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거창하거나대단한것이아니다.
우리들의이야기이다.
과거는먼저온오늘이요
조상은앞서산우리들이다.”
우리역사는씨줄이되는왕조사,날줄이되는씨족사로단단하고곱게짜여있다.역사애호가이자역사연구가이도국작가는역사의한축인씨족의중심,종가를‘조선의얼굴’이라말한다.왕조멸망과일제강점기를거치면서번화한한양과그인근에거주하던경화사족(京華士族)은급격히사라졌지만세거지중심으로농토를넓히며깊게뿌리내린영남재지사족(在地士族)은굳건히살아남았다.이처럼수백년이어온영남종가는조선의얼굴이라칭하기에부족함이없다.
조선사를연구한하버드대학교에드워드와그너(1924~2001)교수는우리나라반촌지역을‘초승달모양의양반지대’라표현했다.세계사에서초승달지대(FertileCrescent)는고대문명의발상지였다.책에서는이도국역사연구가의시선을따라초승달지대의시작점인영남을돌아본다.실록과문집을토대로영남지방의인물,문중,역사,풍습이야기를풀어가며씨족의아름다움을보여준다.
‘조선의르네상스’라불린영·정조75년치세는영남선비에게가장가혹한세월이었다.갑술환국이후영남선비는과거급제하더라도조정진출이어려워향리에머물기일쑤였다.그시대의아픔은영남인재등용을청하는장계나실록에실린경상감사의귀임보고,영남선비문집에나마역사의조각으로남아있다.후손에게대대로전해내려온조선선비들의삶과사랑,눈물과미움은역사가결국사람이야기임을증명한다.
책속에서
숙종20년(1694년)은영남남인이마지막으로피흘린해였다.갑술환국이라일컫는그해이후백년동안영남인은미천한시골선비로취급받으며과거급제하여도당상관보임은하늘의별따기였고참상(參上,3품에서6품)조차되기어려웠다.
삼십년뒤이인좌난(1728년)에반역향으로낙인찍혀영남양반가문대부분은중앙진출의꿈을버리고농토에기반을둔재지(在地)사족이되어향촌을지켰다.정조가등극하고십여년이지난1788년채제공이우의정되어국정을이끌자,정조는영남인을달래고우군세력으로키우기위해경주숭덕전과도산·옥산서원에서치제(致祭,왕의제사)를지내고도산서원에서영남별시(특별과거)를열었다.
-p.68,‘조선선비의거룩한분노,만인소’중에서
1762년영조38년윤오월13일,영조는대리청정하고있는왕세자이자자신의아들인사도세자를7월염천에뒤주에가두어굶어죽게하였다.이사건이조선오백년왕가에서가장비극적인사건임오화변(禍變)이다.이참혹한현장을처음부터목격한영남선비가있었는데세자에게『역경』을가르친시강원관리권정침이다.화변의그날에세자를비호하다가영조의노여움으로형장에끌려갔고특지로풀려나낙향했다.하늘보기부끄러워세상과담을쌓고그날의일을기록으로남겼다.『서연일기』이다.
-p.74,‘영남선비는왜사도세자를위해목숨을던졌는가’중에서
실록을보관하기위해고려시대부터사고(史庫)를지었는데내사고와외사고가있었다.내사고는고려·조선모두궁궐에두었고고려시대외사고는절집에두었다.1439년(세종21년)사헌부는시무에관한개선책을올리면서고려사고가충주개천사에만있어널리간직하지못한채병화를만나옛문적이적고고려사적또한잃은것이많다며명산에사고를지어분산토록건의하자세종은이를받아들였다.
세종은남쪽삼도(三道)에외사고하나씩,기존충주사고외에전라도전주,경상도성주에추가로짓고1445년태조·정종·태종실록을등사하여보관했다.이로써왕조는4사고체제를갖추게됐고중종때성주사고가불탔을적에도바로바로복원이됐으며임진병화로춘추관·성주·충주사고가불탔지만전주사고가남아역시복원됐다.
-p.108,‘위대한유산왕조실록과다섯사고’중에서
벽진이씨노촌이약동(1416∼1493)은김천양천동하로마을출신으로1470년성종1년에55세나이로제주목사에부임했다.당시제주도에는관청주도로국태민안을비는한라산산신제를정상백록담에서봉행했는데그때마다적설과한풍으로얼어죽는사람이많았다.노촌은한라산중턱에있는소산오름곰솔밭에산천단을만들어산신제를지내도록했다.그이후부터동사하는백성이없어칭송이자자했다.
(중략)노촌이임기를마치고제주도를떠날때재임중사용한기물은모두관아에두었고손에든말채찍조차관물(官物)이라는이유로읍성문루에걸어두었다.이일은후임목사들에게아름다운경계(警戒)가되었으며,세월이흘러채찍이없어진후에는백성들이바위에채찍모양을새겨이를기렸는데이바위를괘편암(掛鞭岩)이라불렀다.
그리고제주도를떠날때배가갑작스러운풍랑으로뒤집힐위험에처하자노촌은“나의행장에떳떳지못한물건은하나도없는데누가나를속이고욕되게하여하늘이나에게벌을내리려하는것이아닌가?”하며제주군교들이전별선물로몰래실은갑옷을찾아내바다에던졌다.이것이유명한투갑연(投甲淵)고사로다산정약용의『목민심서』에실려있다.
-p.152,‘제주의전설이된영남목민관’중에서
역사는사람의이야기이다.신의이야기인신화와달리역사속에는인간심성이알알이박혀있다.임금에게미움을받으면유배를갔고집안간원한이맺히면왕래를끊고담을쌓았다.이를세혐(世嫌)이라하여기록으로남겨후손에게전했다.
-p.185,‘선비사회의유배와사랑’중에서
고려·조선의왕들은중국황제를따라한다고걸핏하면신하를귀양보냈다.『조선왕조실록』에귀양이란단어가5,000여회,유배가3,200여회가나온다.유배지는수도를기준으로멀면멀수록급이높았다.삼천리유배지란말까지생겼다.제주도대정이가장멀었는데추사김정희와동계정온이귀양살이를했다.
경상도역시수도에서멀리떨어진변방이므로많은선비들이유배를왔다.정몽주가언양,윤선도가기장,정약용은장기,송시열은장기와거제,권근과오시복이영해,이색이평해,이극균이구미,민무질이태종때대구로유배를왔다.(중략)선비들은유배지에서제자를가르쳤다.정약용의강진제자들은다산학단을만들어지역사회에문풍을일으켰다.포항장기로3년7개월간유배됐던송시열의영향으로장기에서원이7개나생겼고노론세가강했다.청도선비박태고는송시열을찾아거제도까지가서제자가되었다.
-p.185,‘선비사회의유배와사랑’중에서
당나라시인왕유의‘객사청청류색신(客舍靑靑쐍色新)’한시구절이우리에게익숙한탓인지객사를숙박시설로인식하고안내문에도그렇게되어있다.그러나고려·조선왕조객사는숙박시설이아니다.숙박은고을에별도지어진객관이나역참을이용했다.고려사에객사는관아,객관은숙박시설로분명하게구별돼있고『조선왕조실록』에도객사는전패와국왕관련이야기만나오고사신이나관리숙소로객관이수백번넘게언급된다.
먼길을온사신이나관리가하룻밤을유숙하며한잔술로여독을풀어야하는데고을수령이직을걸고관리하는,국왕전패가모셔진건물에서여장을풀고한잔하는것은현실적으로맞지않다.사료를검증하지않고한자뜻풀이로용어를혼용한듯하다.물론작은고을에서는객사의좌·우익헌을잠시객관으로사용하기도했겠지만기단이높고신전처럼웅장하게지은객사와아늑하고포근한잠자리위주의객관을동일시하는것은맞지않다.
-p.225,‘고을의조건,객사관아향교’중에서
호남은음식,서울은출사(出仕),영남은집짓기라했다.호남은물산이풍부해음식문화가발달했고서울사족은관리가되어조정에들어가는것이평생목표였고영남사족은집짓기로일생을보냈다는이야기이다.경상도는한옥의고을이다.문화재로등록된한옥의65%가경상도에있다.그러기에동성마을의얼굴인종택,유생의사립학교인서원,묘제를위한공간재실,선비쉼터인정자가유별나게많다.영남사족은무엇때문에집짓기로일생을보냈는가?
-p.230,‘사족士族의집,종택·서원·사우·재실·정자’중에서
조선은씨족사회이다.풍수에따라문호를연동성마을이몇개모여고을을이루었고동성마을에는어김없이문중종택이번듯하게세워져있었다.게다가경상도는성리학의종법(宗法)이유난히강해종가위세가대단했고유력문중종손은경상감사와바꾸지않는다는말까지생겼다.
조선후기중앙진출이사실상막혀버린영남사족은종가를중심으로문중결속만이자신을지켜준다는것을알았고보종과조상숭배는신앙처럼강했다.종가가번듯해야문중이빛난다고여겼고개인의현달은문중의자랑이기도했다.
-p.231,‘사족士族의집,종택·서원·사우·재실·정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