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온양 방씨(溫陽方氏) 시조 월봉(月峰) 방지(方智) 선생과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월봉 방지(方智) 선생은 당나라에서 신라 문무왕 9년(669) 문화 사절로 파견되었다가, 유교적 도덕 기강과 교육 기관의 부재를 목격하고 귀화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경주 대신 상주에 정착하여 ‘상주방씨’의 시조가 되었으나, 후백제 견훤의 기습으로 가문이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후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창설하여 《구경》·《육례회통》 등 유학 경전을 가르치고, 반절법으로 한자음을 신라말 방언으로 표기·강의하며 이찰(吏札) 문자 체계를 제정함으로써 훈민정음 창제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월봉 선생의 6세손 방운(方雲)은 온수(오늘날 아산시 배방읍)로 거처를 옮겨 고려 초 거란·여진 정벌과 견훤 토벌에 공을 세워 ‘온수군(正一品)’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온양·아산·신창 일대를 사패지로 받아 정착하며 ‘온양방씨’ 본관을 확정했고, 배방산은 그의 공적을 기리는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온양방씨 가문은 효경을 중심으로 효행 전통을 이어왔으며, 28명 이상의 효자·효열자가 기록되어 유교적 윤리와 사회 통합에 기여했습니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은 월봉 방지 선생의 제자로, 사제 관계를 통해 반절법의 원리를 전수받아 이두·석독구결 체계를 집성했습니다. 그는 『석독구결』을 통해 9경을 신라말 국어로 해설·강의하는 교육 커리큘럼을 완성했고, 각필구결은 일본 가나 문자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세종대 훈민정음 창제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설총의 연구는 고려·조선 시대 공문서에 이두를 활용하는 전통으로 이어져 말과 글의 일치 원칙을 세웠고, 한국 문자·언어 발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월봉 방지(方智) 선생은 당나라에서 신라 문무왕 9년(669) 문화 사절로 파견되었다가, 유교적 도덕 기강과 교육 기관의 부재를 목격하고 귀화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경주 대신 상주에 정착하여 ‘상주방씨’의 시조가 되었으나, 후백제 견훤의 기습으로 가문이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후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창설하여 《구경》·《육례회통》 등 유학 경전을 가르치고, 반절법으로 한자음을 신라말 방언으로 표기·강의하며 이찰(吏札) 문자 체계를 제정함으로써 훈민정음 창제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월봉 선생의 6세손 방운(方雲)은 온수(오늘날 아산시 배방읍)로 거처를 옮겨 고려 초 거란·여진 정벌과 견훤 토벌에 공을 세워 ‘온수군(正一品)’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온양·아산·신창 일대를 사패지로 받아 정착하며 ‘온양방씨’ 본관을 확정했고, 배방산은 그의 공적을 기리는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온양방씨 가문은 효경을 중심으로 효행 전통을 이어왔으며, 28명 이상의 효자·효열자가 기록되어 유교적 윤리와 사회 통합에 기여했습니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은 월봉 방지 선생의 제자로, 사제 관계를 통해 반절법의 원리를 전수받아 이두·석독구결 체계를 집성했습니다. 그는 『석독구결』을 통해 9경을 신라말 국어로 해설·강의하는 교육 커리큘럼을 완성했고, 각필구결은 일본 가나 문자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세종대 훈민정음 창제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설총의 연구는 고려·조선 시대 공문서에 이두를 활용하는 전통으로 이어져 말과 글의 일치 원칙을 세웠고, 한국 문자·언어 발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유학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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