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낙의 병풍도

어느 아낙의 병풍도

$12.00
Description
시를 쓰기가 무미한 나이가 되었다
한 문장 쓰기가 이토록 건조하다니
허정분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어느 아낙의 병풍도』는 시인의 곡절했던 70년 생애를 병풍에 그려진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시집에서는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아온 농부로서의 삶, 문중 종부로서의 역할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의 이야기를 흙냄새 물씬 풍기는 독백으로 들려준다. 지나온 세월의 파편, 시나브로 잊히는 그 기억은 시인의 삶을 끌고 가는 힘이다. 시와 삶, 인생에 대한 허정분 시인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저자

허정분

저자:허정분
강원도홍천에서태어났다.지은책으로는시집『바람이해독한세상의연대기』,『아기별과할미꽃』,『울음소리가희망이다』,『우리집마당은누가주인일까』,『벌열미사람들』,『어느아낙의병풍도』가있으며,산문집『왜불러』,『그곳에그리움이있었다』등이있다.

목차


1부_꽃이름으로불러주고싶다

꽃이름으로불러주고싶다/운전면허증/다시그계절병/구월이오는소리/장어는힘이세다/두근두근인생/동물의왕국/장롱/고양이카페/트로트전성시대/설날아침/좋은시/전쟁의명분/백인대연가/그아이의돈삼천원/아기별이웃고살라네/시래기/똥강아지

2부_사당이있는집

쥐며느리/지하철경로석에서/발자국/고해성사/장날/오늘하루사이/카레를끓이며/풍경의일부/중고품노래방/아,이태원/八旬의육필자서전/쭈그렁노파/벌레/그겨울에/잠못이루는밤/사당이있는집/마카오/잘있어라나는간다

3부_별자리에너를누인다

검불을태우며/눈꽃이피던날/동지/별자리에너를누인다/반세기/오라버니/꿈풀이/1초의찰나/겨울밤/이또한지나가리라/서행구간/우리집풍경/민들레/거름을펴면서/마을방송

4부_사라지는것에대하여

요양보호사그녀/암탉/목욕탕에서/행운목/소설쓰는여자/나를파도에잠재우라/초여름/내이름의한계령/영역싸움/사라지는것에대하여/재스민꽃/눈물은전염된다/무색/마늘밭/어느일가의파산/큰산소/말한마디

작가의산문/시산문집『그곳에그리움이있었다』를펴낸후

출판사 서평

풀수없는응어리같은흔적
삶을끌고가는힘

허정분시인의첫시집『벌열미사람들』이후20여년이흘렀다.그간시인에게시란풀수없는응어리같은흔적을기록하는행위이자쉼의망중한이었다.내려놓지못하는집착을기꺼이끌어안은시인은시나브로잊히는기억을삶을끌고가는원동력으로삼았다.그렇게쓴시를모아여섯번째시집『어느아낙의병풍도』를출간했다.

시집은60여편의시가‘꽃이름으로불러주고싶다’,‘사당이있는집’,‘별자리에너를누인다’,‘사라지는것에대하여’4부로나뉘어있으며시산문집『그곳에그리움이있었다』를펴낸후의소회를담은작가의산문한편이실려있다.시인은역사를시로기록했다.600년을이어온문중마을의풍속도(「사당이있는집」,「반세기」,「큰산소」,「백인대연가」등)보다시선을사로잡는시는일상에서지나온순간,지극히개인적인역사를기록한시다.

태생부터가난과운명을같이한기억,흙위에서호미들고머문시간,아픈혈연들의상처와어린손녀가하늘의아기별이되어이별한설움까지삶의희로애락이그대로담겨가슴저릿하다가도유쾌하게와닿는다.첫시집을펴낸지20여년만에여섯번째시집을펴낸시인은여전히문학이란단어만들어도마음이울렁거린다고말한다.『어느아낙의병풍도』는칠십년한생애,그세월의파편을시에온전히담아낼줄아는어느아낙의흔적이다.

책속에서

다어디로사라져갈까.
시나브로잊히는기억들이삶을끌고가는힘이다.
대신노년이란삶의과제가따라왔다.
당연한그세월의파편들이내몸의중심이고중독이란걸알았다.

첫시집『벌열미사람들』이후여섯번째시집『어느아낙의병풍도』를문집의이력에넣는다.

내가심은작은텃밭의푸른생들앞에호미를들고머무는시간은움직이는중독이다.

풀수없는응어리같은흔적을기록에남기는행위는쉼의망중한이다.
내려놓지못하는집착,기꺼이끌어안고가겠다.
---「머리말」중에서

설명절앞둔대목장날장터에편점포마다손님끌기바쁘다손끝이시린추위예전의호황은별나라이야기라고쓴웃음파는몇몇장꾼은모닥불앞에모여커피를마시고꽝꽝언동태를흥정하는늙은부부이웃만나짜장면집으로발길을옮긴다

삼대가모이는명절입맛다른어린놈들먹거리짊어진가방메고기다리는마을버스,단골손님마다주름진훈장들을온몸에달고있다젊은시절우리집구멍가게술꾼이던주태백아저씨십수년세월에이름잊은농투성이남정네건네는눈인사에취기가엉겨버스기사와말대작을한다

-이차우리집가는찬가,
-글쎄,우리집이어디요,
-아만뜰봇도랑옆이여,
-아저씨만뜰은다른차요,
-어라만뜰을안가믄서왜날태웠어,
-아따아저씨가탔지않았소,
-예끼,차비받아묵고뭔뚱딴지소리여,
-딴지는아저씨가걸면서술은얼마나자셨소,
-자네가술사줬나막걸리두병이면만땅이여,

빨간딸기코로술트림횡설수설맞장구치던기사양반출발도안한버스시동끄고

-아저씨집에다왔으니내리소,
-이사람만뜰말고세월리에내려주게,
-아니만뜰사람이세월리는왜가소,
-아벌써집에가뭐하노술한잔더묵어야제,
-아저씨그럼내리소,차비는안받을테니,
-예끼,다왔다고,그럼한잔더하고걸어가지뭐,

주당어르신구름속에숨는햇살붙잡고쓰는갈之자걸음이충청도집문을여는대목장날
---p.50「장날」중에서

초저녁부터청한잠이감감무소식인불면의밤무심이약이고삶이라고스스로위로해도기어이수면제한알을처방하는새벽녘,옆집농가의수탉이울고약기운에심신이서서히뭉개지는나른함과일상을깨우는습관이줄다리기하는비몽사몽의행간이다

문밖은지금정월의한파가눈보라를몰고오는대한무렵,유전으로물려받은저기압의기상도가내몸을휩쓴다밥벌이로나간여덟시간품값의최저임금,그일도볕좋은날의마른장마처럼드물고잠자리즐거운상상을깨는불안은가슴속어느구석에붙어있던흔적인가섬망같은환각이세포들을깨운다

이런일한두해를넘겨익숙한불면인데도속절없이오늘을보내야할시간의그림자들이미리와버려굽은곡선으로누운몸의피로눈꺼풀에달라붙어곡소리를낸다

한생의노동자가짊어진살아갈괴로움을어디다호소해야면죄부를받을까길고긴하루가시나브로졸기시작한다
---p.66「잠못이루는밤」중에서

아우야너지금어딜가니?
거기가어디라고함부로가는거냐?
아직네가가기엔멀고이른길이란다
넋두리가곡이되고후회가눈물이되던
막냇동생영정이놓인장례식장
사진속환한얼굴이누이를반기는데
이게뭔변고일까
작년까지무쇠팔다리로져나른공사장
흙먼지가폐암말기부고장이었구나

한조상의혈연을죽어서나보는아우야
사촌들도오고벗들이오고
네가사랑하던아들도
큰형과누이도왔다
머나먼하늘과땅교차로에서
꺼이꺼이호곡으로너를부르며
서로지녔던기억과추억을꺼내는데

착해서바보같던아우가
법없이도살던내아우가
살아서못가본외진길을간다네
복사꽃핀언덕진달래핀산길에서
누이기다리겠다고
만장앞세우고훠이훠이
하늘로가는구나
---p.76「별자리에너를누인다」중에서

시를쓰기가무미한나이가되었다
한문장쓰기가이토록건조하다니
시인이란호칭이무색할지경이다

서너달동안시퍼렇게너울거리던무밭이
된서리두어번에말랑하게풀이죽었다
밭이랑사이사이꽃대를밀어올리던진득찰도
누렇게시들어간다

나와무와진득찰의사이가건너가는시간
곧잊히는시절이올것이다
---p.112「무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