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이 함께 풀어야 할 역사, 관동대학살

한일이 함께 풀어야 할 역사, 관동대학살

$15.00
Description
차마 잊을 수 없고, 잊혀서도 안 되는
100년 전 그날, 은폐된 ‘사냥’의 기억
민족의 비극, 이대로 무심히 흘려 보내서야
올해는 관동대학살이 벌어진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한 대지진 후 2주 남짓한 동안에 애꿎은 조선인 6,000여 명이 ‘사냥’ 당해 목숨을 잃었다. 한데 뜻밖에도 조용히 지나갔다. 외교 ‘정상화’ 흐름에 힘입어서였는지 한일 양국 정부는 침묵했고, 관련 언론보도나 특별한 추모행사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관동대학살을 다룬 신간도 불과 3종만 선보였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일한국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여러 모로 각별하다. 신문ㆍ소설 등 일본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관동대학살의 실상과 역사적 배경, 심리적 상흔 등을 입체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시가전을 방불케 한 가해와 학살의 뿌리
조선인인 지진 후의 혼란을 틈타 살인과 방화, 강간을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묵인한 것은 일본 정부와 언론이며 이에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는 것이 관동대학살에 관한 정설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군대 역시 이에 가담했다. 9월 2일 출동한 한 기병연대는 이틀분 식량과 여분의 말발굽, 실탄 60발을 휴대한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으며 오후 2시경 가메이도에 도착해서는 즉시 “열차 검문”을 실시하고 조선인 한 사람을 끌어내려 총검으로 마구 찔러 죽였다(151쪽). 도쿄 오쿠라 다리 위에서는 조선인 5~6명이 몽둥이에 맞아 머리와 손발이 몽땅 으스러진 채 죽어갔다(47쪽).
지은이는 이런 참상을 전하면서 ‘주범’인 자경단의 뿌리가 3ㆍ1운동 당시 조선 각지에서 구성됐던 자경단과 재향군인회와 연결시킨다. 또 관동대지지 발생 당시 내무대신, 경시청 총감, 도쿄도 부지사가 조선총독부 출신으로 3ㆍ1운동으로 인한 심리적 외상이 작용했으리란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군ㆍ관ㆍ민 모두 헤어나지 못한 ‘불령선인’ 그림자
‘ 불령선인’은 “무법자이며 불순한 조선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당시 사법부 자료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시기에 조선인 범죄 용의자는 대략 140명으로 관동 지역 일대를 습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데다 그나마 대부분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인데도 “조선인임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30쪽). 그러면서 내무부 경보국장은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엄격한 단속”을 요청하는 전문을 각 부ㆍ현 지사 앞으로 보냈고, 신문은 “학살은 불령조선인의 폭동에 대한 자위적 행동이었다는 기사를 계속 내보냈다. 관민 모두 불령조선인이란 유령에 더욱이 일본 정부가 1923년 9월 11일 “정상 참작”할 점이 적지 않아, “소란에 가담한 전원을 검거하는 일 없이” 검거의 범위를 “현저한 것으로 한정”해 검거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해서(148쪽) 학살을 부추겼다. 민족적 차별과 멸시의 관념을 바탕으로 “조선인 한두 명은 죽여도 좋다”는 집단의식이 형성된 계기였다.

제대로 증언하지 못한 진재震災문학
근대국가 일본이 최초로 경험한 대지진은 ‘진재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양식을 만들었다. 대부분은 일기, 수기, 르포르타주(기록문학)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처절한 피해 체험을 기록하거나 참혹했던 재난의 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분투를 그렸다. 이를테면 100세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 노가미 야에코가 “조선인을 죽인 피로 오미쿠라 다리 밑의 물이 빨갛게 변해 발도 못 씻었다”고 적은 일기가 그렇다. 그러나 지진 재해 상황에서 벌어진 잔혹한 폭력 행위를 기록하고 고발하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더욱이 그러한 작품의 저자는 대부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수들이었기에 검열의 대상이 됐고, 작품들은 복자伏字투성이가 되거나 출판 자체가 엄격히 통제되던 상황이어서 그 파급력은 한계가 있었다. 당시 일본 문단의 저명한 작가들은 죄악에 눈을 감듯, 이 잔혹한 비극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려 하지 않기도 했다. 국가와 사회가 손잡고 학살의 기억을 봉인했던 것이다. 결국 진재문학은 2년 남짓 후 시들해졌다.

거짓 없는 진실을 마주 보아야 하는 이유
일본은 관동대학살을 두고 침묵하거나, 심하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조선인 사냥’을 정당방위라거나 열등 민족 혹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집단면책’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은폐된 기억은 새로운 유언비어를 낳고, 비극이 반복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은 지난해 일본 온라인 사이트에, 일본 네티즌을 대상으로 관동대학살을 다룬 글을 묶어내는 이유다. 지은이가 말미에 강조했듯이, 그 부정적인 기억을 다시 불러와 진실을 마주 보는 태도가 모두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저자

유영승

1963년생.나고야출신재일한국인.와세다대학을졸업한후잡지편집자를거쳐1995년부터후바이샤風媒社출판사편집장으로근무중이다.저서로《일본을망하게하는원전대재앙》,《책벌레2인초》등이있다.

목차

들어가며

1부관동대지진학살,그날그자리

1.되살아나는유언비어
도착하지않은‘추도사’|혐오발언‘불령조선인’의함정|작가에마슈의기억
2.‘관’에서‘민’으로하달된유언비어
현실이된‘새롭고무서운재앙’|대지진다음날|아직이루어진적없는실태조사|‘관’에서‘민’으로전달된유언비어|자경단대표의고백
3.“너조선인이지?”-작가쓰보이시게지의체험
유언비어는‘사기’,그럼에도불구하고|쓰보이시게지의《십오엔오십전》|도쿄를탈출하는사람들|“당신조선인이지?”
4.난바다이스케가본조선인노동자
조선인노동자와메이데이대탄압|시나노강조선인노동자학살사건|계엄령이가져온것|“폭도있음,방방곡곡에서방화와약탈을자행”
5.유언비어를확산한신문
붙잡힌조선인의운명|군에의한살육|지방으로확산된유언비어|“주고엔고주센”
6.조선인식별법“십오엔오십전”
조선인식별법|발음으로갈린삶과죽음|‘무단통치’에서‘문화통치’로|‘선도주의’의역수입|‘선도주의’의좌절
7.허위로부풀려진증오와공포
허위로과장된‘불령조선인’이미지|오해를산일본인|자경단이사용한식별법|3·1운동의심리적외상
8.학살을담당한자경단의원류
3·1운동과자경단|‘제국재향군인회’의발족|주객이전도된유언비어|가해자의피해자행세
9.일본문단의작가들이본조선인학살
진재문학|다야마가타이의무용담|시마자키도손의애매한대답|아쿠타가와류노스케등작가의한계
10.소설가나카니시이노스케의도발
환영으로서의‘불령선인’|나카니시이노스케의소설〈불령선인〉|모두일본이짊어져야할죄

2부관동대학살의상흔

11.‘불령선인’은어떻게만들어졌나-저항운동과간도파병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사건|‘불령선인’의탄생|“불령선인은테러리스트”|간도파병에의한‘학살’|학살은테러리즘과의전쟁
12.박해를두려워한재일조선인들의귀환
문학에서지워진조선인학살|식민지의동요|피해자의‘정신적살해’
13.학살소식에동요한재조선일본인과총독부
조선에퍼진유언비어|도쿄로간조선의현지조사단|조선의통곡을그린나카지마아쓰시의〈순경이있는풍경〉|나카지마아쓰시의‘조선’체험
14.사라지지않는트라우마,반복되는학살의악몽
일본을떠나도|공습과원폭투하때에도|“기뻐하는얼굴을해서는안된다”
15.도쿄대공습때반복된유언비어와폭력
반복되는폭력…‘오모토사건’과가해자의외상|도쿄대공습과유언비어|패전쇼크
16.패전쇼크로재현된유언과잔혹행위
패전의충격|‘요리이寄居사건’-전후에재현된잔혹행위|“조선인한둘은죽여도돼”
17.재일동포의번민을그린작가,이양지
대지진이일어나면조선인은또학살될까|이양지의〈제적등본〉|5년마다전쟁을치른‘제국’일본
18.학살은왜일어났는가1-“가해자의죄책감”결여
‘전쟁신경증’과PTSD|“가해에따른죄책감”결여|‘탈감작脫感作’과‘집단면책’|‘열등한인종’을응징하다
19.학살은왜일어났는가2-정상참작된자경단의잔혹행위
잔혹행위의‘합리화와수용’과정|하늘아래떳떳한살인|“학살”이란말은금기어
20.학살은왜일어났는가3-가해자의증언,지금도유포되는유언비어
학살작전가담군인의증언|‘불령일본인’탓이라고간파한사령관|심판받지않는살인|유언비어를퍼트리는이들은지금도끊이지않는다|거짓없이진실을마주보는태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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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시가전을방불케한가해와학살의뿌리
조선인인지진후의혼란을틈타살인과방화,강간을저지르고있다는유언비어를퍼뜨리고묵인한것은일본정부와언론이며이에자경단이조선인들을마구잡이로살해했다는것이관동대학살에관한정설이다.그러나지은이에따르면군대역시이에가담했다.9월2일출동한한기병연대는이틀분식량과여분의말발굽,실탄60발을휴대한“마치전쟁을방불케하는”상황이었으며오후2시경가메이도에도착해서는즉시“열차검문”을실시하고조선인한사람을끌어내려총검으로마구찔러죽였다(151쪽).도쿄오쿠라다리위에서는조선인5~6명이몽둥이에맞아머리와손발이몽땅으스러진채죽어갔다(47쪽).
지은이는이런참상을전하면서‘주범’인자경단의뿌리가31운동당시조선각지에서구성됐던자경단과재향군인회와연결시킨다.또관동대지지발생당시내무대신,경시청총감,도쿄도부지사가조선총독부출신으로31운동으로인한심리적외상이작용했으리란의견을제시하기도한다.

군관민모두헤어나지못한‘불령선인’그림자
‘불령선인’은“무법자이며불순한조선인”을가리킨다.하지만당시사법부자료에따르면관동대지진시기에조선인범죄용의자는대략140명으로관동지역일대를습격하기에는터무니없이부족한데다그나마대부분어디에사는누구인지도알수없는상태인데도“조선인임이틀림없다”고단정했다(30쪽).그러면서내무부경보국장은“조선인의행동에대해엄격한단속”을요청하는전문을각부현지사앞으로보냈고,신문은“학살은불령조선인의폭동에대한자위적행동이었다는기사를계속내보냈다.관민모두불령조선인이란유령에더욱이일본정부가1923년9월11일“정상참작”할점이적지않아,“소란에가담한전원을검거하는일없이”검거의범위를“현저한것으로한정”해검거하겠다는방침을발표해서(148쪽)학살을부추겼다.민족적차별과멸시의관념을바탕으로“조선인한두명은죽여도좋다”는집단의식이형성된계기였다.

제대로증언하지못한진재震災문학
근대국가일본이최초로경험한대지진은‘진재문학’이라는새로운문학양식을만들었다.대부분은일기,수기,르포르타주(기록문학)형식을취하고있는데,처절한피해체험을기록하거나참혹했던재난의현장에서다시일어서는사람들의분투를그렸다.이를테면100세까지왕성한창작활동을한노가미야에코가“조선인을죽인피로오미쿠라다리밑의물이빨갛게변해발도못씻었다”고적은일기가그렇다.그러나지진재해상황에서벌어진잔혹한폭력행위를기록하고고발하는작품은손에꼽을정도이다.더욱이그러한작품의저자는대부분프롤레타리아문학의기수들이었기에검열의대상이됐고,작품들은복자伏字투성이가되거나출판자체가엄격히통제되던상황이어서그파급력은한계가있었다.당시일본문단의저명한작가들은죄악에눈을감듯,이잔혹한비극을작품의주제로삼으려하지않기도했다.국가와사회가손잡고학살의기억을봉인했던것이다.결국진재문학은2년남짓후시들해졌다.

거짓없는진실을마주보아야하는이유
일본은관동대학살을두고침묵하거나,심하면가해자가아닌피해자코스프레를한다.‘조선인사냥’을정당방위라거나열등민족혹은‘명령’을따랐다는이유로‘집단면책’을만들어냈다.그렇게은폐된기억은새로운유언비어를낳고,비극이반복될가능성을배제할수없다.이책은지난해일본온라인사이트에,일본네티즌을대상으로관동대학살을다룬글을묶어내는이유다.지은이가말미에강조했듯이,그부정적인기억을다시불러와진실을마주보는태도가모두에게필요하기때문에더욱놓치기아까운책이다.

책속한줄

“불령不逞(불량)”은“규칙을지키지않고제멋대로행동한다”는뜻으로“불령조선인”은“무법자이며불순한조선인”을가리킨다.……이‘불령(조)선인’이라는말이야말로,혼란한사회틈새에서거대한살의가되어조선인을덮친것이었다(19쪽).

내무성경보국장은각부현지사앞으로“도쿄부근에서대지진재해를빌미로조선인들이각처에서방화하고불온한목적을수행”하고있으며“실제로도쿄시내에서폭탄을소지하고석유를뿌려방화하는사람들”이있으므로“조선인의행동에대해엄격한단속”을요청하는전문을보냈다(42쪽).

요츠키다리아래스미다구쪽강변에서조선인을10명씩묶어줄세우고군대가기관총으로쏴서죽였어요.아직죽지않은사람을수레선로위에눕힌다음석유를뿌려서태웠어요(49쪽).

나고야의지역신문인《신아이치新愛知》에는“우물과농업용수로에독약을타고군중에게폭탄을던지며각처에서방화를저지르는불령조선인과중국인이맹렬히날뛴다”,“불령조선인1,000명과요코하마에서전투개시,보병일개소대의전멸인가”,“발전소를습격하는조선인”,“지붕에서지붕으로조선인들이방화하며다닌다”등의기사가실렸다(50쪽).

조선인인지아닌지를확인하기위해반드시탁음이있는단어를말하도록했다고한다.예를들어‘자부톤(방석)’을‘사후톤’으로발음해그자리에서살해된조선인도있었다.내가기차안에서목격한사건.만약‘주고엔고주센’처럼탁음많은단어를제대로발음하지못했다면아마그노동자도나쁜일을당했을것이다(55쪽).

재조선일본인자경단은이무장집단인재향군인회와소방대를중심으로지역의민간인이참여해조직되어독립운동을무력으로진압할때활용되었다.이는관동대지진당시‘지진자경단’의원형이라할수있다.유사시무력을사용하여진압하도록만든폭력장치의일환으로조직된재향군인회가지진재해의혼란속에서소방대빛민중과연계하여자위자경이라는틀을넘어발동한것이다(69쪽).

보도규제가해제된후에내무성이“유언비어는사실이아니다”라고인정했음에도일반국민에게는널리알리려하지않았다.신문은‘학살은불령조선인의폭동’에대한자위적행동이었다는취지의기사를계속내보냈다.도쿄에계엄령이내려진상황에공개적으로당국을비난하거나저항적태도를드러내는문단작가는존재하지않았다(81쪽).

일본에서는가해와학살을피해고국으로돌아가려는조선인들이관부연락선을타기위해시모노세키로몰려들었다.그들을통해학살사건이조선에알려지는것을우려한총독부는부산에‘구호사무소’라는이름으로수용소를설치했다.그리고귀환한조선인들을그곳에밀어넣었다.수용소내에서는학살사건에대한입막음을엄격히시행했다(101쪽).

총독부경무과장이었던마루야마쓰루키치의회고록에따르면,“조선인들이수돗물에독약을뿌렸다든지,무장봉기를몰래계획하고있다든지하는유언비어가돌기시작했고……부산에서조차일본도를들고수원지를경호하는사람이나타났다.”(104쪽)

대지진직후인9월2일《동아일보》이상협편집국장이재일거류민의가족400명으로부터안부를확인해줄것을의뢰받아일본으로향했다.……이상협은지진으로‘압사’혹은화재로사망한사람이있긴하지만조선인“대다수는살해당했다”고결론을내린다.그리고일본정부는“진심으로사죄해야한다”며“사태의진상을진실하게공표하고”아울러“폭력행위에가담한자를적절히처벌할것”을요구했다(108쪽).

관동대지진때조선인이불을질렀다는유언비어가퍼진것처럼,원폭이투하된혼란한상황에서도조선인이폭동을일으킨다는의심을샀다.“개에게줄약은있어도너희조선인들에게줄약은없다”며치료를거부당하는일들이많았다고부연설명했다(115쪽).

제대군인이대거포진된상인집단‘마스야일가’가김창근,김성태조선인두사람을참수하고또한사람을상해한“요리이사건”의내용은처참하다.이사건은1947년7월,사이타마현요리이경찰서의관내하나조노무라에서일어났다(128쪽).

대지진발생4일후,피해가두려워경찰서에서보호받고있던28세조선인엿장수구학영을,인근마을인요도무라에서몰려든군중들이유치장을습격해그를마구난도질해,경찰서현관으로끌고나가숨통을끊어버렸다.후세다쓰지는요리이사건변론문에서이두사건의공통점으로“조선인한두명은죽여도좋다”는,관동대지진학살사건이후의“민족적차별과멸시의관념”이깔려있다고보았다(129쪽).

관동대지진은전쟁이아니었다.그러나‘불령선인의습격’이라는소문은시가지의야전과유사한상황을만들어냈다.자경단의지휘를맡은재향군인회소속회원은앞서군대생활을통해‘탈감작’상태였고그아래지시를따른이들은‘명령’에따라살해를감행하기도했을것이다.거기에는‘집단면책’또한작용했다(142쪽).

“선생님,조선인은어떤가요?전오늘까지여섯명을죽였는데요.”“저녀석,굉장한데.”“아무래도자기몸을지키려면그래야죠,하늘아래떳떳한살인이다보니호쾌하게잘도하네.”
마을이라는작은공동체에서결성된자경단의팀워크에의한행동은,개별구성원의‘살인에대한불안’을경감해,‘살해’에대해“떳떳한살인”이라고할정도의‘고양감’을선사했다(147쪽).

지진재해1년후인1924년9월13일,조선인동포의넋을기리기위한‘추모식’이도쿄도즈카에서열렸다.추모식에는300명이넘는도쿄거주조선인들이모였고연단옆에는시커멓게그을린죽창과‘피학살동포추모식’이라적힌흰색천이걸려있었다.회장에는도즈카분서에서파견한경찰약60명이삼엄한경계를펼쳤다(149쪽).

조선인자신이동포의죽음을추모하는모임이었다해도학살의진실을말하는것은금지되었고,비판조차허용되지않았다.사실이《아사히신문》기사는검열로인해“피동포추모식”과“학살”이라는두글자가복자伏字처리되었다.조선인학살은공개적으로말할수없는금기어였다(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