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혹은 유리잔

물고기, 혹은 유리잔

$12.00
저자

김지요

김지요시인은전남보성에서태어났고,2008년『애지』로등단했다.시집으로는『붉은꽈리의방』이있고,제5회애지문학작품상을수상했다.
『물고기,혹은유리잔』은김지요시인의두번째시집이며,황정산교수의말처럼‘너머를보류하는쓰기의기술’이라고할수가있다.발효의시간처럼,김지요시인의언어는‘지금-여기’의압력을즉시넘지않고,스스로를숙성의그릇에담아‘너머’를늦춘다.

목차

차례


시인의말 5



1부

알 12
사과의은유 13
완독玩讀 14
두루헤아리며깊은생각에 15
하우스 16
멈춰버린심장처럼 17
밤은말이없고 18
상강霜降 19
애저哀猪 20
모든사물에는눈물이있다 21
칠월 22
소쩍새와별을불러 23
박수근미술관 24



2부

블루진을찾습니다 26
개가걸어온다도서관으로 28
물고기,혹은유리잔 30
군산 31
오도리의재구성 32
비트앤비트 34
바람을받아쓰다 35
새의시간 36
다음분오세요 38
제라늄,제라늄 40
주산지를채집하다 41
오디,어디 42



3부

수박을고르는법 44
터미널박 46
고수高手 48
봄아, 50
하필 51
생이 52
공중을재단하다 54
어머니를봄 55
대화의형식 56
옴천면사무소공터에는 57
물의나라 58
금목서 60
화동분매길 61
春속으로 62



4부

오늘의경작 64
사과나무집 65
구름의門에기대어-송수권시인을추모함 66
사월의방문객 68
부추곁에갔다 69
등촌리산1번지 70
능소화의쓸모 71
덫 72
별서정원 73
남산별곡 74
커피로드 75
수밀도 76
거미의세계 77
나비가돌아오는저녁 78
나의가게 79


해설/너머를보류하는쓰기의기술/황정산 81

출판사 서평

미끄러운내언어는네게닿을수없어

차가워
물속을헤맬때
물끄러미식어갈때도

힘겨운춤을추는물고기
체온을기다리는유리잔
물속에서도목이마른

꼬리치는물고기에게,물이
끓어오르길기다리는유리잔에
닿기를

몸만남아
스스로를할퀴며파닥이는물고기
찢긴지느러미,흩어진비늘

반짝이는건순간이야
갇히거나가두거나

비릿하고투명해깨지기쉬운
거짓말거짓말
-「물고기,혹은유리잔」전문


미끄러운언어·차가운그릇·숨가쁜몸은각각소통의매체가되면서동시에감옥이된다.물고기는물없인살수있으나물에예속되어“물속에서도목이마른”아이러니를낳고,유리잔의투명성은결핍을더욱선명히드러낸다.파닥이며비늘이반짝이는순간은해방처럼보이지만곧“갇히거나가두거나”로회귀하는것을보여줄뿐이다.시는투명하면닿는다는믿음을“비릿하고투명해…거짓말”이라단죄하며,해방은벽을뚫는사건이아니라체온·리듬·매체의재배치를통해닿음을다시설계하는느린기술임을우리에게설득한다
김지요의시에는문틈의빛,냉장고의날짜,도서관서가의분류표,독(甕)과뚜껑,컵과파놉티콘,거미줄과풍선,대숲과바람처럼,우리일상의배경이자우리삶의통제장치로작동하는사물들이빈번히등장한다.이사물들은단순한배경이아니라삶을재배열하는적극적주체다.시인은이들사물·비인간존재들과화자를동일평면에세워서로의“호흡”을듣고받아적는일,곧‘봉인된일상’의균열을더듬는다.
이시집의첫작품「알」을읽어보자.


나는지금여기에있다
한세계를깨려고

냉장고문틈
새어드는빛에매달려
날짜를센다
서른개의포커페이스
알들에둘러싸여
일상은복제되고있다

기록할수도
기억할수도없는날들

똑같은창문,계단
숱한난생卵生들
문을걸어잠그면
수인번호TGYK2

‘너머’로옮겨가지못한
하루가또저문다
-「알」전문


이시는복제된일상의감옥을간결한이미지로압축하고있다.“서른개의포커페이스/알들에둘러싸여/일상은복제되고있다”에서알의무표정은개체성의삭제를,‘서른개’라는개수표기는평균화된소비단위를환기한다.복제는생산의효율만이아니라감정의균질화까지가리키며,화자는동일한날들의반복속에서구체적감각이결핍된“기록할수도/기억할수도없는날들”을말할뿐이다.기록과기억이동시에작동불능일때,주체는사는중이아니라보관되는중일뿐인상태에놓인다.냉장고는그래서단순한가전제품이아니라,삶을보관·분류·지연시키는근대적시간장치의은유가된다.
알은본래‘생성’의상징이지만이시에서의알은상자포장,날짜인쇄,외관의동일성으로표준화된상품이다.이런알들을바라보는시의화자역시그들과다를바없는식별가능한단위가되어간다.즉,생의시작을약속하던알의이미지가,생을관리하는바코드적감각으로치환된다는것이다.“문을걸어잠그면/수인번호TGYK2”라는구절이이를너무도잘말해주고있다.TGYK2는달걀의고유인식기호이면서동시에화자자신에게부여된식별값처럼읽힌다.사물에부착되던기호가주체에게로이행하는순간,개인은교체가능한단위로환원된다.이는푸코가말한규율사회/통제사회의표지들,즉감시,표준화,분류가일상에정착해‘나’를관리되는생명으로만들고있음을보여주고있다.‘번호’는법적·제도적인정을의미하기도하지만,동시에개별성의말소를뜻한다.
후반부의“‘너머’로옮겨가지못한/하루가또저문다”라는구절은시가초반에제기한“세계를깨려는”의지가결국문턱에서좌절되는장면을보여준다.‘너머’는일상의관리체계를초과하는초월,변화,탈주를의미하지만,하루는이경계를건너지못한채소멸한다.이작품은체념을말하지않는다.대신균질화의압력이어떻게일상의단위들-날짜,개수,코드-로침투하는지면밀하게체감하여기록한다.이‘체감의정확성’이바로시쓰기의윤리이다.‘저문다’로끝나는결말은패배의진술같지만,사실상다음날의독해를요청하는개방형종결이다.내일도‘날짜를센다’면,우리는무엇을다르게셀것인가?‘번호’대신‘이름’을,‘복제’대신‘차이’를세는방식은가능한가?시는해답을명시하지않되,질문의구조를손에쥐게한다.

김지요의시는너머로의탈주자체가아니라‘넘어가려는몸의시간’을기록한다.「알」의복제된일상,「물고기,혹은유리잔」의투명한구속,「덫」의자발적포획,「거미의세계」의직조와희생,「완독」의발효와걷어냄,「두루헤아리며깊은생각에」의유예된독해,「새의시간」의잠정적비상,「개가걸어온다도서관으로」의감각적독법등은‘너머’를즉시성취하지않고,의도적으로지연시키며견디는태도를미학으로정식화한다.여기서지연은도피가아니라방법이며,견딤은체념이아니라윤리다.
이시집의에토스는거대담론의선언이아니라,생활세계의미세한봉인들,이를테면번호,분류,뚜껑,통로를감각화하고느리게만드는힘에서나온다.번호를이름으로다시세고,복제를차이로다시세며,닫힘을통기로바꾸는일.발효의시간처럼,김지요의언어는‘지금-여기’의압력을즉시넘지않고,스스로를숙성의그릇에담아‘너머’를늦춘다.늦춤은실패의다른이름이아니라,타자를수용할여백을마련하는공간이며시간이다.
‘너머를보류하는기술’은결국읽기와쓰기의윤리에연결된다.급한결론대신느린절차,단언대신반가의자세,해석대신받아쓰기,소유대신소통.이런프로토콜을통해시는관리되고속박된삶의속도를늦추고,세계의미세한진동에다시귀를기울인다.그렇게보류된‘너머’는어느날문득도래하는사건이아니라,매일의발효와환기속에서조금씩이동하는경계의이름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