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백년전까지여성에게자기만의방이필요했다면,
이제우리에게는‘자기만의공원’이필요하지않을까.”
빵을씹듯천천히,공원을걷듯느리게
민낯의나를마주한서른번의새벽
2019년첫소설『무너진다리』를발표한후로,작가는오랫동안자신이쓰고있는가면의개수를셋으로헤아려왔다.글을쓰고각종행사와협업을해내는소설가의가면,십년넘게재활병원에입원중인치매에걸린엄마그리고타지에출장을나가있는아빠와시간을보내야하는자식의가면,마지막으로온전한나로존재해야하는가면.그중소설가와딸로서의나를최우선으로살아가며“나로서의삶”은최하위를넘어아예삭제된정체성이되었다.직업인으로서,가족구성원으로서살아가는것만으로‘나’는다설명된다고,그러니내가나로서살아갈필요가없다고생각해왔지만,그것이오해였음을알게된것은“새벽네시의삶”이시작되면서였다.
자정무렵에쓰러지듯잠들어도어김없이눈이떠지는그시간은,밤도아침도아닌“누구에게도연락이오지않고가면을쓰지않아도되는”고독한적막의시간이다.그때야민낯의텅비어버린‘나’를알아버린작가는그시간에대해,그시간의괴로움에대해말하고싶다고고백하며이야기를시작한다.
나는그시간에대해,새벽네시에대해말하고싶다.하루중온전히나로만존재해야하는시간에대해.그괴로움에대해.-17쪽
우연히찾아온기회로떠나게된독일이지만,그곳에서한달을살기로결심한이유는단순했다.산미있는독일빵을드넓은공원에앉아아주느리게,시간에쫓기지않고씹고싶어서.그렇게도착한뮌헨에는뉴욕의센트럴파크나런던의하이드파크보다도넓다는영국정원을비롯해크고작은공원들이펼쳐져있었다.처음에는만만히보고이런건익숙하다는자신감으로공원을달리기시작했지만,인위적으로조성된녹지가아니라자연우림속에겨우길만뚫어놓은듯한그공원은달리고달려도끝나지않았다.그러다헤드폰배터리가꺼진어느날,처음으로노래없이그공원을걷게된다.
언어도통하지않고자신을아는사람도없는도시에서완벽한이방인이된작가는그제야풀소리와새소리,물소리사이에섞여드는“내안의목소리”를무시하지않게된다.벤치에앉아나뭇잎그림자가드리운자신의손과다리를내려다보며,이곳에서자신은소설가도딸도아닌“그냥사람”이라는시시하고도당연한사실을서른번의날동안곱씹는다.씹을수록고소한맛이퍼지는딱딱한독일빵처럼,“민낯의나”로도존재할수있다는사실은느슨하고도개운한자유로다가왔다.
소설가도,딸도아닌‘한명’혹은‘한개’가되어이곳에있는나를느낀다.
나는나를볼수없어서느낀다.저들이저기에있듯이이곳에있는나를.-70쪽
매일한다는건,좋아한다는뜻이다
그러니까이제나도좋아한다고말해도되지않을까
작가가서서히가면의무게를벗어내기시작한그공원의끝자락,그물이다해진골대에매일같이공을던지는소녀가있다.실패해도땀닦을틈없이다시공을잡는소녀는작가가“가장좋아하는얼굴을하고”있다.온마음을다해집중할때신경하나하나가쏠려일그러지는얼굴,원고를쓰다문득거울로마주치는자신의얼굴과닮은표정이다.
그리고문득그소녀에게서오랫동안스스로에게허락하지못했던문장하나를되찾는다.“나는몸쓰는걸좋아한다.”여덟살때,일등을못할것같아아예출전을포기해버렸던리듬체조대회이후,늘몸의증명을요구받는것같아입밖에내지못했던바로그문장이다.
비록실패할지라도무언가를좋아한다고말할수있는용기와어떠한수식어없이그저나자신으로존재해도괜찮다는믿음.작가는그것이이방인으로머물기에도,공동체의일원으로섞이기에도애매했던한달이라는시간덕분이었다고말한다.그애매함덕분에태어나처음으로“나만잘하면되는,나만행복하면되는”일인팀을경험한거라고.
한달이라는기한이거의다되어갈무렵,작가는같은레지던스에머물던기타리스트의네살배기딸은제와놀이터에서하루를보낸다.그반짝이는순간을마주하며자신이기억하지못하는그수많은시간이몸에새겨져지금의자신을,그리고자신이쓰는가면을함께만들었을거라생각한다.그러자가면은더이상답답하게느껴지지않는다.그리고“내얼굴을실컷봤으니이제보고싶은사람들의얼굴”을보러가기로다시결심한다.
이곳에서머무는동안나는민낯의나를,그렇게오래도록내얼굴을본것은처음이었으니까나는이제내가어떻게생겼는지잘안다.더는한국의새벽네시도두렵지않다.아무런미련도,아쉬움도없이곧장한국으로,내가사랑하는이들이있는곳으로다시간다.-108쪽
손으로물들인수채화로만나는
우리각자의새벽네시
『빵,공원,농구하는소녀』는화려한관광도시가아니라무심하고퉁명스러운뮌헨이라는낯선도시에서쓰인지극히개인적인기록이지만,동시에직업인도딸도엄마도아닌그어떤역할로도다설명되지않는“나”를오래도록잃어버린채살아가는우리에게건네는응원이기도하다.이주향작가의그림은이새벽네시의시간과공원의공기그리고매일같은자리에서공을던지던소녀의얼굴을섬세하게붙잡아보여주며,독자를자신만의‘새벽네시’의시간으로이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