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회고록 (김연진 장편소설)

악의 회고록 (김연진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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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는 악인으로 태어났다.”
애석하게도 어린 날의 나는 알지 못했다.
순결한 인탈리엔을 집어삼킨 ‘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쁜 말이나 나쁜 생각, 나쁜 행위 같은 것을 애초에 할 줄 모르는 순결한 사람들만이 모여 있는 세상을 말이다. 만약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본성’은 ‘나쁘다’는 것의 대척점에 있는 ‘착한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이 험난하고 지난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평화로운 세상을 한 번쯤 꿈꿔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예로부터 인간의 성악과 성선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펼쳐온 역사가 증명하듯, 인간의 ‘선’과 ‘악’은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그렇다면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란, 정확히는 ‘악’을 깨닫지 못한 자들의 세상이겠다. ‘선’한 사람들이 일구고 이룬 평화로운 땅에 태초의 ‘악’을 자각한 이가 깨어난다면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정확히 그 세상을 창조해낸 작가가 탄생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위대한 정신’을 가진 자들이 모여 숭고하고 고귀한 땅 ‘인탈리엔’을 만들었다. 그들은 어렸을 적부터 위대한 선생과 스승으로부터 “서로를 돕고 도와서 결국엔 함께 행복해져야 하는 기쁜 사명”을 배운다. 타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인 세상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상적이란 말인가. 인탈리엔에는 당연히 ‘선’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악’의 형상을 마주한 적이 없으니 그에 반하는 ‘선’이라는 것 자체를 정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탈리엔에 “남들과 다르다고 처음 느낀” 한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인탈리엔 최초의 악인 ‘말루스’다. 모두가 선한 인탈리엔인들은 단 한 명의 악인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평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그들의 ‘선’이 진정한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연진 작가는 이러한 철학적인 고뇌를 소설에 녹여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진정한 삶의 가치와 ‘나’ 자신, 그리고 ‘우리’의 의미를 되돌아보도록 돕는다. ‘악’의 시대가 도래한 인탈리엔에 초대된 독자들이여, 부디 이 천재적인 작가가 탄생시킨 ‘악’의 범람 속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란다.
저자

김연진

저자:김연진

과학을전공했고,철학을즐기며,문학을씁니다.어제는국제저널에실릴논문을쓰고,오늘은장편소설을씁니다.

서울대학교대학원에서분자의학및바이오제약을전공했다.단편소설「라크리모사」로제65회서울대학교문학상단편소설부문가작을수상했다.

목차

Chapter.1
악의탄생
악의발달

Chapter.2
악의담론
선의담론

Chapter.3
악의기쁨
악의씨앗

Chapter.4
세번의대화
두가지진실

Chapter.5
대화록
회고록
악의5문답
부록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최초의악인,말루스의고해

인탈리엔은“개인의의견이아닌하나의공통된생각을공유하는것에서행복을느끼”는‘위대한정신’을가진자들이이뤄낸순결한땅이었다.여덟살의말루스가태초의‘악’을자각하기전까지는…….어린말루스에게인탈리엔인들은무기질적인,살아있지않은기계처럼느껴졌다.그들은무조건적으로타인의행복을바라며개인의삶에주체성을갖지못했기때문이다.말루스가처음남들과다르다고느꼈던때는한친구의윤기나는‘펜’을몰래가져오고싶다는욕망을느낀순간이다.말루스는“누군가에게사실이아닌것을믿게할수있”는‘거짓말’을알게되었고,“나를속이는거짓말”까지할수있게된다.이제남을속이는일만남았던말루스는“다너를위한일이야”라고말하며제욕망이욕구로변하는순간마다남의마음을좌우하기시작했다.‘위하는일’이라니,착한인탈리엔인들에겐더없이뿌듯하고벅찼을말이었을터다.

말루스는자꾸만‘위대한정신’에반하는‘어긋난마음’의근원을찾고자했으나,인탈리엔의현명한노인조차도정답을알지못했다.당시의말루스는왠지모르게자신이이방인이된듯한그허전하고쓸쓸한감정이‘외로움’이라는것도몰랐다.눈물이란기쁠때에흘리는것이라여겨온인탈리엔에‘외로움’이나‘고독함’,‘슬픔’같은감정이존재할리가없었기때문이다.그는그저홀로고통속에갇혀타닥타닥,고요하게타오르는불길에만기댈수있었다.그리고그의속에서꿈틀대던무언가가절규하는‘비명’으로발화되고,수다스러운인탈리엔인들과다르게고요하면서도거대하게솟아오르는‘불’을지르는것으로행위되어이윽고‘악’이라는이름을갖게되었을때,인탈리엔최초로‘악인’이탄생했다.

걷잡을수없이커져가는‘악’에대한갈망과탐구에빠져든말루스의눈에띈,“불행히도그의악을온몸으로받아내야했던작은소년이있었으니”바로에스투스다.말루스는에스투스에게악을가르치며자신만이알고있던‘악의세계’로에스투스를끌고오려했다.그리고얼마간말루스의계획은성공적인듯보였다.하지만잔잔한호수에돌멩이가떨어지면물결이일렁이고여러겹의파동이굽이친다는것을그는간과했다.말루스보다더한‘악인’이된에스투스가인탈리엔에‘악’을퍼뜨리고인탈리엔이힘없이스러졌을때가되어서야말루스는깨달았다.“흘러넘치도록내버려둔악이얼마나위험한것”이었는지.말루스는돌이킬수없는선택을한에스투스를떠올리며삶의종장에이르러서야펜을들었다.‘악’의시작이었던,말루스가훔친에스투스의윤기나고예쁜까만펜을.

에스투스에게바치는고해이자속죄인『악의회고록』은이렇게시작한다.

“친애하는에스투스.내과오를되돌릴수없다는걸잘알고있네만,
단한번만이라도자네에게속죄할기회를주겠나?”

최초의선도자,에스투스의고백

언제나에스투스는말루스의곁에있었다.말루스가거짓말을할때도,너무나커져버린‘악’이폭력으로발현되었을때도,모진말로에스투스를꿇어앉혔을때도.그는말루스가행하는‘악’의대상이모두자신을향해있음을알았지만모든걸감내하고또참아냈다.고귀한땅인탈리엔의‘위대한정신’의표본이라할수있는그에게있어,말루스의‘악’을이해하고수용하는건행복을위한길이었기때문이다.그랬기에말루스가‘수확’하는것이라알려주며남의물건을몰래가져오라고시켰을때도,그는그릇된행동임을알지만말없이말루스의뜻을따랐다.그누구보다남을위하는에스투스가‘위대한정신’을거스르는행위를실현했을때,그자체로이미말루스보다더한‘악’의그림자가에스투스를지배하기시작했다.

말루스의벗이되기를자처한에스투스는그를찾아가‘악’을배웠다.마치스승과제자의관계처럼,에스투스는말루스로부터‘악’의근원을이해하고그모든걸기록해나갔다.꽤오랫동안‘악’의담론을이어가던에스투스가‘악’의반대개념인‘선’의근원을깨우쳤을때,마침내인탈리엔에‘선’과‘악’이자리잡았다.에스투스는그것에그치지않고인탈리엔의현명한노인이자말루스의할아버지를찾아가‘선’에대한체계를구체화했으며이내『우리의기쁨』,『공동체의기쁨』『세계의기쁨』을출간한다.그러나바빠진에스투스가발길이끊기자말루스는더욱더‘악’에고립되었으며,어느날갑작스레겪은할아버지의죽음으로‘악’의심연에가라앉아버린다.역시나그런말루스의곁을지킨자는에스투스였다.

모든걸상실한채먹지도,마시지도않고메말라가는말루스를바라보며에스투스는결심했다.더는말루스를혼자두지않겠다고.말루스를‘선의세계’로데려올수없다면,선의세계에있는‘모두’를‘악의세계’에보내주겠노라고말이다.에스투스는말루스와나눴던‘악’에대한담론과그의‘사고체계’를정립한내용을바탕으로『악의기쁨』을출간했다.그리고‘악’을널리퍼뜨리기위해끔찍한짓을벌이게된다.한번퍼져나간‘악’은화마가되어인탈리엔을집어삼켰다.모든공동체가문을닫고‘우리’를위하던사람들이‘개인’의‘이기심’만을좇자말루스는에스투스를찾아간다.말루스는간절한목소리로에스투스에게이제그만멈출것을부탁한다.악의세계로모두를데려간에스투스는모든걸체념한듯나지막이고백했다.여태껏그가‘악의사도’로살아온이유를,그리하여저지른참담한악행들을.

“이보게,말루스.웃어보게!나는인탈리엔전체보다자네하나를선택한거야.어째서기뻐하지않는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