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두 개의 자화상을 그린다 (이미순 시집)

나는 날마다 두 개의 자화상을 그린다 (이미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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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미순 시인은 하나의 담배연기에서 존재의 성립과 변화, 그 상실의 파노라마(panorama)를 유추할 줄 아는 상상력의 눈썰미를 지녔다. 한두 줄기 연기의 흩어짐이 배경으로 삼는 새파란 하늘은 시인에게 “연기”는 “나는 나처럼 번지다 뒤에 옆에 또 그 옆에 그림자가 생겼다”는 물성物性의 반향과 그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모든 존재는 필멸必滅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허무만을 조장하지는 않는다. 비록 “내 연기는 낭패”라고 언술하지만 그것은 더 넓고 깊고 심원한 존재의 궁극窮極을 통찰하게 하는 발어發語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 모든 존재는 만남의 끝없는 갱신을 통해 연기(煙氣/緣起)로 분장되는 흐름이라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 헤아림이 있는 만남을 통한 무수한 변전變轉의 시효 앞에 만물은 새로움을 갖고 영원의 토대를 지향한다. 이러한 모든 연관과 관계는 존재가 마주하는 만남의 파장(performance)을 통해 구체적인 실감과 인식의 다양성을 증폭하고 그 지향점을 깨닫게 한다.
- 유종인 시인
저자

이미순

이미순시인은부산에서출생했고,2022년『애지』로등단했다.
이미순시인의첫시집『날마다두개의자화상을그린다』는‘만상萬像의관계학’이라고부를수가있으며,우리는그의시들을통하여인간의사회성과고유성,그리고존재의성향을살펴볼수도있을것이다.

출판사 서평

이미순시인은부산에서출생했고,2022년『애지』로등단했다.이미순시인의첫시집『날마다두개의자화상을그린다』는‘만상(萬像)의관계학’이라고부를수가있으며,우리는그의시들을통하여인간의사회성과고유성,그리고존재의성향을살펴볼수도있을것이다.

초등학교짝꿍과재혼한순희는
짝꿍이었던상민이를석래아부지요!하고부른단다

100미터길이의비닐하우스일곱개에특수작물과딸기를재배하는데
석래아부지는술을달고산단다

환기창을열다가한잔,목마르다고한잔,출출하다고한잔
해거름이면만취가된단다

시원하게잘웃는순희는그런석래아부지가보여도그만안보여도그만이었지만
일마치면꼭오토바이뒷좌석에서석래아부지허리춤을잡았단다

그날도귀갓길에강둑을달리다가오토바이가굴렀는데
둘이널브러져있다가

괜찮나?
상민이가순희를와락끌어안았단다

그바람에술은입에도못대는순희가
석래아부지에게취했단다

절뚝거리며
다시오토바이뒷자리로가
석래아부지허리춤을더세게끌어안았단다
-「취하다」전문

상극이보합(補合)하여궁합이되는이놀랍고유머러스한지경은반목과갈등이일상화되는우리의흔전만전한만남위에인연의지긋한눈길이있음을똥기듯선사한다.더구나더재미있는것은삶의주변에있는사고의표면적인산문성을그내막을시적해석으로입체화시킨이미순만의너스레와전환된운문성(韻文性)에서찾을수있다.취(醉)함과취(趣/取)이격절하지않고하나로연계되고습합되는자연스러운일상의에피소드가이시편에돌올하니관계의의미를흥미롭게톺아보게한다.
이시적서사(敍事)의전후관계는일상의불상사가오히려불행으로귀착되지않고전환의화해로운변모를양산한다는점에주목할필요가있다.즉“귀갓길에강둑을달리다가오토바이가굴렀”고그리하여“둘이널브러져있다가”무슨서슬엔지“상민이가순희를와락끌어안”는전차를통해“그바람에술은입에도못대는순희가/석래아부지에게취했”다는인간적동화(同化)내지는부부금슬의끌밋한상호동조(同調)를찾았다는점이다.소위전화위복이라는말로는일반화시킬수없는만남의여사여사한곡절이입체감있게지어내는상보적(相補的)이고해학적인너름새와그관계성을확보하기에이른다.이는이미순시인의남다른눈썰미로관계의곡절이지닌너그럽고늡늡한인간미에의발견으로그만남의층위(層位)를격상시키는부부의내밀함을간과하지않았기에가능한일이다.
그러므로하나의만남은한순간의만남의홀겹으로끝나지않는다.그만남의파장이여러겹으로지속적인관계성과영향력을통해중층화(重層化)시킨다.이것은곧하나의만남은한번의만남이아닌존재의다발을엮어내는불가적으로는연기(緣起)의에너지를함축하고발산하는과정이자변화임을암시한다.

남편대신처방약받으러갔다가
의사를보는순간어디서많이본얼굴이다

어디서봤더라/어디서봤더라

의사도내가낯이익은지
처방전을쓰면서안경너머로자꾸나를쳐다본다

청소년자원봉사를하시나요?아니요
음악연주봉사는요?아니요
심리상담봉사?아니요
춤동아리?아니요

아니요아니요를외치며
기억속일상을거꾸로돌리다보니
아하!매일오후6시30분
수영강습연수반

내앞에있다가접영때만되면내뒤로빠지는사람
수경을끼고인사하는사이
어제도마주친사이

의사가운을벗기고넥타이를풀게하고안경을벗기고
수경을수모위로올리면?
영락없다

처방전건네면서
생각났냐는의사의말에
아니요아니요를되풀이했다
-「아니요」전문

우리의만남은스침의반복속에서되살아나는본격적인관계의시작을의미하는내용이다.만났으나제대로만나지않고스쳐갈수밖에없는바쁜일상과관성적인모임에의참여는간과(看過)된존재들로살아가게한다.숱한장소에서마주쳤음에도화자가"남편대신처방약받으러갔다가"보게된"의사"는"어디서봤더라"하는기시감(déjàvu)이들게된다.의사또한낯이익은듯한화자를향해다양한모임의이름을대면서그접점(接點)을찾으려한다.그렇게만남의근거를향한모색이새삼스러운바쁜시절을우리는살고있는지도모른다.
만남이란이렇게존재와존재가함께할만한일종의동행의준거(準據)를확보하기위한나름의소소한노력들을통해상대방과내가"영락없다"라는확신의기억을갖는것,비록“아니오아니요”를되풀이하지만그것은단순한반어(irony)의차원을넘어서자타(自他)가공히존재하는내밀함에닿으려는노력의경주로읽힌다.
무엇보다이시편의제목이갖는강조점과중의적(重意的)인성격은우리의도시적이고습관적인만남의실체에대한은밀한비판을통해진정한만남의의미를묻게한다는점에방점이있다.앞서화자가반복한“아니요”가아닌진정한“그래요”나“예”라고하는긍정에닿기위한과정의종요로움은다름아닌생동하는만남을통한자각(awareness)의입장을갖는데있다.변모하는상대의실체일망정그구체성을확보하는것은단순한외모의특징을넘어내면(內面)으로까지소통할수있는계기를마련하게된다.어쩌면숱한스침과접촉에도불구하고만남의본령에가닿지못하는이유를이미순시인은“어디서많이본얼굴”로서타인을바라보는관성적인삶의분위기를우선떠올린다.그것은분명존재자신을위해서나타인의배려나관심에대응하는인간의예의에관한입장에서도무람하지못한경우이다.
의식했건의식하지못했건우리의만남에있어그관계가갖는징후나증상만있고처방이없다면그만남이란무망하기그지없을것이다.꼭이무슨효험만을바랄수는없으나인간은만남을통해일정부분혹은상당한존재의의미를견인하고삶의유의미함으로확보하게된다.그런데그런존재감이견인되지않는만남이란이미숱한접촉이전제되거나성행했음에도의미와교감이없는삶의징후(symptom)로망각되기십상이다.그런의미에서“아니요”는“그래요,맞아요”를성립하기위한방법론적부정의철저함일수있다.

당신이엎질러졌습니다엎질러짐은나를펼치려다일어난일입니다헛디딘일입니다엎질러진일이꼼지락거리자그사이로당신이보입니다나는얼굴을가까이대고그사이를벌려봅니다오늘이분주해도엎질러진일입니다잠시없어질일들을만들어야겠습니다입버릇처럼말하던소홀을이제는당신의소홀을위해소홀해지겠습니다발꿈치는놔두세요들어올린다고엎질러진일을담을수는없습니다

날마다두개의자화상을그린다
배시시웃는빈안간힘이보이지않으세요?
-「배시시웃는」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