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 근대 한국의 서화계와 붓글시 이야기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 근대 한국의 서화계와 붓글시 이야기

$22.00
Description
‘죽일 놈’ 딱지를 떼고 ‘명필’ 신화를 넘어
이완용과 함께 근대 서화계를 거닐다
왜, 지금 이완용의 붓글씨인가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데 토를 달 이는 없다. 그러니 그의 붓글씨를 두고 책 한 권을 저술한 것이 새삼스러울 수는 있겠다. 지은이 주변에서 “잘못하면 다쳐”라는 만류까지 나왔다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채봉채비采葑采菲 무이하체無以下體”라는 《시경》의 한 구절로 답한다. ‘무를 캐는 이유는 뿌리에만 있지 않다’는 뜻으로, 설사 땅속의 뿌리는 썩었을지라도 무청을 잘라 시래기를 만들면 훌륭한 찬거리가 되듯 뭐든 활용하기 나름이란 의미다. 당대 한국의 예술계의 흐름을 짚어보고, 서예가 어떤 문화적 의미를 띠었는지 살피는 데는 이완용이란 확대경이 나름 쓸모 있으리라는 것이 이 책의 집필 의도이다.

‘명필 신화’의 허실을 규명하다
일당 이완용은 당대에 명필로 소문났다. 글씨를 받기 위해 사방에서 보낸 비단과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어떤 일본인은 이완용의 작품 뒷면에 ‘토산土産(みやげ)’이라 적어 놓을 만큼 조선을 방문한 기념 선물로 여겨졌단다. 심지어 일본 다이쇼 천황이 그의 붓글씨를 보고 싶어 조선총독을 통해 이완용에게 글씨를 보내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은이는 그런 평가에 회의적이다. “좀 썼다”에 그친 오세창의 평을 들면서 이완용이 즐겨 썼다는 〈평상심시도〉를 꼼꼼히 분석해 예쁘게 썼을지는 몰라도 절박함이나 독창성이 없다고 평한다. 대신 이완용의 위세에 비춰 그의 글씨를 갖거나 그의 글씨로 된 현판을 걸 수 있다는 건 당시 상당한 위세를 보증하는 징표이기도 했기에 자연스레 이완용 글씨가 좋더라는 평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독립문’ 편액 작성설을 파고 들다
역사 연구자로서 지은이의 진면목은 이완용이 ‘독립문’의 편액 獨立門을 썼다는 설을 파고드는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 이야기가 1924년 《동아일보》에 처음 실렸다고 전제하고 이완용이 독립협회 창립 발기인이자 위원장이었다는 점에서 나름 근거가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처조카가 쓴 전기 《일당기사》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 독립운동가 김가진이 독립문 편액을 썼다는 이설異說에 대해서는 그의 며느리의 증언 등 정황 증거 외에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는 엄정한 자세를 취한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완용과 김가진이 각각 쓴 《천자문》에서 獨立門을 집자(集字)해 그 필획을 꼼꼼히 비교 분석한다. 그런 후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으면서 ‘그래픽체 설’이란 제3의 가능성까지 소개한다.

서화계에 드리운 ‘그늘’을 아울러 살피다
책은 이완용의 붓글씨를 살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인 단체라고 할 수 있는 경성서화미술원,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의 창설에 깊이 간여했고, 회장과 고문을 맡는 등 근대 서화계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했음도 상세히 서술한다. 그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2년 처음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의 서부書部 심사에 무려 4회나 참여했다든가 이당 김은호, 이병도 박사의 형 이병희 등이 이완용에게 글씨를 배웠다는 사실이 그런 예이다. 뿐만 아니다. 그의 제안으로 1909년 창경궁에 제실박물관이 설립되었고, 삼팔경매소란 곳에서 1906년부터 고려청자 위주로 경매가 열렸다든가 갤러리의 원형이라 할 김규진의 ‘고금서화관’이 1913년 문을 연 사실 등 당대 문화계의 흐름이나 이모저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서의 품위와 교양서의 재미
책은 비록 지은이의 개인적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서로서의 품위를 갖췄다. 이완용의 둘째 아들이 엮은 이완용의 친필 일기 《일당선고일기》, 이완용이 소장했던 도록 《상미자료》 등 귀한 자료는 물론 이완용이 일본군에 보내는 위문대를 제작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은 《매일신보》 등 언론까지 활용한 덕분이다. 여기 더해 이완용이 1925년 조선인 부자 순위 2위에 이르는 부호였음에도 자기 재산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교육비 납세를 거부했던 ‘현금왕’이었다든가 죽기 일곱 달 전에도 독립군 3대 맹장으로 꼽히던 오동진을 회유하려 했다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여럿 실렸다. 이완용에게 명필이란 평판이 어떻게 붙여지고 확대 재생산되는지,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거기 더해 다양한 사료를 토대로 밝혀낸 근대 예술계의 여러 모습을 새로운 시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

강민경

저자:강민경
성균관대학교한문교육과를나오고,같은학교사학과에서박사과정(고려시대사전공)을수료했다.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조선왕조실록정본화사업팀연구보조원을거쳐2018년부터2021년까지국립중앙박물관고고역사부에서,2022년부터2025년까지는국립제주박물관에서학예연구사로근무했다.2026년부터국립중앙박물관미래전략담당관실에서일하고있다.첫책인《이규보선생님,고려시대는살만했습니까》(2024)외에도〈고려시대의신라출자의식과그사회적성격〉(2019),〈金澤榮의1909년歸國과安中植筆〈碧樹居士亭圖〉〉(2021),〈〈채인범묘지명〉의복원과그의의〉(2022),〈〈활자주조를감독한신하명단을새긴현판[鑄字監董諸臣題名錄懸板]〉의역사적가치―장영실을비롯한조선초기인물의인적사항을중심으로〉(2023)등몇편의논문을썼으며,학부시절《그림으로읽는고려도경》(2013)의삽화를그리기도했다.

목차

머리말

들어가기전에:매국노일당씨의하루

1.이완용은과연명필이라서‘명필’인가
역적이자명필,일당이완용
친일파이자매국노,지울수없고지워서도안될낙인이지만
이완용명필론의허와실
그때그시절의‘붓글씨’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일본승려하쿠인에가쿠
서書테크니션
【칼럼①|그는이런도장을찍었다】

2.독립문獨立門편액,과연누구솜씨인가
독립문에자유종이걸리기까지
“이완용이가쓴것이랍니다”
또하나의후보,김가진
제3의가능성은없을까
독립문,독립문그리고독립문
【칼럼②|안중근글씨와이완용글씨를견주어보면】

3.서여기인書如其人은틀리지않았다
안진경글씨를따랐지만
조선미술전람회서부書部심사위원
그의글씨를본받은사람들
작품으로쓸문구를미리써두다
신문에실린이완용휘호
【칼럼③|그글씨와그림얼마면됩니까】

4.일기속이완용의서화書?인연
대한제국내각용지에쓴이완용일기
일본에서온시문요청
그림구경하러다닌매국노들
덕수궁에서열린서화회풍경
베이징의김태석
경성의도쿠토미소호
【칼럼④|사람을가려사귀지않았던근대지식인】

5.근대가새롭게보급한전前근대
이완용의서재에있던《상미자료》
도록의등장과보급
시골선비의책상에놓인왕희지친필
스스로법첩을만든김규진
고금서화古今書?는박물관과전람회에서
화랑그리고경매장
서점한쪽에고서화를쌓아두고
【칼럼⑤|이완용후작의거실풍경】

나오며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명필신화’의허실을규명하다
일당이완용은당대에명필로소문났다.글씨를받기위해사방에서보낸비단과종이가산더미처럼쌓였고,어떤일본인은이완용의작품뒷면에‘토산土産(みやげ)’이라적어놓을만큼조선을방문한기념선물로여겨졌단다.심지어일본다이쇼천황이그의붓글씨를보고싶어조선총독을통해이완용에게글씨를보내라고요구할정도였다.하지만지은이는그런평가에회의적이다.“좀썼다”에그친오세창의평을들면서이완용이즐겨썼다는〈평상심시도〉를꼼꼼히분석해예쁘게썼을지는몰라도절박함이나독창성이없다고평한다.대신이완용의위세에비춰그의글씨를갖거나그의글씨로된현판을걸수있다는건당시상당한위세를보증하는징표이기도했기에자연스레이완용글씨가좋더라는평이생긴게아닐까하고설득력있는설명을제시한다.

‘독립문’편액작성설을파고들다
역사연구자로서지은이의진면목은이완용이‘독립문’의편액獨立門을썼다는설을파고드는부분에서여실히드러난다.그이야기가1924년《동아일보》에처음실렸다고전제하고이완용이독립협회창립발기인이자위원장이었다는점에서나름근거가있다고인정한다.하지만그의처조카가쓴전기《일당기사》에는전혀언급이없다는점을지적한다.여기에독립운동가김가진이독립문편액을썼다는이설異說에대해서는그의며느리의증언등정황증거외에는직접증거가없다는한계를지적하는엄정한자세를취한다.여기에한걸음더나아가이완용과김가진이각각쓴《천자문》에서獨立門을집자(集字)해그필획을꼼꼼히비교분석한다.그런후어느쪽에도기울지않으면서‘그래픽체설’이란제3의가능성까지소개한다.

사료발굴,《일당선고일기》

2024년7월무렵,저자가국립중앙도서관누리집에서‘이완용’이란단어를검색해보다가우연히찾게된자료,《일당선고일기一堂先考日記》!이완용이대한제국내각에서쓰던공문서용지를가져다가,1911년1월부터6월까지,반년간자신의행적을친필로기록한일기였다.나라팔아먹는문서에도장을찍은그이듬해,이완용의삶은어땠을까?
1911년3월2일목요일(음력2월22일),음산한날이었다.
성내城內서화가제인諸人이서화미술원을만들고서화를진열하여공람供覽케하고겸하여내게(와줄것을)요청하였다.그러므로오후2시에원院에갔는데,여러화사畵師와필객筆客모두당세의이름있는사람들이었다.이때에가서본사람들은평재박제순(1858-1916),우정고영희(1849-1916),낭전조중응(1860-1919),박기양(1856-1932)대감,김종한(1844-1932)대감이었다.저녁이다되어서야비로소돌아왔다.

-《일당선고일기》중에서

당대조선의예술계를주름잡던사람들이모여만든‘서화미술원’에,역시당대조선의정치계를주름잡던이들과함께가서글씨와그림을감상하던일당대감이완용의모습이눈에잡힐듯그려진다.이를비롯해《일당선고일기》에는이완용의일상을엿볼수있는대목이적지않게남아있다.그러나《일당선고일기》는그동안존재조차도학계에널리알려지지못했다.저자는이책을통해,일제강점기초기의한단면을보여주는새로운사료史料를비로소세상에소개하는셈이다.

서화계에드리운‘그늘’을아울러살피다
책은이완용의붓글씨를살피는데그치지않는다.한국최초의근대적미술인단체라고할수있는경성서화미술원,서화미술회,서화협회의창설에깊이간여했고,회장과고문을맡는등근대서화계에서비중있는역할을했음도상세히서술한다.그가조선총독부주관으로1922년처음개최된조선미술전람회의서부書部심사에무려4회나참여했다든가이당김은호,이병도박사의형이병희등이이완용에게글씨를배웠다는사실이그런예이다.뿐만아니다.그의제안으로1909년창경궁에제실박물관이설립되었고,삼팔경매소란곳에서1906년부터고려청자위주로경매가열렸다든가갤러리의원형이라할김규진의‘고금서화관’이1913년문을연사실등당대문화계의흐름이나이모저모를보여주기도한다.

역사서의품위와교양서의재미
책은비록지은이의개인적호기심에서시작되었지만역사서로서의품위를갖췄다.이완용의둘째아들이엮은이완용의친필일기《일당선고일기》,이완용이소장했던도록《상미자료》등귀한자료는물론이완용이일본군에보내는위문대를제작을지원하는내용을담은《매일신보》등언론까지활용한덕분이다.여기더해이완용이1925년조선인부자순위2위에이르는부호였음에도자기재산계산이잘못되었다고교육비납세를거부했던‘현금왕’이었다든가죽기일곱달전에도독립군3대맹장으로꼽히던오동진을회유하려했다는등흥미로운이야기도여럿실렸다.이완용에게명필이란평판이어떻게붙여지고확대재생산되는지,그과정만으로도충분히흥미롭다.거기더해다양한사료를토대로밝혀낸근대예술계의여러모습을새로운시각으로만날수있다는돋보이는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