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달라졌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가 변하고, 교육이 변하고, 국제질서가 뒤바뀌어도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수십 년의 기록으로 다시 읽는 시대, 사람 그리고 삶의 지혜
대학과 교육, 경제와 윤리, 도산과 흥사단, 제주와 한반도, 그리고 세계의 역사 현장까지...
삶의 현장에서 기록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세월의 강가에 서서, 지나온 시대와 오늘의 우리를 바라보다
우리는 언제나 시대 속을 살아가지만 자신이 어떤 시대를 지나고 있는지는 쉽게 깨닫지 못한다. 하루하루의 사건은 뉴스가 되고, 뉴스는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된다. 그러나 누군가 그 순간의 고민과 생각을 기록해두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록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불러내고,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꿈꾸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때로는 오래전의 질문이 놀랍도록 오늘의 질문과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강용찬의 《세월의 강가에서 시대를 읽다》가 흥미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어느 한 시점에서 과거를 정리한 회고록이 아니다. 저자가 대학과 시민사회, 경제와 교육, 흥사단 운동과 해외 역사탐방의 현장에서 그때그때 보고 생각한 것을 기록한 글들의 집성이다. 따라서 책장을 넘기는 일은 한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는 동시에 우리 사회가 지나온 시간의 여러 장면을 다시 만나는 일이 된다.
1. 수십 년의 기록은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시대의 표정이 된다
책의 첫 글인 ‘거역하면서도 이롭게 함이 충성이니’에서 저자는 조직에서의 충성과 아첨의 차이를 묻는다. 상사의 뜻을 미리 헤아려 무조건 따르는 것이 과연 충성인가. 때로는 윗사람의 뜻을 거슬러서라도 조직 전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충성이 아닐까. 수십 년 전에 던져진 질문이지만 오늘날의 기업과 공공기관, 학교와 여러 조직에도 적용해 생각해볼 만하다.
이것이 이 책을 읽는 중요한 방법이다. 독자는 글이 쓰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오늘의 현실과 비교해볼 수 있다. 중국의 개방을 바라보던 1990년대 초의 시선, 한·중 수교 당시 한반도 정세에 관한 문제의식, 대학 구조조정과 교육 문제, 신용사회와 기업윤리, 시민운동과 사회통합에 관한 고민을 오늘의 현실과 나란히 놓아보는 것이다.
물론 수십 년 전의 국제정세와 통계, 당시의 전망과 판단은 오늘의 현실과 다르다. 저자 역시 책머리에서 대부분의 글이 대학 재임 중 집필되었기에 지금 독자의 시각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히고 글마다 발표 지면과 날짜를 병기했다. 오히려 이 점이 책의 기록적 성격을 선명하게 만든다. 과거의 글을 오늘의 관점에 맞춰 모두 고쳐 쓰는 대신,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지식인이 당시 무엇을 보고 어떤 판단을 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당시에는 거대한 사건이었던 것이 역사 속 한 장면으로 작아지기도 하고, 사소해 보였던 변화가 훗날 거대한 흐름의 시작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답을 말하는 책’이라기보다 ‘시대를 바라보는 한 사람의 시선을 기록한 책’에 가깝다.
2. 경제를 이야기하면서 결국 사람과 윤리를 묻는다
저자의 전공은 무역학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경제는 숫자와 지표에 머물지 않는다. ‘마케팅 사고와 공익단체의 활동’, ‘생명 존중을 기업윤리로 하지 않고는…’, ‘소비절약 시비 일고’, ‘고객 중심의 사고’, ‘커미션과 떡값’, ‘신용사회와 신용카드’, ‘기업인과 재산 출연’, ‘관행을 뿌리칠 용기’ 등의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 경제 문제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다.
기업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경제활동에서 신뢰는 왜 중요한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잘못을 누가 멈출 것인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개인의 윤리는 어디에서 만나는가. 저자는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제도와 기술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경제 역시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신뢰와 책임, 원칙이라는 토대가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반복해서 드러낸다.
무역학자로서 바라본 국제경제의 변화 역시 흥미롭다. 중국의 개방 현장을 둘러본 글에서는 당시 빠르게 변화하던 중국 사회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한국 경제가 직면하게 될 경쟁 환경을 생각한다. 그 글을 오늘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생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동아시아 경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고 있는 독자는 당시의 관찰과 현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경제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읽는 일이다. 제도가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원칙을 잃으면 흔들리고, 조직이 아무리 거대해도 신뢰가 무너지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러 글을 관통한다.
3.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강용찬은 목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교무처장과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따라서 대학과 교육에 관한 글에는 외부 관찰자의 논평과는 다른 현장감이 배어 있다.
‘대학의 명칭에 대한 일고’, ‘교원이 된 강사, 무엇이 나아졌나’, ‘산업형 외풍 만난 대학 구조조정’, ‘교육소비자와 대학 광고’, ‘사립학교 재단 운영의 공공성’, ‘정치 인재, 이렇게 키우자’, ‘사표가 그립다’ 등을 통해 저자는 대학의 본질과 교육자의 책임을 묻는다. 대학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다.
교육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학령인구와 대학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도 변했고 학생과 교수, 대학과 사회의 관계 역시 과거와 같지 않다. 그렇지만 교육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일이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특히 이 책에는 ‘가르치는 사람’ 이전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교육자에 대한 고민이 흐른다. 교육은 교단 위에서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교육자가 어떤 원칙으로 살아가는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책임을 감당하는지 역시 또 하나의 교육이 된다. 저자가 교육과 시민운동, 사회문제를 별개의 영역으로 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4. 도산 안창호와 흥사단,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한 60여 년의 질문
이 책에서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사상적인 부분이 ‘도산과 흥사단, 그리고 나’다. 저자는 대학 1학년 때 도산 안창호가 창립한 흥사단에 입단한 뒤 오랫동안 흥사단 운동에 참여했다. 민족통일운동, 투명사회운동 등 다양한 시민사회 활동에 몸담았고, 그 경험은 저자의 사회관과 인간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빙그레 웃는 얼굴, 훈훈한 마음’, ‘도산의 개혁 정신을 되새기자’, ‘원칙중심의 시민운동이라야 한다’, ‘흥사단과 나’, ‘흥사단에도 개조가 필요하다’, ‘나라 사랑의 전제조건’, ‘흥사단형 사회통합으로 사회갈등을 해소하자’, ‘애기애타 정신과 사회통합’ 등의 글은 단순히 한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도산에게서 발견하려는 것은 오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의 원칙이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에게 어떤 자기성찰이 필요한가. 시민운동은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특히 중요한 것은 저자가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 대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흥사단에도 개조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애정은 무조건적인 찬양과 같지 않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책 첫머리의 ‘거역하면서도 이롭게 함이 충성’이라는 문제의식과도 연결된다.
진정한 충성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며, 진정한 애정 역시 무조건적인 옹호가 아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더 나은 방향을 찾는 것. 그것이 저자가 오랫동안 시민사회의 현장에서 배우고 실천하려 했던 공동체 정신이다.
5. 제주라는 뿌리에서 시작해 세계의 역사 현장으로 나아가다
거대한 시대 담론만으로는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가 있다. 강용찬에게 그곳은 제주다.
‘이 시대에 더욱 돋보이는 조냥정신’, ‘양용은은 위대하다’, ‘고향 단상’, ‘안덕계곡의 재발견’, ‘제주어에 얽힌 사연’, ‘시가 된 사진’에는 앞선 글들과는 또 다른 온기가 흐른다. 고향의 말과 풍경, 사람과 기억을 이야기할 때 저자의 문장은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추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고향 이야기도 결국 시대 이야기와 만난다. 한 지역의 언어와 문화가 사라지는 문제, 고향 공동체의 가치,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풍경과 기억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결국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제주에서 출발한 시선은 마지막 장에서 세계의 역사 현장으로 확장된다. 몽골에서는 칭기스칸의 후예들을 만나고, 연해주에서는 한민족의 흔적을 더듬으며, 오키나와에서는 태평양전쟁의 상흔을 생각한다. 또한 중국 조선족 동포와 우리말의 문제를 살펴보고, 도산 안창호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간다.
저자에게 여행은 유명 관광지를 확인하는 소비적 행위가 아니다. 한 장소가 품고 있는 역사와 사람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여행기는 자연스럽게 역사기행이 되고, 역사기행은 다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돌아보게 한다.
6. 인생의 석양에서 다시 바라본 세월, 그리고 남겨야 할 것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는 책머리에 등장하는 ‘계룡산 석양’이다.
은퇴 후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저자는 어느 날 뒷베란다에서 계룡산 능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능선을 넘어간 석양의 잔광이 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장면에 마음을 빼앗겨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은 사진이 어느덧 1천여 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매일 아름다운 석양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먹구름이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