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와선비정신을넘어서
한국사를읽는또다른틀,‘중화’
지금,왜‘중화’를이야기하는가
우리가역사를읽는것은과거의경험을반추하면서지금우리의삶에도움이되는무언가를얻을수있으리라기대하기때문일것이다.그에따라역사학은과거의경험을지금여기로어떻게소환할것인가에관심이많다.그때문일까.선비정신을오늘에되살려개인주의와물질만능주의를극복해야한다거나,망국적사대주의의잔재를청산하여더주체적인미래를설계해야한다는주장이그리낯설게느껴지지는않는다.
선비정신과사대주의라는두단어가썩어울린다고할수는없다.우리는그중하나를되살리고다른하나를버려야할것으로여기기때문이다.그러나역사의눈으로보면사대를말한것은바로선비였다.선비와사대두단어아래를관통하는공통의심연이있지않고서는불가능한일이다.지은이가지금여기에서중화를다시읽는이유가거기에있다.지은이는중화를매개항으로하여그심연의역사를치밀하게독해하고,선비정신이나사대주의와는다른방식으로역사의현재적의의를밝혀보려한다.
중심과주변의의제로중화를읽어내다
고대이래로중국인들은중화와이적을이항대립의양편에두었다.중화는근대중국에서새롭게정의되었고또신조어와결합함으로써새생명을얻었다.그러나지은이가탐색하려한것은중국인들이중화를어떻게정의했는지가아니다.중화와다른단어들이교직하여구성한의미장이며,그것들이다른시기다른사회집단에의해해체되어가는양상을살폈다.
한국사에서중화가언제나이적의반어의였던것은아니다.더많은경우중화는중심과주변에관한의제로여겨졌다.최치원은신라인의정체성을이夷에서발견하고불교를끌어와신라문화를정당화했다.몽골복속기의이색은중화를다만변원邊遠의반의어로여겼을뿐이다.그러나고려가명나라에사대하면서상황은복잡해졌다.정도전과그의추종자들은중화를명나라?정학?유교?도통?정통?천리와,이적을이단?사설?불교와같이사용했다.중화를문명의기준으로여기게되었던것이다.이제중화는조선이사대해야할대상이자,조선이동국이되는이유이며,또조선이채워나가야할배움의내용이되었다.
《맹자》에등장하는외천사대畏天事大라는말은소국이대국에사대하는것을합리화하려는이들에의해일찍부터활용되었지만,조선은이제그대국이한족왕조인지아닌지따져묻기시작했다.병자호란을전후하여최명길과그비판자들이주고받은논쟁은문제의소재를잘보여준다.송시열과그의학문적후예들은의리를천리와인륜을따르는것이자,도학을지키고이단을배척하는의제로여겼다.이익과안정복등남인은고려가몽골에대해가진군신의분의分義를인정했지만,그런그들역시그의리를중요하게여겼다는점에서는다를바없었다.그의리의기저에중화가있었다.
사대와분의를둘러싼논쟁은조선에서화華에비춘동東의자리에대한고민을심화시켰다.조선을대중화로상상하거나,조선이천자의의례를시행할수있다고주장이돌출하기도했다.그러나조선의발화자들에게조선은중국을중국이게하는이유를가진나라이며,중국으로대우받을수있는문물을유일하게보존하고있는나라이지만,결코중국은아니었다.그들은정통正統의기준을동東에적용하여화華의기준에서동東을합리화하거나,화華와동東이함께구성하는역사를보여주려했다.
문명의기준을충족시키려했던조선의발화자들에게안정기에접어든청나라는더는외면하기어려운고민거리였다.김창협,성대중,이덕무,홍양호등은모두황명사대부들의후예에관심을가진존명의리의신봉자였다.홍대용,박제가,박지원등은청나라로부터배우려했다.물론그들은중화와존주를포기한적이없었다.그들이추구한것은중화의유일한계승자라는자부심에기대는존주가아니라,조선의낙후함을인정하고중국을내면화하는존주였다.북학파박지원에게중화는명나라이자중국이며,깨진기왓장으로상징되는문명이었다.청나라의오랑캐다움을전면적으로긍정했다는점에서홍희준은특별했다.그러나그런그가중화를문명의기준으로여기지않았다는증거는없다.
전근대와근대를넘나들다
화華가이夷와짝하는단어가된이후사대,동국,북학을둘러싸고적지않은논쟁이있었다.참여자들은치열하게경쟁했지만,그들중누구도중화의의미장을벗어나지는않았다.그러나변경의발화자들은조선유교문화의중앙에있었던그들과는결이달랐다.평안도태천출신의박문일도,정주출신의백경해도기자와소중화를말했지만,그들은그단어들로평안도의문화적정체성을옹호하려했다.홍경래난에서격문을작성했던김창시도중앙의발화자들이중화의의미장안에서사용했던단어들을구사했지만,그가그단어들로정당화한것은중화가아니라진인眞人이이끄는봉기의정당성이었다.
개항이후자본주의세계질서에편입된시대를살아가야했던이들도중화의의미장에균열을내는데동참했다.김윤식은북학이라는단어를구사하고또사대를말했지만,그의미는이미달라져있었다.그에게청나라는배움의대상그자체였으며,사대를말하는그의문제의식안에외천사대에관한발상은없었다.어느새조선은중국이라는단어에서문명적의의를떠올리지도않게되었다.중국은마침내조약체제하의대청국을의미하는단어가되어갔다.그즈음중화의의미장에도균열이선명해졌다.최익현은조선이‘황통’을계승할수도있다고주장했으며,이수병은“제통을이어천자국이된제후국”을상상했다.마침내‘중화’를폐기하고그의미장에서쓰이던단어들로새롭게발견한대체재를합리화하려는시도가생겨났다.그렇게중화는근대한국의담론지형에서소멸했다.
계몽의욕망을넘어역사의복잡성과중층성을드러내다
역사와현실에대한지은이의문제의식도눈여겨볼만한대목이다.지은이는책머리에서근.현대를포함한모든후행시기를특권화하지않을것이라고전제했다.또과거를수단시하거나과거로현재나미래를정당화하지않겠다고말했다.그것은결코역사와현재의관계를단절적으로보겠다는선언이아니다.시대착오.목적론.이분법을넘어서겠다는말이며,계몽의욕망으로부터자유로워지겠다는뜻이다.
지은이가주목한것은그시대의문법,그문법을구성하는변수들,그리고그시대사람들이가지고있던절실함과심성이다.현재는미래의과거이지만,그결과를예단할수없다.반면역사는다시는반복되지않을지나간현실이지만,우리가그결과를알고있으니복기해볼수있다.그렇게우리가지나간현실을되짚어보는과정에서무엇인가얻을수있다면,그것은미래의과거가될지금여기,그리고우리자신을더잘알아갈수있는동력이된다.그것이행간에서유추해볼수있는지은이의생각이다.
지은이가이론과방법론을제한적으로만활용하려하는장면도눈에띈다.지은이는이책이독일의개념사,영미권의지성사를참조하고있다고밝혔다.그러나지은이에게이론이나방법론이란역사적현실을드러내는데도움이되는선에서만의의를지닌다.지은이가가장중요하게보는것은인간의삶과그시대가낳은복잡성과중층성을온전히그려내는일이다.이책곳곳에서묘사라는단어가여러차례등장하는것도그런이유때문일것이다.
맥락과질문을중요하게여기는역사글쓰기와만나다
지은이는중화로사대주의나선비정신을분석하려하지는않는다.중화를내면화했거나중화의의미장에생채기를냈던역사상의발화자들에게말할수있게할뿐이다.지은이가텍스트를대하는태도에서도그런면모가확인된다.지은이는600쪽이넘는이책의본문에서시종일관개입을최소화하면서다만발화자에게말을건다.그리고발화자의말이모두끝난뒤그의의도를설명하고맥락을해설할뿐이다.그것이야말로“텍스트에기대되텍스트를억압하지않는”지은이의방식이다.이책어디에서나볼수있는따옴표는사료의언어를자신의언어와구별해내려는지은이의의도를잘보여준다.
일반적인역사서와는달리,지은이는확신에찬결론을선호하지는않는다.자신이찾은답을유일한정답이라주장하지도않지만,정답으로여겨질만한것을애써강조하지도않는다.심지어가설을세우거나그가설의타당성을논증하는데도큰관심은없다.맥락을존중하고다르게질문하기.그것이야말로정작지은이가전하고싶어하는메시지다.결론이중요하지않은것은아니지만무엇을질문하고어떻게독해해서도달한결론인지성찰하는일이그만큼혹은그이상으로중요하다고보기때문이다.거기에사대주의와선비정신을넘어역사학적통찰력으로이르는길이있다고믿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