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오래 (박영화 시집)

조금 오래 (박영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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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박영화 시인의 『조금 오래』는 ‘추억’이며, 오래 묵을수록 새로워지는 ‘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랑은 추억을 만들고, 추억은 그 모든 것을 다 미화시킨다. “길을 걷다 어디선가 익숙한 향이 퍼질 때, 오래된 냄새가 불쑥 내 속을 건드린다. 질겅거리는 추억 하나가 발끝에 붙어 따라온다.”
추억은 서정시이고, 사랑은 서정시의 주인공이다.


말끝에 핀 웃음 하나에도 입꼬리가 달아올랐다 서툰 고백은 분홍빛 솜사탕처럼 부풀었고 혀끝에 닿을 듯한 숨결은 씹을수록 달콤했다 그때는 공기마저 달달했다 이제 단물 빠진 시간처럼 삼키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질겅거린다 그럼에도 차마 놓을 수 없어 담아두었던 것들이 있다 익숙해진 온도, 손톱 끝에 남은 향기나 티셔츠에 묻은 웃음 같은 것들, 버리기엔 조금만 더, 하고 붙잡았던 것들이

사랑은 오래 묵을수록 모양을 잃어갔다 처음의 달콤함도, 말랑거림도 더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무표정한 딱딱함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우린 서로를 뱉어냈다

길을 걷다 어디선가 익숙한 향이 퍼질 때, 오래된 냄새가 불쑥 내 속을 건드린다 질겅거리는 추억 하나가 발끝에 붙어 따라온다
- 「조금 오래」 전문


시집의 표제시 「조금 오래」는 시적 화자가 ‘길’을 걷다가 익숙한 향을 맡게 되고, 그 오래된 냄새로 인하여 질겅거리는 추억 하나의 본체를 펼쳐 보이고 있다. 사랑의 감정이 처음에는 달콤하고 설렘이 가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뎌지고, 결국엔 그 감정이 소멸하는 과정들을 ‘길‘이라는 공간 이미지에서 시간의 진행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첫 연은 사랑의 초기 감정을 매우 감미롭고 부드럽게 묘사해 낸다. “말끝에 핀 웃음”이나 “서툰 고백은 분홍빛 솜사탕처럼 부풀었고”와 같은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사랑을 감지하는 순간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를 시각으로 강조하고 있다. 사랑의 진입 과정이 흥분이 가득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계속하여 이어지는데, "혀끝에 닿을 듯한 숨결은 씹을수록 달콤했다"라는 성애적인 표현으로 사랑이 깊어질수록 점차 상대를 맛보고 느끼는 미각이 배가하는 것을 증거해 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의 가열했던 초기 감정은 점차 변하고 흐려져서 사랑의 종말에 대한 계고를 가감 없이 드러내게 된다. “단물 빠진 시간처럼 삼키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질겅거린다”는 것은 사랑이 식고 난 후 남은 후회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잔여 감정을 직시하는 독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놓을 수 없어 담아두었던 것들이 있다”는 부분에서는 미련이 쉽게 버려지지 않음을 진솔하게 표출한다. 사랑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초기의 감정이나 기억을 놓지 못하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들키고 있는 것이다. “익숙해진 온도”와 “손톱 끝에 남은 향기”처럼 사랑이 지나간 후에도 남아 있는 감각들, 즉 시간과 감정이 만들어간 흔적들이 여전히 잔존함을 숨기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연은 시간의 진행에 따른 사랑의 변화와 그로 인한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사랑은 오래 묵을수록 모양을 잃어갔다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습관처럼 익숙해지면서 변해가는 과정을 암시하고, 처음의 달콤함도 말랑거림도 더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 느꼈던 열정이 사라짐을 씁쓸하고 애절하게 나타낸다. 그렇기에 무표정한 딱딱함을 견디지 못하고 상대와의 관계가 굳어져간 결말로 "끝내 우린 서로를 뱉어냈다"는 진술은 결국 감정이 식어 변질되어 더 이상 서로의 유대를 유지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사랑을 끝내게 되는 정황인 셈이다.
시인은 「조금 오래」에서 ‘길’이라는 긴 행보를 통해 사랑의 실체를 역설하고 있다. ‘길’은 그 자체만으로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상징하는 중요한 메타포로 작동한다. 목표를 향한 여정이나 선택과 갈림길, 혹은 성장과 변화 등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 연유이다. 특히 문학이나 예술에서 인생을 비유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주 등장하는데, 시인은 인용시에서 운명의 흐름으로서 ‘길’이라는 공간 이미지를 차용하여 사랑의 순차적인 본질을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햇빛다방’과 ‘장미미용실’이라는 아늑한 밀실 공간들로 독자들을 안내하여 사랑의 서사를 이어간다.
저자

박영화

박영화시인은충남서산에서출생했고,2023년『애지』로등단했다.현재서산문학예술연구소사무총장및서산타임즈지역기자로활동을하고있다.
박영화시인의『조금오래』는‘추억’이며,오래묵을수록새로워지는‘사랑의노래’라고할수가있다.사랑은추억을만들고,추억은그모든것을다미화시킨다.“길을걷다어디선가익숙한향이퍼질때,오래된냄새가불쑥내속을건드린다.질겅거리는추억하나가발끝에붙어따라온다.”
추억은서정시이고,사랑은서정시의주인공이다.

목차

시인의말 5



1부

조금오래 12
케냐에서온편지 13
이카루스의꿈 14
장미미용실 16
햇빛다방 18
선긋기 19
먹는다,바쁘다 20
브라질풍바흐를듣다 21
無言의辯 22
모든도시가당신이었다 23
옆집여자 24
무단횡단 25
고등어 26
고양이가사라졌다 27
경계境界 28
오필리아를위한파반느 29



2부

느티나무아래 32
석류 33
디오니소스의메모 34
조만간 35
자운영 36
산불 37
바깥 38
소주두병 39
쓸쓸 40
정체구간 41
사랑을팝니다 42
창문이없다 43
쏙독새 44
늦은고백 45
콘도르날다 46
밤의계산법 47



3부

오필리아의노래 50
명자 51
밥묵자 52
비의변주곡 53
다시,오래된이름앞에서 54
나는자주우회한다 55
계단 56
유효기간 58
바람으로 59
천운 60
헛꽃 61
갱년기 62
마침표를찍다 63
침묵으로말하다 64
그가왔다 65
개심사명부전 66



4부

오늘의온도 68
어둠의무게 69
다이어트 70
울지않기로했다 71
입속의말 72
나를부르던이름-시와조각전,두겹의포말에부쳐 73
간월도 74
배송중입니다 75
미경이 76
선택적기억 77
낯선사람 78
이름값 79
Biei 80
숫자놀이 81
유두교를걷다 82
가을,개심사 83
화양연화,그후 84


┃해설┃김명원
공간이미지로직조하는사랑의서사 85

출판사 서평

문을열자종소리가한시절을깨운다
시간의틈새가벌어진다
누렇게바랜벽지와붉은벨벳소파가나를반긴다
누군가의사랑과이별을견뎌냈을가구들,
그위에조심스레나의몸을포갠다
밖은2025년이었지만
이곳은여전히1980년속에머물러있다
눅눅했다
비에젖은담배냄새와가죽냄새,그리고
한참전에끓여낸커피의잔향이함께뒤엉켜
어깨위로천천히내려앉았다
노란커튼사이로오후가기울어지고있었다
손끝으로느껴지는컵의온도,
머무는듯흘러가는음악,
느릿하게깨어나는감각들,
마치그다방이아직도끝나지않은너를송출하는듯했다
한귀퉁이에우리의시간을내려놓는다
오래된문장이햇빛을밀고나왔다
-「햇빛다방」전문


시적화자는햇빛다방의‘문’을열자종소리가한시절을깨우고시간의틈새가벌어진다고간파해내고있다.이때의‘문’은물리적인공간기호가아니라경계와전환의상징으로드러난다.즉인용시에서‘문’은내부와외부,과거와현재,자아와세계등을구분하는매제로작용한다.이중에서도특히‘문’은현재라는공간적차원에서과거라는공간적차원으로바뀌는변환의도구로사용되고있다.시간이돌연2025년에서1980년으로전화轉化하는마법의경계인문을넘는순간,화자의경험이나인식이확연히변한다는점에서‘문’은신비한공간이미지로현현한다.
문을열고들어서자햇빛다방의내부가세세하게그려지고있다.누군가의사랑과이별을견뎌냈을가구인붉은벨벳소파에조심스레화자는몸을포개며손끝으로느껴지는컵의온도로감미로운촉각이미지를,어깨위로천천히내려앉는비에젖은담배냄새와가죽냄새,한참전에끓여낸커피의잔향을시전체에후각이미지로,누렇게바랜벽지와노란커튼사이로오후가기울어지는시각이미지를,그리고머무는듯흘러가는음악으로청각이미지를입체적으로직조하면서이러한두터운공감각적이미지를“느릿하게깨어나는감각들”이라고묘파한다.
시의마지막부분에서시「햇빛다방」은예열을끝낸발열반응이시작된다.이는“마치그다방이아직도끝나지않은너를송출하는듯했다”는고백에서드러나는데,햇빛다방은과거우리가함께였던공간임이노출되면서“한귀퉁이에우리의시간을내려놓는다”는회억의단초를제공한다.시적화자는그시간을이공간에서감지하며옛사랑의흔적을감식하고있다.그리고이러한추억들은“오래된문장이햇빛을밀고나왔”기에이토록감미롭고도애절한시「햇빛다방」으로발현하고있는것이다.
그렇기에시가마무리되는시점에서‘문’은다시금기회의상징이라는공간기호로거듭난다.과거햇빛다방의한귀퉁이에서사랑을나눈열락은아직도끝나지않은너를송출하고,그‘사랑을기록’하여‘아름다운시’로서완성해낸연유이다.이때‘문’은새로운기회이자가능성을여는상징기호로서작동한다.시인은문을열고들어가는행위를통해경계를넘어서는변화와전환,또는신선한시작詩作이라는기회를의미하는복합적인상징성을만들어내고있다.


단지날고싶었을뿐이에요,오랜꿈대신밥을먹었거든요,문밖을보세요,권태에찌든그가떠나가고있어요,소란스러운사월과도안녕입니다,나의계절은죽어버렸으므로이제밥대신꿈을먹어야해요,밥안치는소리는꽃밥으로나피겠죠,어쩌면바람처럼세상을유영하게될지도모르겠어요

어머닌말씀하셨죠,사람은밥을먹어야한다고,하지만알았어요,배고픔보다더견디기힘든건나를잃어버리는일이라는걸,그만봐버렸거든요,어깨죽지위로돋아나는날개,닦을수록빛이나는내날개를

등에진짐이무겁지만,기꺼이산에올라요,높이올라야높이날수있으니까요,아마그도그래서였을거예요,한순간나락으로떨어질지라도하늘을가지려던그꿈을포기할수는없었을테니까,누군가에게는밥이나죽음보다더중요한게있다는걸

깨부술수없는창살이라면날아가야해요,내게날개를달아준당신,당신의부재는자꾸나를저쪽너머세상을기웃대게만들어요,나를관통하는바람,당신인가요,그는죽었지만나는죽지않아요,나의날개는밀랍대신당신의목숨줄로이어만든진짜니까
-「이카루스의꿈」부분


이시는자아의발견,꿈과성취,그리고자유에대한희원을표현한시이다.'밥'과같은생존적인욕구를넘어,자신을잃어버리는것이더큰고통임을깨닫고,자유를향해날개를달고날고자하는열망을드러내고있다.삶의고난과짐을짊어지며높이날기위한노력을기울이는가운데,그가추구하는것은단순한물질적실현이아니라,‘나’라는존재의의미와진정한자아를찾는원대한작업인것이다.꿈을향해나아가려는집념과그것을이루기위한내적투쟁을보여주는비범한시이다.
박영화시인은이번첫시집을통해촘촘하게직조되는공간이미지들을활용하여사랑의서사를펼쳐보이고있다.사랑의정의는개인적인경험과문화적배경에따라다를수있지만그리스철학에서는여러형태로나누어설명하고있다.에로스는열정적이고육체적인사랑으로성적욕망을동반하는사랑인데반하여,필리아는친구나이웃간에나타나는동료애이고,아가페는무조건적이고자비로운사랑이라면스토르게는부모와자식이나형제자매간의우애이다.
이에시인은사랑은사람과사람,혹은동물과의관계에서파생하는감정적인반응과대응이라고피력하며다양한사랑들을시에담고있다.성애적인사랑과결별(「화양연화,그후」),이웃과의친연성을드러내는교감(「옆집여자」),부모님의헌신적인사랑(「고등어」)과고양이를배려하는동물사랑(「고양이가사라졌다」)등을‘햇빛다방’,‘장미미용실’,‘골목’,‘방’,‘벽’,‘문’,‘창’,‘서랍’등의공간기호들로치밀하게축조해낸다.그러나이성과의가열했던사랑은협소한공간이미지처럼유효기간3년으로끝이나고(「유효기간」),부모님께받은가없는사랑도부모님과의사별로마감(「경계」,「창문이없다」)될것이며,친구와의친밀한우정(「미경이」)도죽음으로종말을고한다.
시인은시간의유한성앞에서사랑이소멸할수밖에없음을인지하고,타자와의사랑을넘어자기자신과의사랑,즉‘자기애’로귀결되는자긍심회복과자아정체성및주체성탐색으로나아간다.「이카루스의꿈」에서“문밖을보세요”라고외치는시인은닫힌현실로부터탈출하여‘문밖’을삶의새로운지향점으로확산설정하며,“깨부술수없는창살이라면날아가야해요”라고격려함으로써독자들에게제약된한계를넘어각자의‘꿈’을향해“하늘”로비상할것을응원하고있다.‘지상’에서오밀조밀한공간이미지로직조했던타자와의사랑들이높은곳으로날아올라도달하게될자기사랑이라는‘천상’으로공간기호를드넓게확대해가는것이다.이러한사랑의영역확장과자아를찾기위한용기의전언으로박영화시인첫시집의출중한시적성취가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