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유계자 시집 | 양장본 Hardcover)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유계자 시집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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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어제는 청각이 마비된 오류투성이/ 서문을 지나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면// 헤어진 적 없는 너에게 안녕을 보낸다/ 오래 지속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싱거운 다음 페이지를 기억하려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뉘엿뉘엿/ 하루가 저문다 // 어긋난 날들이 잠복을 하고/ 틸란드시아 긴 수염은 이승의 그늘진 무대 뒷면까지 자란다// 주섬주섬 발을 빼고 소품을 챙겨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난색에도/ 어린 숨소리까지 줄로 재는/ 뜨끔거리는 기침 하나 한 번의 눈웃음까지도/ 극으로 치닫고/ 그리운 것들은 모두 난독이 된다/ 다시 불이 꺼지고 그림자들이 멀어졌다// 큐!//사람의 히스토리는 한 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각본은 오늘도 방문을 연다//
- 「연출자」 전문
저자

유계자

유계자시인의충남홍성에서태어났고,2016년『애지』로등단했다.첫시집으로는『오래오래오래』(2019년세종문화재단창작지원금수혜)가있으며,2013년웅진문학상(시부문)과2021년제8회애지문학작품상을수상했다.
유계자시인의두번째시집『목도리를풀지않아도저무는저녁』은오홍진비평가의말대로“바닥에서피어나는환한문장”으로되어있다고할수가있다.유계자시인은타인의몸에새겨진흉터를보기위해기꺼이바닥까지내려가는모험을감행하며,사람들저마다의삶에드리워진여백을꽃무늬환한문장으로표현했다.타자의아픔에서상련相憐을느끼는시정신은유계자시인의시를가로지르는힘이다.

목차

시인의말 5

1부

뭐특별할것있습니까 12
쪼그리 13
달빛 14
인디언치마 16
밥 18
멸치타작 19
눈사람에덴 20
평행선 22
고장난계절 24
붉은낙화 25
물소리 26
못의용도 28
토란의둥지 30
국법 31
롱고롱고 32

2부

마트료시카 36
봄볕 37
프리저브드플라워 38
무성영화를보러가요 40
황태덕장 42
뜨거운혈통 43
필터버블 44
팔광이빛나는밤 46
Scar와Star 48
연 50
화살나무 51
환촉幻觸 52
태풍 54
단죄는제가받지요 56
가방끈이긴여자 58

3부

우산 62
뿌리 63
우화 64
꽃무늬환한문장 66
저녁은흘러흘러 68
야명조夜鳴鳥를키우다 69
오리봉나무의전설 70
오일장풍경 72
시간이멈춘마을 73
기출문제 74
물의고리 76
땅따먹기 77
경제시간 78
목수 80
연출자 82

4부

탈피 84
순대국밥 86
보조바퀴를달다 88
생의숫자들 89
병동의상련相憐 90
간섭 92
파양 94
손바닥이두근두근 95
힘빠진슬픔 96
고라니와그녀 98
웃음자판기 100
시력視力 101


해설/바닥에서피어나는환한문장/오홍진 103

출판사 서평

「뿌리」라는시에서시인은보이지않는뿌리보다달콤한열매에현혹되는세상에주목한다.땅속으로뻗는뿌리가부실하면당연히열매또한부실할수밖에없다.“나무의뿌리도지하로내려가고/삶의뿌리도바닥을더듬는다”라는시구에표현된바,시인은삶의뿌리와바닥을하나로잇고있다.삶의바닥이란삶이끝나는장소가아니다.바닥까지내려가야비로소달콤한열매를낳는뿌리에닿을수있다.지상이있으면지하가있고,이쪽이있으면저쪽이있으며,날숨이있으면들숨이있는법이다.열매의달콤함에빠진사람들은뿌리에서올라오는이힘을모른다.

바다쪽에서꽃무늬몸뻬바지할머니들몇올라와
당산나무그늘에젖은바다를말린다
바다가내어준한끼조촐한찬거리를손질하며
나뭇가지닮은손가락을무디게움직인다

관절들삐걱대는폐선의노젓는소리당산나무에매어놓고들고나온밀가루반죽을힘껏치댄다
양은냄비에바지락이끓고일흔다섯의막내가토각토각밀가루판을썰고물이랑드는입술을오물거리는팔순이간을본다

수십년지기과부들단단히굳어버린슬픔도바지락칼국수에풀어먹으며
꽃무늬환한문장하나씩되씹다가
서방복없는년자식복도없다며
어귀에들어서는노란봉고차를보고막내가무릎을짚고몸을일으킨다

당산나무밑에여자아이하나부려놓자
함마함마
할머니도엄마도아닌함마를부르는아이손을잡고
낡은노구한채기우뚱

당산나무그늘을털고차례로일어서는오래된꽃잎의문장들,폐선을끌고삐거덕멀어진다
-「꽃무늬환한문장」

몸빼바지를입은할머니들이당산나무그늘에앉아“바다가내어준한끼조촐한찬거리를손질”한다.나뭇가지를닮은손가락에이할머니들이살아온내력이담겨있다.밀가루반죽을힘껏치댈때마다“관절들삐걱대는폐선의노젓는소리”가당산나무주변을맴돈다.막내인일흔다섯할머니가밀가루판을썰면,여든이넘은할머니는입술을오물거리며간을본다.오래전에남편을떠나보낸여인들이모여“단단히굳어버린슬픔”을가만가만바지락칼국수에풀어놓는다.혼자서견디는슬픔만큼아린게어디있을까?제처지를이해하는누군가가곁에있는것만으로도사람들은위안을얻는다.할머니들은그런마음으로당산나무아래모여칼국수를먹는다.
칼국수를먹으며할머니들저마다풀어놓는삶의이야기를시인은“꽃무늬환한문장”으로표현한다.그들이정말로환한삶을산것은아니니라.“서방복없는년자식복도없다며”몸을일으키는한할머니는지금도“함마함마”부르며달려오는아이손을잡고집으로돌아가지않는가.늙은몸으로손자까지떠안은이삶에그누가꽃무늬환한문장을덧붙일수있을까?한사람이일어서자다른사람들도나무그늘을털며차례로일어나폐선과도같은몸을부여잡고저멀리사라진다.시인은그늘을털고일어서는할머니들의모습에서다시금“오래된꽃잎의문장들”을엿본다.
할머니들이살아온삶이그대로문장이되는시세계를유계자는그리고있다.시문장은관념으로펼쳐지지않는다.감각이없는문장은한편의시로거듭날수없다는말이다.“당산나무그늘에젖은바다를말”리는할머니들의모습을머릿속으로가만히그려보라.시인은바다를통해할머니들의삶을엿보고,당산나무를통해할머니들의삶을엿본다.바다와당산나무가언제나그자리에서제삶을묵묵히살아왔듯,할머니들또한언제나그자리에서제삶을묵묵히살아왔다.이런삶을꽃무늬환한문장이아니면어떤문장으로표현할까?문장은이미삶속에깃들어있다.시인이라면그것을본능처럼들추어낼수있어야한다.

물겹은둥글다
번지고번지는동그라미들
헤아리기전에겹치고
겹치다가흩어진다
부드럽게돌을쓰다듬어휘돌고
물고기의비늘도깨진병조각도핥아준다

백사장에밀려온물겹
갈매기발목을맴돌다가
모래밭에둥글게장문을짓기도한다

작년여름
소(沼)에살던물겹
그소용돌이에휩쓸린적이있다

물겹의완강한고집을꺾고
빠져나오기까지한참을허우적거렸다

물겹은부드럽고말랑한
물의고리로이어져있지만
그고리를끊어내려면
죽을힘이필요하다
-「물의고리」전문

할머니들이내보이는“꽃무늬환한문장”이위시에서는물결이겹치고겹친“물겹”으로변주되어나타난다.물겹은둥글게번져겹치다가는이내흩어진다.물겹은부드럽게돌을쓰다듬고,물고기의비늘을쓰다듬으며,깨진병조각을핥아준다.백사장으로밀려와갈매기발목을감싼물겹은모래밭에둥글게장문을지어자기를확연히드러내기도한다.물겹은한자리를고집하지않는다.한자리에머물면물겹은더이상흐를수없다.흐르지않는물이어떻게부드러운힘으로온갖사물을품어안을수있을까?물겹에서린이부드러움에서시인은환하게빛나는문장을본다.
물론물겹이마냥부드러운것만은아니다.시인은작년여름소(沼)에서일렁이는물겹의소용돌이에휩쓸린적이있다.물겹은완강하게시인의몸에들러붙었다.한참을허우적거리고나서야시인은겨우그밖으로나올수있었다.물겹은분명“부드럽고말랑한/물의고리로이어져”있다.물속생명은그것을알기에아무런저항없이물에몸을맡긴다.하지만물에익숙하지않은생명이야어디그런가.죽을힘을다해그고리를끊어내야비로소생명을보전할수있다.당산나무아래서바지락칼국수를먹는할머니들이야말로이러한물의고리를죽을힘을다해끊어내며살아왔을것이다.그들의몸을환히밝히는문장이란바로이지점에서흐르는물겹과자연스레이어지는셈이다.
유계자의시는이렇듯우리네삶곳곳에스며든물겹을꽃무늬환한문장으로표현하는데주력한다.「목수」에나오는내장목수는“수십년못을맞았으니맷집이생길만한데/박힌데또못이박힌다며”한탄하듯말하고,「연출자」에나오는화자는“사람의히스토리는한줄속으로들어가지않는다”라며“내가모르는각본”을찾아오늘도사람들을만나러다닌다.목수에게환한문장은박힌데또박힌못일테고,연출자에게환한문장은오늘들은누군가의각본일터이다.그모든것들이모여물겹을이루고그물겹이하나하나풀어지면한편의시로새로이탄생한다.

----유계자시집『목도리를풀지않아도저무는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