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민달팽이 (전은겸 시집)

내 안의 민달팽이 (전은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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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전은겸 시인이 주목하는 시적 포착의 대상은 하나같이 마음에 맺힌 것들을 사장시키지 않고 유심하게 응시한 일상적 대소사(matters great and small)가 지닌 회생적 의미이다. 이 회생적 의미는 단순히 일반적인 삶의 의미화나 분식粉飾이 아닌 존재의 일상을 충만하게 견디고 북돋아 주는 재생regeneration의 회귀적 역할을 도모한다는 사실이다. 즉 시인은 자신의 일상에 닥친 일들episode의 불모성과 부정성을 그 자체의 현실적 소모의 결과로 방치하지 않고 존재의 내면적 활성을 위한 전환의 도구로 삼는 놀라운 긍정미를 발휘한다. 이 긍정의 동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와 일상 현실이 일정한 과정을 놓고 어떠한 감각적이고 유의미한 연관을 가지는가를 헤아리는 일이 될 것이다.
- 유종인 시인
저자

전은겸

전은겸시인은충북음성에서태어났고,2025년『애지』로등단했다.상담심리를전공했고,(전)과학교사,시낭송가,동화구연가이며,문학동인대전문학회사무국장,여성문학회사무국장,애지문학회회원으로활동을하고있다.
전은겸시인의첫시집『내안의민달팽이』는‘시적역학과일상적서사의심미성’이돋보이는시집이며,반전과급전속의‘이야기시’의진수를보여준다.

출판사 서평

전은겸시인의첫시집『내안의민달팽이』는‘시적역학과일상적서사의심미성’이돋보이는시집이며,반전과급전속의‘이야기시’의진수를보여준다.

부동산하는친구의안부전화에
세종땅샀다며자랑하다가
계약서를보내보라는말에사진찍어보내니
맹지란다

건너기전에돌다리를두드리는사람이있고
건너가다잘가고있나두드리는사람이있는데
나는후자

알아볼만큼알아봤다고자신했는데
나는맹탕

보름지나
계약취소를통보하자친절했던을은갑으로돌변하여
계약금의80%만돌려주겠단다
맹지를주장하며더받으려하자오히려지인생각해서주는거라며
그게싫으면계약금을돌려줄수없단다
바늘구멍도안들어가는갑

주는대로받고돌아서면서
소화제먹은듯속이편해졌다
-「교육비」부분

다그런건아니지만삶의기쁨이나선의(善意)의상황속엔오로지그런전제된기대치와거기에부합하는결과만존재하는건아니다.이는늘상대방이나관계대상이있기때문이다.나라고하는주체의의도나추진결과속엔더불어상대방과의상호적작용이얽혀있기때문이다.그래서장담하거나낙관했던일들은확신과다르게늘변동성(volatility)을가지고그결과를바꿔놓게되곤한다.그렇게“세종땅샀다며자랑”한것이“맹지”(盲地)로판명되는의외의결과를낳는다.그런데재밌는것은화자는자신을“건너가다잘가고있나두드리는사람”이라고오히려자신의성격에더책임을둔다.그런"나는맹탕"이라고자책하거나자인하는것과함께“계약취소를통보하자”상대방은“계약금의80%”만주겠다는속되고야박한모습을보인다.세간의거래관계에있어서자신의성정이만들어낸일종의실수이거나부주의함일수있어도상대방의잘못이작다거나할수는없다.그래서이에피소드가화자의경제활동을챙기는불철저함과거래관계인의유사사행(詐行)으로끝났다면이시는그야말로평범한경험담이상도이하도아닐것이다.
그런데마지막연에서모종의심리적반전이일어나며새뜻한시적활성이일어난다.그것은바로“주는대로받고돌아서면서/소화제먹은듯속이편해졌다”는언술에관심이모아지는대목이다.분명일반적으론자신의잘못이없고상대방의사행행위로인한것이기에미흡한계약금반환은억울함이나분노,배신감같은감정을도출했을텐데화자는의외의감정선(感情線)을도드라져보여준다.즉현실적으로부족한반환이지만그부족감을만족감으로전환할줄아는시인의심리적유연성,그런긍정적(optimistic)자족이라는새로운의미적패턴을활성화할줄아는것이다.일찍이성현라오쯔(老子)는‘만족할줄아는사람은부자「知足者富」’라고하였듯이화자인시인의만족감은오히려부족한결과속에서오히려다행임을되새기는과정에서역설적인(paradoxical)인자족감을수확한셈이다.현실적부족을심리적자족으로바꿀줄아는유연함은그간에많은“교육비”가담보된것이고이를잘정서적으로체득한결과일수있다.

고향친구제향은
유일하게고향을떠나지않은친구다

프로농사꾼이다되어
얼굴도땅을닮아가고
남편보다동작이빠르다

겨울준비를위해
통나무를자르고옆으로오이썰듯도끼질로
장작을수북이쌓아놓은게예술인제향이

나도해보겠다고
통나무세워놓고도끼로내리치자
통나무가비웃듯떼구루루굴러간다

도끼탓인지통나무탓인지이빨도안들어간다
이빨안들어가기가한이불덮고사는사람과똑같다

갓시집온나에게출가외인네글자를내밀때
쪼개버렸어야했는데인공지능시대에
아직도통나무같은사람과
한집에살고있다

제향아
도끼질좀잘하게가르쳐주라
-「도끼질」전문

일종의풍자적유머가깃들어있는이시편은숙련과미숙련의차이를통해과정을생략한숙달은존재하지않는다는평범한진리의절대성(Absolute)을은연중에드러낸다.누구보다도농촌생활에이골이나서웬만한농사일은남자보다잘하는“제향이”는“통나무를자르고옆으로오이썰듯도끼질”에능란한“프로농사꾼”이다.흐트러짐이나미숙성을찾아볼수없는친구를통해자신의미숙함이떠올려지는부부관계의아쉬운부분이화자에게떠오른다.그것은다름아닌“이빨안들어가기가한이불덮고사는사람”인“남편”에대한능숙하지못한대처의미숙성에까지생각이미치기때문이다.농사일에능숙한특히“도끼질”에능란한친구를볼때“갓시집온나에게출가외인네글자를내”미는남편의“통나무”같은고지식함을작파할“도끼질”의파괴적이미지(image)를갈급하듯차용하기에이른다.
남성미의대표적인사물이미지중의하나인도끼를다루는주체가남성이아닌여성일때“도끼질”이갖는그전향적인삶에의진취성이나능동성(activism)은어디서부터발원하는가.그것은다름아닌“제향아/도끼질좀잘하게가르쳐주라”는배움의과정에대한새삼스러운인식,즉트인존재로의갱신을위한자기교육의필요성에기반을두지않나싶다.그렇다면우리는일상생활에서진정으로자신에게종요로운특별한습득의과정(curriculum)이필요함을깨닫곤한다.이는그자체로삶이홑것이아닌겹의상태임을지시하는바와다르지않다.과정을파기하고결과의트로피를들어올릴수만은없는존재의한계를보여준다.동시에적확한관계의시점에파괴적인“도끼질”이궁극적으로는존재의관계를“잘하게”하는창조적인“도끼질”임을전은겸시인은남다른체험의시행(詩行)으로보여준다.파괴와창조가격절(隔絶)하지않고하나의과정을통해의미있는연관성을지닌다는것을화자는충만한나름의스토리를앞장세워끌밋하게연출해낸다.

뚜벅
뚜벅

언덕너머
도종환시인이근무했던작은학교에
발령받은지벌써이년

버스타고가다내려서다시갈아타고가야하는
오가는길만두세시간

지루한
길은그대로인데
시집을읽으면서더이상지루하지않았다

가방속에시집넣고
인포리로향하면

나에게
시집속의시는
학교오갈때마다말벗이되어말을걸어준다

할머니가주시던곶감처럼
무릎위의시집에서시를빼먹다보면
입가에번지는
시맛

사실이건비밀인데
버스에서내리면시를읽으며걸어가거든
마치민달팽이가바닥을한자한자눌러기어가듯

그래서여기까지온거야
-「비밀이야」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