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왕십리

가도 가도 왕십리

$22.00
Description
‘가장 천한 장소’에서 ‘새 세상이 열리는 곳’으로
22인의 삶과 죽음으로 그려낸 왕십리의 맨얼굴
왕십리는 살아있다!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곳이 왕십리다. 예전엔 그런 줄 미처 몰랐다. 내세울 만한 변변한 역사와 인물이 없는, 그저 그런 변두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갈래를 특정하기 힘든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그들이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도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한 발짝 더 멀리 뛰어 달아나며 그 너른 폭과 깊이를 보여 주는 곳이 바로 왕십리였다.
그럼에도 조금 일반화해 본다면, 우리가 저잣거리에서 흔히 마주치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경우에 따라선 당대의 천덕꾸러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주로 이곳 왕십리에 살거나 흔적을 남겼다. 우리가 ‘민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런 민중의 이야기다. 그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것저것 가릴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생긴 대로 살고,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고민하고 행동했으며, 마침내 죽어서는 그 자리 왕십리의 어느 구석에 조용히 자기 자리를 잡은 이들이었다. 그렇게 나와 전혀 다를 것 없는‘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시간은 한껏 즐겁고 고마웠다. 독자들도 이 책에서‘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견해 준다면 글쓴이로서는 큰 기쁨이겠다. -〈책머리〉에서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울 리 없었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은 아픈 사연들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 묻힌 가톨릭 순교자들이 그랬고, 갑신정변의 고대수가 그랬으며, 임오군란의 김장손이 그랬다. 이들은 출구를 찾기 힘든 삶의 미로 속에서 안간힘을 쓰다 안타깝게 스러져갔다. 그리고 대부분 죽은 뒤 또는 삶의 마지막 국면에 왕십리와 인연을맺었다. 왕십리가 그들의 피울음을 듣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안식처를 제공해 준 댓가로 이제 왕십리는‘ 주검의 장소’에서‘ 새 세상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스스로 낮아져 민중의 삶 속에 스며들었다가 160여 년 만에 왕십리에서 불쑥 재발굴된 이성문 가계의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 최초의 가톨릭 세례자 이승훈의 방손傍孫에 해당하는 이들의 삶은 기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민중의 역동성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삶의 의지’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 가계의 이야기는 옛 사대부 가문의 족보를 회복했다는 해피 엔딩 스토리라기보다는 스스로 민중이 되어 오늘까지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 나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분투기로 읽는 것이 온당하다는 생각이다.
사실 왕십리는 이런 이야기의 보고다. 신한승이나 장소팔과 같이 두드러진 인물은 사실 예외적인 경우다. 그보다는 이성문 가계와 같이 그 존재와 생존 방식 자체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경우는 아직도 무수하게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게 과거의 사람과 장소를 오늘의 우리가 안아서 내일로 넘겨 줄 수 있다면 누가 왕십리가 죽었다 말할 수 있겠는가? 엄연히 살아 있는 왕십리의 발견, 그것이 오늘 우리의 자존심이자 내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다. -〈나가는 말〉에서
저자

김창희

경상남도통영에서태어나아주어려서상경한뒤줄곧서울또는수도권에서살고있다.서울대학교철학과에서공부했다.그뒤《동아일보》기자시절에익힌르포르타주방식이모든글쓰기의토대라는판단을갖게됐다.즉,듣고,보고,말하고,생각하는것을최대한날것그대로글로옮기는작업이,비록영원히완성할수없는작업일지라도포기할수없는과제라는생각이다.이번책《가도가도왕십리》의취재·집필·편집과정을거치면서는장소성에대한감각을조금더심화할수있었다.그동안저서《아버지를찾아서》(2016),《오래된서울》(공저ㆍ2013),《우리손으로만든머내여지도》(공저ㆍ2022)와편저《민청학련50주년에다시듣
는세상을바꾼목소리들》(2024),번역서《지식인들의망명》(2007)등을펴냈다.

목차

책을내며-작은사람들의분투기를찾아서
⚫들어가는말-광희문을나서서왕십리에들어서니

01현대택견의개척자신한승,‘민중의몸짓’을되살려내다
택견이사라진뒤택견과만나다/무인→도인→명인의길로가다/
송덕기·이경천·김홍식과아슬아슬하게만나다/무형문화재지정소식에펑펑울다/
‘택견의현장’은‘축제의장소’/〈대쾌도〉의장소를찾아라/
외국인들이살펴본〈대쾌도〉의현장/계속탈바꿈하는장소의성격/
그곳에선아직도“이크”,“에크”소리가들려올까

02만담가장소팔,국민의웃음보따리를책임지다
‘왕십리사람’장소팔/서울사람들의애환과말투를담아내다/
‘서울지역예인들의메카’왕십리/소리꾼들의연습장‘움집’

03소설가김동인,다시살다
아무도범접하지못한‘문학의신’/김동인에게드리워진그림자/
“아아나는소설가로다”/왕십리에서맞은최후/결코죽지않은김동인

04독립운동가지청천과김붕준,‘새로운고향’에서맞대결
기호파와서북파,다르지만함께가는길/칼과펜,함께가다보면결국만나는길/
민족통일전선,당연하지만어려운길/광복,각자가는길/
맞대결,누구에게도만족스럽지못한결과

051920년대막노동자진서방,“서울이도깨비굴이었던가?”
한반도에닥친두가지모순이충돌하는현장/
예나지금이나술한잔마셔야잘수있는세상/장소의유전/유령의장소/
가산假山또는택견놀이의현장/큰길,당국의권위가미치는곳/
‘도처개유귀신到處皆有鬼神’/늘그렇듯결국원점으로

06영국화가엘리자베스키스,‘코리아’를사랑한푸른눈의여인
20세기초동대문안쪽의새로운풍경/한국에매료된키스자매/
키스자매가동대문주변에서본것/이방인의눈으로지켜본3·1운동/
그림으로표현한‘한국사랑’/사후에도전해진‘한국사랑’

07‘농부’이성문,‘스스로낮아진사람’의후손이되어
‘왕십리입향조’가‘경성이씨’된사연/재판을통해굴러들어온선물/
이승훈,그의죽음은‘순교’인가아닌가/동생이치훈의생존전략/
‘이치훈자진몰락’의진실

08창덕궁무수리고대수,청무밭에서스러진혁명가
‘바지랑대에옷입혀놓은것같던’무수리/갑신정변에결정적역할을하다/
의문의인물‘이우석’/왕십리청무밭에서맞은최후/
‘일생에단한번하늘을날아봤던그기억’

09‘선달’김장손,임오군란의불을당기다
그들은왜그날집으로돌아오지못했을까/‘선혜청도봉소사건’으로투옥된4명/
아들구명을위해‘장두狀頭’가되다/나는듯이동교와서교로통문이돌다/
김장손은어디에있었을까/상황이만들어낸‘반역우두머리’/
형장의이슬로사라진김장손의아들

10염동이와채생,청계천에서도깨비를만나다
도깨비덕에치부한천민/귀신과의황홀한하룻밤/청계천은도깨비루트?

11가톨릭순교자들은거기서안식을얻었을까?
주검도숨죽여나가던문/가장억울한죽음‘옥사獄死’/
네여성의모진생애와안타까운죽음/죽어서땅에묻히지조차못한사람들/
새로운세상을향한꿈

12똥장수예덕선생,똥으로세상을바꾸다
똥장수를찾아서/더러움속에서덕을찾는사람/가장천한일을하며새시대를개척하다/서울주변에서서울사람들을먹여살리던곳/예덕선생‘똥의루트’와그목적지는/
다시는‘똥파리’라고부르지않으리

13난세의공신이경직,충직함의본을보이다
호탕하며허심탄회한인물/강개하여기절이있는사나이/견딜수없는일을견디다/
찢어지는가슴을안고

⚫나가는말-왕십리는살아있다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열전列傳이되지역사ㆍ지리지地理志를겸한
왕십리와인연이있는22인의삶을다뤘으니,책은기본적으로열전列傳이다(글은13편이지만등장인물이복수인글이있다).한데열전이상이다.기왕에《오래된서울》,《우리손으로만든머내여지도》등우리시대의탁월한인문지리지또는지역사저작에참여했던지은이가사료,문학작품,옛지도등갖가지자료를뒤져‘왕십리’의장소성을중심으로휴먼스토리를엮은덕분이다.그렇기에이책은왕십리란지역의역사로읽어도좋고,택견판이나움집등이제는사라진곳들의흔적을되짚으며왕십리의‘어제’를돌아보는지리지구실에도모자람이없다.다뤄진시기가17세기또는14세기까지거슬러올라가니22인으로지난수백년을구성하기엔성글다고볼수도있다.하지만신나고(현대택견개척자신한승),기막히고(홀로숨져간김동인),안타깝고(혁명가고대수),신기한(도깨비덕을본염동이)이야기들을읽다보면왕십리의‘오늘’이한층가까이느껴질것이다.

민초의애환이서린곳,왕십리를살다
주요등장인물은당연히왕십리에삶의터전을두었던이들이다.‘민중의몸짓’을되살려낸‘택견명인’신한승,서민들의애환을웃음으로승화한만담가장소팔,아들구명을위해‘반역우두머리’가된선달김장손,생존을위해스스로낮아진사람의후손이성문,독립운동동지였으나해방후선거맞수로만난지청천과김붕준이그들이다.지은이는이들의삶을되살리기위해《포도청등록》등수사ㆍ재판기록을번역해임오군란당시왕십리사람들의행적을드라마틱하게재연하는가하면,《조선왕조실록》을통해‘자진몰락’한한집안의구전口傳과족보기록을바로잡기도한다.이에그치지않고,3ㆍ1운동루렵동대문인근에머물며광희문밖으로나섰던영국화가엘리자베스키스의이야기를읽다보면장소성과그에얽힌사람의이야기를찾고구성하는저자의내공에감탄하게된다.그녀의한국체류당시작품은물론1958년한국아동들과영국유학생들을위해베푼‘선의’까지촘촘히소개하니말이다.

마지막쉴곳,왕십리에지다
왕십리로이어지는광희문은시체가나가는문이란뜻의‘시구문’으로도불렸다.도성안에는묘지를쓸수없었기에왕십리일대는온통묘지였다.당연히자의든타의든왕십리에서세상을뜨거나최후의안식처를찾은인물들의이야기가빠질수없다.지은이는‘문학의신’으로불리지만아무도지켜보지않은가운데이승을떠난소설가김동인,갑신정변에서결정적역할을했다붙잡혀형장으로끌려가던중군중의돌팔매에맞아왕십리청무밭에서숨진무수리고대수,가톨릭을통해새세상을꿈꾼과부ㆍ하녀등여성순교자4인의최후를복원해냈다.이들이어디서어떻게숨졌는지손에잡힐듯그리면서이들의마지막쉴곳이어디였는지당대의기록과증언을통해설득력있게추정한다.읽다보면“모든것이‘종말처리’되는곳!그런곳이새로운세상을꿈꾸는사람들이묻히고썩어그꿈의싹을틔우는못자리가되는것도아주자연스러운일이었다”는지은이의지적이새삼스레다가온다.

이야기로남은곳,왕십리를누비다
광희문과광희문밖,즉왕십리일대는조선시대시가에는등장하지않는다.양반네들의문학에서는다뤄질만하지않은지역이었다는뜻이다.하지만서민들의이야기에는,그리고근대이후문학에서는왕십리를배경으로한작품들이없지않다.도시빈민층의이야기를다룬이효석의단편소설〈도시와유령〉에서막노동을하던‘진서방’이일과후술한잔걸치고고단한몸을뉘려동대문일대를헤매다걸인가족을‘유령’으로오인해혼비백산한곳이‘동묘’의사당이었다.19세기중반야담집에실린염동이이야기도오간수문밖영도교가무대다.여기에연암박지원의〈예덕선생전〉에이르면왕십리는자못의미심장한지역으로떠오른다.똥을가장많이배출해내는서울도심지와그똥을가장많이필요로하는왕십리등지의채소재배농가를연결해주던‘똥장수’예덕선생-더러움속에서덕을찾는사람-의행로를좇아가며서울사람들을먹여살리던왕십리의의미를되새긴다.
책은병자호란때인조의측근으로송파나루에서치욕의현장을지켜보고,왕십리를지났던충직한신하이경직의이야기로끝난다.지은이는풍성한이야기와다양한정보를담은책을“왕십리는살아있다”는말로마무리한다.“자기삶을적극적으로개척해간예덕선생의의지와쓰라린가슴을부여안고자기몫의시대적짐을기꺼이수행해낸이경직의분투같은것들이조금이나마우리의삶과맞닿아있다면”이란단서를달아서다.단순한읽을거리를넘어긴여운이남는책인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