈고려시대외교문서연구〉라는논문으로박사학위를받았다.고려시대사,전근대동아시아국제관계사를공부하고있다.2018년부터서울교육대학에서예비초등교사들에게,역사가얼마나재미있는학문인지를전하고자애쓰고있다.

목차

책을내면서

서장

1장홍무제의말은어떻게고려에전달되었나
1.홍무제의말과한중관계
2.조서:황제명의의최고권위문서
3.수조:황제가손수쓴조서
4.자문:황제의말을인용한관문서
5.선유성지:황제의발언록
6.구선:구두메시지
7.황제의말을제도에가둘수있을까?

2장영락제의말과글은어떻게달랐을까
1.영락제재위기간의조선-명관계
2.건문?영락연간황제의명령이전달되는경로
3.글로옮긴영락제의말
4.글로옮기지않은황제의말
5.황제의명령에응하는조선의태도
6.조선-명관계의두층위

3장선덕제의말을명나라기록은어떻게조작했을까
1.성군?아니면암군?
2.홍희제의말과글
3.선덕제의글:칙서에담긴공적인외교
4.선덕제의말:구두메시지에담긴사적외교
5.서울과북경에남아있는정반대의기록
6.서울과북경에서바라본선덕제의두얼굴

4장정통제의등극과반전
1.조선-명관계는언제안정되었나?
2.외교의전면에선황제와환관들
3.외교현장에서황제의퇴장
4.대조선외교는황제의개인비즈니스

맺음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눈가리고아웅,명황제의두얼굴
황제의말은글과달랐다.조서,칙서,선유성지등황제메시지의형식을설명하면서홍무제가직접쓴수조手詔에는고려가자신의말을듣지않는다면수십만의군대를동원해정벌에나서겠다고거친협박을했던사실을들려준다.반면뒤를이은영락제나선덕제는환관들을통해사냥개,매등은물론“전에보낸공녀들이별로예쁘지않으니새로뽑아보내라”든가“짐이늙어서입맛이없으니밴댕이젓을보내라”,심지어“두부만드는법을익힌여자를보내라”등의사욕을채우기위한메시지를슬며시건네기도했다.문서에남기고싶지않거나외정의원로들은물론내정의어른들에게들키고싶지않은요구사항들을말로전달한것이다.

약한자의설움,조선의속앓이
황제들의요구에응하기위해조선의조정은속앓이를해야했다.태종은아버지의상복을입고서도명에보낼미녀선발심사에임해야했고,세종은무려열여섯번이나심사장에나서야했다.그러기에세종은선덕제를“멍청한임금”이라비난하는가하면환관들의구두요구에응하되이를문서화해보고하려는안을추진하기도했다.
이런내밀한외교이면은전말을꼼꼼히기록한《조선왕조실록》덕분에파악할수있거니와지은이는선덕제가“사냥개와매같은것은보내지말라”고했다는명측기록을두고“당장잡아서보내라”는조선측기록을바탕으로,선덕제를성군聖君으로묘사한중국역사책의평가는거짓말로지은집이라비판한다.

눈뜨고못볼환관사신들의호가호위
황제들의은밀한요구를전달하는통로는조선출신환관들이었다.황제들과가까워가려운데를잘긁어주기도했고,보안유지에편했으며조선의사정을잘알기때문에영락~선덕연간에조선에온사신단의90%이상에참여했을정도였다.유교적체면이나염치와거리가있었던이들의위세는대단해서뇌물을요구하고,이를쌓아둘창고를지어달라청하고,친척들을챙기는데도열심이었다.
반면조선측에서는이들의후안무치에치를떨면서도세자가명황제를찾아인사하는조현준비나부담스러운소무역경감에활용하는등조-명외교관계를‘원활하게’수행하는데이들을활용하기도했다.

황제의개인적성향에따라요동치던조-명관계는1435년조선에관심이없었던7살의정통제가즉위후조선에서보냈던여종등50여명을모두돌려보내면서안정기에접어든다.환관대신조관이,말대신글이외교전면에나서게된것이다.‘비정상화의정상화’라고할수있다.책은그과정을촘촘히따라가며황제들의속내와이를감추려했던명나라지식인들의위선을폭로한다.관대함을과시하려는황제의글과함께야비한욕망을숨김없이드러낸말을그대로적은《조선왕조실록》편찬자들,그리고눈밝은한연구자의노고덕분이다.

책속에서

명나라제3대황제였던영락제永樂帝(재위1402~1424),영락제의손자이자제5대황제선덕제宣德帝(재위1425~1435)는조금달랐다.그들은자신의말을문서로남기는것을꺼렸다.자신의명령이썩정의롭지않다는것을,그래서후대사람들이그것을보고자신을비난할것임을잘알고있었다(18쪽).

《세종실록》에는선덕제가조선에“사냥개와매를당장잡아서보내라”고요구하는문서를보냈다는기록이있다.반면《명선종실록明宣宗實錄》은같은문서를두고“사냥개와매같은것은보내지말라”고인용하였다.그리고이일화는선덕제의근검한품성,오랑캐들까지사랑하는인격을보여주는일화로두고두고기억되었다.거짓말로지은집이다(22쪽).

황제명의의문서는명령대상과내용에따라크게둘로나뉜다.하나는천하의모든사람을대상으로하는것이고,다른하나는특정지역이나특정직군職群의사람들,때로는특정개인을대상으로하는것이다.……대체로전자를조詔,후자를칙勅(?)이라하였다(38쪽).

황제가스스로찬술한조서도여럿있었다.당시의용어로는이를수조手詔라고하였다(43쪽).

고려가자신의명을듣지않는다면수십만의군대를동원해서고려를정벌하겠다고공공연히큰소리치고있다.가장의례적이고‘외교적인’언설을담는외교문서……치고는대단히이례적인,비정상적인내용이라고하지않을수없다(47쪽).

자문이란명나라2품이상고위관부사이에서사용했던평행문서인데,외국의군주와주고받는외교문서의서식으로도쓰였다(49쪽).

《고려사》에여러편실려있는,일반적인한문체와는뚜렷이구분되는백화체의선유성지가그것이다.선유성지란……황제의발언을그대로받아적은어록,녹취록인데,그것을별도의가공없이고려에전달한것이다(57쪽).

황제의의사가……구두메시지로전달되는경로를……사료에서는이를‘구선口宣’이라고표현하였다(66쪽).

그의재위기간22년동안명조정에서는조선에총40번의사신을파견하여연평균1.8회를기록하였는데,이는명대전체연평균0.6회를크게상회하는것이었다.이때는조선태종대거의전시기와세종초년에걸쳐있는데,그기간에조선에서명에파견한사신도연평균7.6회에이르러전체평균4.6회보다훨씬빈번하였다(84쪽).

황엄黃儼이총11차례,해수海壽와한첩목아韓帖木兒가각각7차례,기원奇原과정승鄭昇이각각3차례등몇몇환관들은반복해서조선을찾으며황제의입구실을하였다.이들환관사신들은공식적인의례의장에서황제명의의조서나칙서를전달하는외에도,연회자리에서,혹은국왕을따로면담한자리에서황제의내밀한요구를내놓았다(92쪽).

황엄이구두로성지를선포하였다.“작년에너희가여기로보낸여자들은뚱뚱한건뚱뚱하고,피부가안좋은건안좋고,키가작은건작아서모두별로예쁘지않다.다만너희국왕이공경하는마음이무거운것을보아비妃로봉할것은비로봉하고,미인으로봉할것은미인으로봉하고,소용昭容으로봉할것은소용으로봉하여모두봉하였다.왕은지금찾아놓은여자가있거든많으면두명,적으면한명이라도다시보내라.”(108쪽)

황제는그런처녀를더데려오라면서또다시황엄을서울로보냈다.……이때명측에서,조선에서공식적인명목으로내세운약재구입요청에대해서는역시예부명의의자문을통해답변을내리고,실제이유였던공녀건에대해서는사신황엄의입을통해또다시보내라는뜻을전하였다.……“조관들은알지못하게”하기위한것이었다(111쪽).

구두로전달된성지가운데는황제개인의욕구를충족시키기위한물품,혹은사람과관련된것이많았다.대표적인것이위에서언급한대로여성을보내라는요구였고,이외에도화자를보내오라거나,불경을필사할종이,부처님사리등을요구하는일도있었다.……황제의개인적인욕구를채우는데에환관들은더할나위없이좋은심부름꾼이었다(112쪽).

환관사신들은……명궁정에보낼처녀를선발하는데관여하며국왕이직접심사장에모습을드러내길요구하기도했고,동불상이나부처의사리를걷어가기위해전국을헤집고다니기도하였다.심지어황엄은불상을가지고와서는국왕에게절하기를요구하여태종을진노하게하기도했다.더군다나이들은조선조정에대놓고뇌물을요구하기도하였다.……그것을쌓아둘창고를지어달라고청하기도했으며,그것을사적으로매매하여이문을남기려고도했다(113쪽).

황제가원민생에게말하였다.“……짐이늙어서입맛이없으니밴댕이젓이나곤쟁이젓,문어같은것을좀가지고와라.……”내관해수가황제곁에서있다가원민생에게말하였다.“처녀두명을바치라.”황제가기뻐하면서크게웃으며말하였다.“아울러스무살이상서른살이하로음식잘하고술잘빚는시비대여섯도뽑아서보내라.”(126쪽)

세종은“지금칙서의말이고아를놀리는것같다.언제황제가이렇게까지한적이있었는가!”라며분개하기도하고,이례적으로선덕제를가리켜‘멍청한임금[不明之君]’이라고욕하는가하면,당시명의정치상황을두고환관들이득세하고있다며비난하기도했다(138쪽).

선덕제가보낸칙서가운데에는국가적사안에관한내용도많이담겨있었다.말이나소를무역할것을제의한다든지,여진에잡혀갔다도망쳐온중국인들을돌려보내달라는등의내
용도담겨있었다.……조선과여진양쪽이모두명나라에호소하며자기편을들어달라고주장하는상황에서선덕제는양쪽모두에게화해할것을권유하는점잖은내용의문서를보내기도하였다(147쪽).

선덕제는거침이없었다.……뿐만아니라요리를잘하는여자를뽑아서보내달라고도했는데,심지어는그녀들에게두부만드는법을익히게하라는,아주자질구레한요청을담기도했다(148쪽).

선덕원년(1426,세종8)3월에서울에온사신윤봉은……칙서전달을마친직후새황제의첫번째성지를전하였다.“너는조선국에가서왕에게말해나이어린여자를뽑아다가내년봄에데리고오라고하라”,“밥을잘짓는여종을가려뽑아서진헌하라”는것이었다.……상복도벗기전에새황제가조선의공녀를탐하다니,명조정내에서비판의목소리가비등할법도했으나그럴걱정은없었다.황제의명령은밖으로새나갈일없는‘밀지密旨’였다(151쪽).

이때사신창성이제시한요구목록에는어린화자8명,가무를할줄아는여자아이5명,디저트를만들줄아는성인여자20명외에도소주,잣술[松子酒],석등잔,큰개50마리,각종매에다여러종류의해물과젓갈등이포함되어있었다(152쪽).

변계량이……내관들이구두로전한말에따라매와개,처녀등을바칠때에도문서상에는모두성지에따른것이라고적시한다면이러한요구를공공연하게하지는못할것이라고하였다(158쪽).

영락~선덕연간을종합하면중앙정부에서서울에파견된사신49회가운데46회,94퍼센트의사신단에환관이구성원으로참여하고있었다(187쪽).

세종은그해10월,당시서울에와있던사신윤봉에게……당시명조정에서한창추진중이던소무역을중단시켜달라는조선의청원을윤봉의입을빌려황제에게전하려고했던것이다.물론공짜는아니었다.세종이“무엇으로써그를달래야겠는가?”라고물은데대해황희가답한대로,윤봉에게은밀히마포70필을건넸다.윤봉은자신이돌아가서조선에소가나지않는다고힘주어말해보겠노라고큰소리를쳤다(190쪽).

정통제는즉위조서와함께내린칙서에서과거부황이사람과물건을요구했던것을일체중지한다고선언하였다.아울러그다음달에는과거조선에서보냈던여종9명,창가비唱歌婢7명,집찬비執饌婢37명등을모두돌려보냈다(2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