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은 늙지 않는다 (박지영 시집)

간절함은 늙지 않는다 (박지영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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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언어, 기호, 그리고 우연적인 마주침
1992년 《심상》으로 등단 후 시와 평론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고 있는 박지영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간절함은 늙지 않는다』가 시인동네 시인선 175로 출간되었다. 박지영의 시는 일상적 사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화한다.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 시적 대상을 정서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장면들,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 자연과의 관계, 기후위기나 코로나 팬데믹 같은 현실적 문제들 등 다양한 주제들이 ‘시집’이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저자

박지영

시인

경북의성에서태어나이화여대불어교육과를졸업했다.1992년《심상》으로등단후계명대대학원문예창작학과박사과정을수료했다.시집으로『서랍속의여자』『귀갑문유리컵』『검은맛』『사적인너무나사적인순간들』『눈빛』(사진시집)과평론집『욕망의꼬리는길다』,산문집『꿈이보내온편지』가있다.〈대구문학상〉〈금복문화상〉(문학부문)을수상했다.

목차

제1부

부사ㆍ13/밤까먹는밤ㆍ14/속수무책ㆍ16/고요를품어주는말ㆍ18/나방의문ㆍ19/봉쇄ㆍ20/그냥온것이아니다ㆍ22/너의울음을날려보냈다ㆍ24/말할수없네ㆍ25/눈감아도너무멀다ㆍ26/세상이변했다ㆍ28/날씨의맛ㆍ30/저꽃어쩌나ㆍ31/나와닮은그녀에게ㆍ32/구월의책ㆍ34/단단한벽ㆍ36

제2부

정신분석세미나ㆍ39/테이블ㆍ40/저너머에서빛이ㆍ42/구르는풀ㆍ44/흔적ㆍ45/케세라세라ㆍ46/눈에어른거리는거기ㆍ48/그게다나였던가ㆍ50/운명은벼락처럼ㆍ51/바람딸ㆍ52/정로환(征露丸)ㆍ54/더슬픈것ㆍ56/달콤한감기ㆍ57/사막일기ㆍ58/주름의힘ㆍ60

제3부

튤립나무라불러도튤립이되는건아니야ㆍ63/미끼ㆍ64/쓴맛의정체ㆍ66/무언가놓쳤다ㆍ67/실종사건ㆍ68/노래가목걸이라면ㆍ70/나는딸의형상을한아들이었을까요ㆍ71/소리의상(相)ㆍ72/가만히우네ㆍ74/오늘ㆍ75/자각몽ㆍ76/아침ㆍ78/아가씨라는말ㆍ79/문이라는기호ㆍ80/매일죽는여자ㆍ82/절망을보게된대가ㆍ83/연민ㆍ84

제4부

금서ㆍ87/심각한이야기ㆍ88/이를테면고양이ㆍ90/다보았다고우긴다ㆍ91/내삶을묘지위에세우고싶지않았지만ㆍ92/여우비ㆍ94/큰잔치ㆍ95/그말때문에ㆍ96/신들의골짜기ㆍ98/왕을기다리며ㆍ99/그리운토리노ㆍ100/어둠을보고짖다ㆍ102/하지ㆍ103/간절함은늙지않는다ㆍ104/자연의역습ㆍ106/나는늘나인데ㆍ108

해설고봉준(문학평론가)ㆍ109

출판사 서평

일상은수많은마주침의순간들로채워진패치워크(patchwork)이다.이마주침의사건들은대개우연의지배를받는다.우연히듣게된소리나음악에귀를기울이는순간,예상치못한사람과마주치는순간,어떤장면이나풍경에시선을사로잡히는순간,무심코읽은문장에마음을빼앗겨한동안넋을놓게되는순간…….시인은우연의시간과순간의강렬함을감각적인사유로연결하고,내부에그강렬함의흔적을간직한감각적존재를창조해냄으로써일상의시간을예술로바꿔낸다.그런데이창조적사건에는종종두가지오해가따라다닌다.하나는이우연한마주침이온전히시인에의해주도되는사건이라는오해이고,다른하나는그마주침이왜곡이나잔여없이언어화될수있다는그릇된믿음이다.이우연한마주침의대부분은동일한질서의반복으로구성된상식의세계를뒤흔들면서나타나는,혹은우리에게도래하는타자적인것과의조우로시작된다.따라서이마주침에서시인의역할/능력은절반정도에불과하다.이경우시인에게요청되는능력은이질적인것,낯선것의출현에대해외면하지않는것,상식이라는이름의익숙함을보존하기위해타자적인것의출현을부정하는것에서벗어나는개방성이다.그런데이러한마주침은경험의가능조건일뿐그자체가시(詩)는아니다.시인에게는이마주침의사건,그강렬함을언어안에담는작업이요구된다.하지만이마주침의대부분은그자체로강렬한정서적만남일뿐특정한내용으로경험되지않는다.이는시에서의언어또한강렬한정서적사건이발생한흔적일뿐마주침의실체에대한기술이아님을의미한다.시가시인의배타적인독점물이아니라독자의읽는행위를통해완성되는이유,특히그읽기가문해력이아닌행간읽기라는정서적독법을요구하는이유가바로여기에있다.
박지영의시는일상적사건들을다양한방식으로언어화한다.언어와글쓰기에대한자의식,시적대상을정서적인방식으로재해석한장면들,삶에대한성찰적태도,자연과의관계,기후위기나코로나팬데믹같은현실적문제들등다양한주제들이‘시집’이라는하나의세계안에서공존하고있다.이주제들가운데단연두드러지는것은언어와글쓰기에대한자의식이다.

종이위에강이라고쓰자
물고기한마리가힘차게물살을가르고
갑자기물위로솟구쳐오른다
고맙다는듯꼬리를까닥이더니
다시물속으로들어가버린다

다시수면은조용해지고
종이위에서숨죽이고있던글자들이
순서를기다리다가
답답한지고개를들어올리다
낚시꾼에게걸려든다

종이위에서도생사가갈린다
‘아’라고써야할것을‘어’라고쓰는바람에
다른생각이올라와잡은고기놓아줄때도있다
종이위에강은여전히소리없이흐른다

앗!물고기가찌를물었다
손맛이짜릿하다

이맛을알아야진짜인생을아는거다
-「미끼」전문

시집의첫페이지에배치된동음이의어(homonym)를활용한작품들은이‘시집=세계’에대한이정표로읽어도좋을듯하다.품사의하나인‘부사(副詞)’와사과의특정한품종(品種)인‘부사(富士,ふじ)’의동음관계를이용한「부사」,‘밤(night)’과‘밤[栗]’의동음관계를이용한「밤까먹는밤」이그것들이다.시인은전자에서사과상자에갇혀말라가는사과의형상을“형용사는버리고/동사로누워있는부사”(「부사」)라고표현함으로써언어적동음관계이상의의미를발견해내고있고,후자에서는‘밤’의의미를모호하게만듦으로써새로운의미형성의가능성을실험하고있다.이사례들은단순한유희이상의의미를지니고있다.알다시피시는‘언어’예술이다.하지만이때의‘언어’는우리가살아가는현실의근간,즉정신분석학자들이말하는상징적질서로서의언어와같은것이아니다.상징질서,또는커뮤니케이션의수단인기능적·도구적언어가문법과의미를중심으로작동한다면,시는언어를의미보다는정서,문법보다는욕망의질서에따라사용하는예외적방식의일종이다.현대시에서동음이의어,언어유희(pun)등은‘유희’라는단순한기능에한정되지않는다.그것은특정한기호의의미를중층화함으로써언어에대한익숙한감각에충격을가하고,이질적인의미를충돌시킴으로써진술자체를불확정적인것으로경험하게만들며,그리하여자동화된감각과사고의과정을탈구시킴으로써인지과정자체를지연시킨다.특히동음이의어는언어기호가의미로환원되지않도록,동시에음성적물질성에근거하여우리의사고를다른세계로도약시킨다는점에서중요한시적장치라고말할수있다.
‘언어’에대한이러한관점은인용시에서도반복된다.1연에서화자는종이위에‘강’이라는글자를적으니물고기한마리가힘차게물살을가르고솟구쳤다가이내물속으로들어가버렸다고쓰고있다.이것은시(詩)가‘언어’의세계에서발생한사건,즉언어적사건이라는의미이다.이때‘강’이라는언어와‘물고기’의출현은동시적이다.시에서언어는현실의사건을뒤늦게언어로표현한것이아니다.문학작품에서세계는발화되는순간탄생한다는점에서시의언어는창조그자체이다.근대미학,특히텍스트주의는이러한발상에기초하여텍스트의안과밖을단절된것으로,그리하여자율적인세계로간주했다.2연에서시인이글쓰기를“종이위에서숨죽이고있던글자들이/순서를기다리다가/답답한지고개를들어올리”는행위로형상화한부분도같은맥락에서이해할수있다.시인에게글을쓰는일은‘종이=백지’에서‘글자’를낚아올리는행위이다.“낚시꾼에게걸려든다”라는표현처럼시인에게있어서‘글’은수면위로고개를내민물고기와그것을낚아챈시인의행동이결합되어탄생하는사건이다.그렇다면왜시인은작품의제목을‘낚시’가아니라‘미끼’라고썼을까?3연은바로이질문에대한대답이다.소쉬르나바르트같은구조언어학자들의주장에따르면인간의발화행위는계열체(Paradigm)와통합체(Syntagma)를조합하는행위이다.여기에서계열체는적절한기호를선택하는것이고,통합체는선택된기호들을연속적으로배열하는문법적인것이다.프랑스의기호학자인롤랑바르트는이러한언어적원리를패션과음식에적용하여‘모드의체계’라는담론을제시하기도했다.이처럼발화행위가계열체와통합체의조합이라면그각각이제대로작동하기위해서는어떤전제가필요하다.그러니까수많은어휘가운데어떤단어를선택하기위해서는이웃하고있는단어가선행되어야한다.시인은선행하는단어를‘미끼’라고부르는데,이것으로인해“‘아’라고써야할것을‘어’라고”잘못쓰는일이발생하기도하고,때로는“다른생각이올라와잡은고기놓아줄때도있”는것이다.
-고봉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