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례의 추억 (권상진 산문집)

지례의 추억 (권상진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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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는 산고개가 험해봤자 내 든든한 다리로 몇 시간만 부지런히 걸으면 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해 지기 전에는 친구 집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자 장복순이 말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어떻게 마중도 안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그 험한 곳에 친구를 초대해놓고.”
장복순은 진정 내가 걱정스러운지 내 친구인 규하를 나무라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친구를 변명했다.
“그 친구는 내가 오늘 간다는 건 모를 거예요. 방학 때 아무 때나 오라고 했거든요.”
요즘은 집집마다 전화가 개통돼 있지만 당시에는 전화가 없었다. 편지라도 보내 내가 언제쯤 방문할 것이라고 알렸으면 좋았겠지만, 당시 나로서는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장복순에게 동재를 넘어가는 길을 자세히 전해 듣고 식당에서 일어났을 때는 시간은 이미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점심 잘 먹었습니다.또 만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친구 집 가는 길을 가르쳐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왠지 아쉬웠지만 나는 그들과 손을 흔들며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신작로를 한 오 분 가량 걸었을까, 이윽고 왼편으로 난 황톳길로 접어들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말한 로 넓은 하천이 나타났다. 하천변에는 고운 모래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하천 가운데는 거의 허벅지까지 물이 차오를만큼 깊이도 만만찮았다. 나는 바지를 한껏 걷어 올리고 무거운 가방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건넜다. 그리고는 하천 둑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오른쪽으로 나지막한 야산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 산을 돌자마자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랐던 나는 산과 강과 들, 그리고 길과 계곡이 한데 어우러진, 생생한 자연과 처음으로 마주친 것이었다. 그곳은 정말 정신이 번쩍 뜨일 만큼 신선한 풍광이었다. 공기조차 달콤하고 싱그러웠다. 나는 그 경이로운 풍광에 도취해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걸었다. 구불구불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면경처럼 맑았고, 계곡 군데군데에는 바위들이 그곳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도열해 있었다. 산기슭의 넓은 밭에는 수박이 주주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난 누런 흙길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그림 속의 한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내가 그림 속을 꿈꾸듯이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학생!”
돌아보니 저 멀리서 아까 헤어진 그 여학생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반갑고 놀라워서 발길을 멈추고 그녀들을 기다렸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숨을 헐떡이며 따라온 그녀들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학생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이 딱하고 걱정이 되어서 따라왔어요. 초행길이라 힘들 것 같아서 길 안내 해주려고요.”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장복순이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학생이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기라도 할까 봐서요. 우리가 누나잖아요.”
키 큰 여학생도 그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기쁘고 고마웠다. 안 그래도 어떻게 길을 잘 찾을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그런 근심이 금세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 길은 인적이 드물어 산짐승이 자주 나타나거든요.
우선 중간 지점인 우리 고모부의 친척 집까지라도 바래주고 갈게요.”
장복순이 그렇게 말했다. 내 발걸음은 더 경쾌하고 즐거워졌다. 우리는 모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맘껏 떠들고 웃으면서 춤추듯이 걸었다. 길가의 풀꽃을 꺾어서 계곡물에 배처럼 띄우기도 했다. 키 큰 여학생의 조카아이도 좋은지 마냥 퐁퐁 뛰면서 헤헤거렸다. 나를 바래다주겠다면서 빠른 걸음으로 쫓아 온 탓인지 그녀들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햅번 스타일 앞머리도 땀으로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시원한 계곡 옆을 지날 때 키 큰 여학생이 걸음을 멈추더니 장복순에게 말했다.
“안 되겠다.우리 여기서 등물이라도 좀 하고 가자.”
금방 의기투합된 그녀들은 아이를 데리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내겐‘저기 나무 뒤에 가서 쉬라’고 하고서 말이다. 얼마 후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들끼리 등물을 하면서 시원하다고 웃고 떠드는 소리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에 앉아서 혹시 누가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닌가 하고 살피고 있었다. 그때 까르르 하는 그녀들의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하얀 살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다. 나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심장이 이유 없이 쿵쿵거렸다. 잠시 후 물기가 묻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그녀들이 왔다. 키 큰 여학생이 내게 말했다.
“학생, 학생도 더운데 등물을 하고 갑시다. 물이 참 시원해요.”
갑작스런 제안에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어서 장복순도 나를 재촉했다.
p35~40 「다시 지례를 찾으며」 일부분
저자

권상진

1940년대구출생
대구상업고등학교졸업
고려대학교경영대경영학과졸업
계명대학교대학원경영학과졸업
(주)고려주택회장역임
한국BBS대구연맹명예회장
매일신문시니어문학상수상
대통령표창장수령
국민포장수령

목차

책머리에

제1부다시지례를찾으며
다시지례를찾으며
지례의추억

제2부석양을바라보며
거울을보면서
방심
봄날은간다
산과벗
석양을바라보며
청소년은우리의미래다
시간부자
우리집
진정한의사
폭염과효도
흉터

제3부내아내
동행
뒷모습
내아내은희

출판사 서평

경북김천에는지례라는산골면이있다.오늘날에는흑돼지로유명하지만대덕산과수도산,가야산과민주지산으로둘러싸여아직도오지중의오지로손꼽히는곳이다.권상진산문집《지례의추억》은60여년전저자가이곳을찾으며있었던추억을끄집어내,빛바래지않은생생한모습으로들려준다.글을읽으면마치황순원의단편소설<소나기>의현장에서있는느낌을준다.
표제작인<지례의추억>은60여년전인저자의고등학교시절의이야기다.여름방학을맞아지례면의산골동네에서도회지로유학온친구의고향집을찾아가면서,우연히동행하게된여고생과의애틋한감정을파노라마처럼펼쳐진자연을배경으로보여준다.
“구불구불한계곡에서흘러내리는물은면경처럼맑았고,계곡군데군데에는바위들이그곳을지키는파수꾼처럼도열해있었다.산기슭의넓은밭에는수박이주렁주렁매달려있고,그사이로난누런흙길은부드러운곡선으로끝없이이어져있었다.마치그림속의한풍경을보는것같았다.‘
저자가기억하고있는지례의60여년전의풍경이다.저자는사춘기시절의아름다운풍경을바탕으로,한소녀와의추억을백발이된나이에그림처럼다시그려냈다.저자의추억을불러내는문장속에는화려한미사여구가필요치않다.아름다운산골풍경과그곳에사는사람들,특히여러상황속에서깊고높은계곡과산등성이를오르며쏟아낸아름답고순수한감정만으로도충분히독자를감동시킨다.
60여년이지난지금까지저자의마음속에자리잡고있던것이정화되어다시나왔기때문이다.어떤사진이나그림도저자의마음을다표현할수는없다.담담히뱉어내는그의글속에는우리가잊고지내던가슴시리도록그리운옛추억을,어떤사진이나그림보다더생생하고정밀하게담아내고있다.독자는글을읽으며아름다운배경의영화를머릿속에서스스로만들고,주인공이된다.
추억속에서의그산길과소녀는여든의저자가슴속에서여전히십대의추억으로머물러있다.아름다운이추억은저자혼자만의것이아니다.현대의물질문명속에서살아가는우리모두가잊고지냈던순정에,다시불을지핀것이다.
책은3부로구성되어있다.당시의추억을그대로적은지례의추억과,60여년이지나백발의나이에추억속의현장을찾은‘다시지례를찾아서’,저자가평생을살면서불우한사람들,특히청소년을위해살아온이야기등을담은‘석양을바라보며’,그리고사업을하는남편을위해일생을뒷바라지한아내에대한고마움과사랑을담담하게풀어낸‘내아내’로구성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