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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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노을의 입을 빌렸다지만 화자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생은 “평생 미혹”되었으면서 미혹된 줄 모르고 사는 데 불과하다. 사실 미혹은 무엇에 대한 마음의 상태다. 그것은 심성을 어지럽히는 부정적 상태가 아니라 내 내면의 프리즘을 통과한, 즉 ‘나’의 내면이 깊숙이 투영된 대상을 향한 영혼의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혹자의 말처럼,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고 갈 수 있었던 시대의 행복(루카치)도 그 별을 바라보는 인간 내면에 ‘타자’에 대한 사랑이 타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을과 당신도 내겐 평생 미혹이다”란 말은 ‘내’가 당신과 노을을 평생 사랑했다는 뜻인 것이다.
저자

안정옥

안정옥시인은1990년『세계의문학』을통해등단했고,시집으로『붉은구두를신고어디로갈까요』,『나는독을가졌네』,『나는걸어다니는그림자인가』,『아마도』,『헤로인』,『내이름을그대가읽을날』,『그러나돌아서면그만이다』,『연애의위대함에대하여』,『다시돌아나올때의참담함』등이있고,애지문학상을수상한바가있다.
안정옥시인의『나의온삶은훨씬짧게』는작은우주에해당하는우리의삶이수많은상실과부재의퇴적층이고,누군가지나간자리를내가현재대신하거나나또한지나가고있음을감지한,그죽음과의접촉을통한감수성의파동을기록한기록물이다.시인은“기존슬픔에구멍을내는작업”을통해우리의눈앞에가릴수도메울수도없는커다란공백,혹은말라르메의말을빌린다면‘자신의죽음’이라는절망적심연을출현시킨다.

목차

시인의말 5

1부
닭의장풀 12
빗자루는흔한것이잖아 14
헌의자위에헌눈이 15
시카고,시카고 16
번역아니면고니 17
패랭이꽃의추억 18
포플러나무책방 19
왼손을위한피아노협주곡 20
유체이탈 21
무성해진쇠뜨기 23

2부
부채혹은손바닥선인장 26
수레혹은수레국화 27
노을의입을빌려 28
느티나무벤치 29
버찌감흥 30
입맞춤 31
염소의투정조로 32
나무가시밭 33
꽃들의상냥함 34
개구리산책 35

3부
그렇게어영부영 38
촛불의불꽃도그러나꽃이다 40
월요일편지 41
죽음이무엇인가 42
운치있게 43
부고장을받던시절이있었다 44
인사도없이 46
다른쓰임새 47
죽음을생각하는아침 48
반토막 49

4부
끝없이이어지는그런관계 52
쥐의폭주 53
까치와까마귀 55
정원에서문장을찾다 56
문장구하기 57
죽은척하기 58
메뚜기의함정 59
나쁜기억의포장법 60
잡아먹혀,슬픔 61
긴수식 62

5부
마음이조금애달파도 64
부러워하며그렇게 65
또한발늦었다 66
누군가의시를읽다 67
그의기억법 68
극,극,극치로 69
우리를갈라놓을지라도 70
나를닮은사람도있다 71
책무라는돌 72
어김없이떠오른달 73

해설/죽음에관한시론詩論-안정옥시집,『나의온삶은훨씬짧게』의시세계/신상조 75

출판사 서평

이책에대하여


빛들이흩어지는일몰에는서러움이몰려온다.눈앞의풍경은이내어둠속으로사라진다.금세오는죽음이자죽음의은유다.이렇듯죽음에대한상념은상실과슬픔과이별등등을거느리며마음을헐겁게흔들어놓는다.신체하나에그림자하나가따르듯,죽음은애초인간의출생에서부터깃들어있는실체다.이명확함과는반대로,‘내차례’의죽음은떠도는풍문처럼막연하고추상적이다.
가릴수도메울수도없는커다란공백.‘죽음’이라는절망적심연을극복하기란불가능하다.삶이죽음을바꿔놓을수없으나,죽음을생각함으로써삶은조금쯤달라질수있으리라.“나의쓰임새는눈뜨면서부터/누군가를향해지저귀는것”(「다른쓰임새」)이라는시인으로서의자각과“죽음의책무”(「책무라는돌」)를깨닫는일이죽음에대한끝없는사유의결과이듯,안정옥의시가“죽음과삶을같은줄기로가지런히세우니/모든게잘갖추어진줄기다부족함이없다”(「반토막」)라며바닥모를깊이로깊어지듯…….
-신상조,문학평론가



먼지가많을수록저녁노을더붉다
빛나는별은먼지와부패덩어리
노을과당신도내겐평생미혹이다
-「노을의입을빌려」부분


노을의입을빌렸다지만화자는머뭇거리지않는다.그의말에따르면생은“평생미혹”되었으면서미혹된줄모르고사는데불과하다.
사실미혹은무엇에대한마음의상태다.그것은심성을어지럽히는부정적상태가아니라내내면의프리즘을통과한,즉‘나’의내면이깊숙이투영된대상을향한영혼의마음상태라고할수있다.혹자의말처럼,밤하늘의빛나는별을보고갈수있었던시대의행복(루카치)도그별을바라보는인간내면에‘타자’에대한사랑이타올랐기에가능한일이었다.“노을과당신도내겐평생미혹이다”란말은‘내’가당신과노을을평생사랑했다는뜻인것이다.
안정옥의시에서미혹은사랑이다.그의시에서“나를아름답다고말하는이가있나/그러면내뒤를캐거나알아내려/애쓰지마라노을은상처다”(「노을의입을빌려」)란부정과,“내손이너에게살짝닿았다해도그것이언젠가어떤방식으로부풀려내게다시돌아오게되어있다”(「염소의투정조로」)라는긍정은이율배반적이지않다.“수십마리새들이부지런히입안으로옮겼을/배설들도벚나무되고언젠가붉은앵두되”는이치라서“희미한가로등아래새똥을치우며,/한낮을불평하는밤”(「버찌감흥」)도있을수있는것이다.시인은“내게왔던꽃들과떠난꽃들모두가,”더할나위없이“좋은위로”(「꽃들의상냥함」)라고,노을에홀리지않는이성적‘적막’보다“격하게흔들리는”‘바깥’의시적순간이있어서,그리고“문득눈이녹듯”사라지는“짧”(「나무가시밭」)은생이기에황홀할수있노라고백한다.함께읽을「나무가시밭」은“누구나생의끝자락이적막이라지만”그러한절망이야말로황홀한절망임을말해준다.


나무들은있음으로
제몸이부풀다터지면5월이오고
무성한잎들이그늘을맞이하면
사방모든걸볼수있는도마뱀처럼
나무는별거리낌이없다

격하게흔들리는건언제나바깥이다

아침,벚나무가길게늘어선길을지나왔다
잎을다내린나무들은어두운가지들을
속내처럼들쳐내짐짓그길이가시밭이다

가시들도견디다못해글자의생김새로
사람도견디다못해중얼거림으로
그런반복을거치면적막이다

누구는생의끝자락이적막이라지만

나무가온삶을비유적으로말하지못하고
그렇게오랫동안제몸을늘려대기만한것을

문득눈이녹듯
나의온삶은훨씬짧게
-「나무가시밭」전문


화자는이날아침,잎을다내린벚나무가길게늘어선길을지나왔다.“나무들은있음”으로존재한다는화자의성찰은생을의식하지않은채존재하는것들에대한깨달음이다.나무는제몸을부풀려잎들을틔우고그늘을만들고,다시그잎들을내리는과정을반복하지만,“그렇게오랫동안제몸을늘려대기만한것”에완벽히무감하다.“나무는별거리낌이없다”라거나,“격하게흔들리는건언제나바깥이다”란표현은나무가한번도살아본적이없다는말로들린다.생은의식하는존재에게만생이다.생을의식하지않는존재에게생은존재하지않는다.때문에“문득눈이녹듯/나의온삶은훨씬짧게”란화자의다짐은,눈이녹듯허망하게사라질생을의식하는존재에대한자각이자경탄으로다가온다.격하게흔들리면서,혹은격하게미혹당하면서,그러함에도자신의유한성을의식하기에인간은황홀하게절망할수있다.적막은적막이므로,꽃도나무도인생도문득,눈이녹듯스러질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