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관계는 오래되었지만 (인은주 시집)

우리의 관계는 오래되었지만 (인은주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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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은유의 숲, 혹은 미장센
2013년 《시조시학》으로 등단한 인은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우리의 관계는 오래되었지만』이 시인동네 시인선 162로 출간되었다. 인은주의 시들은 죽음으로 파편화되었거나 파편화되고 있는 일상에서 시작된다. 인은주의 시는 황량하고 누추한 일상의 남루들을 들여다보며 그 위에 정제된 은유의 그림을 입혀 생명과 죽음의 심장을 드러낸다. 이 시집은 그렇게 만들어진 미장센의 움직이는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

인은주

시인

충남당진에서태어나2013년《시조시학》신인상을수상하며등단했다.시집으로『미안한연애』가있다.

목차

제1부

모르는새ㆍ13/두개의눈ㆍ14/눈사람ㆍ15/존재의사전ㆍ16/물에녹는시간ㆍ18/멍ㆍ19/달그림자ㆍ20/투석(透析)ㆍ22/다가오는저녁ㆍ23/여름연습ㆍ24/CCTVㆍ26/머루ㆍ27/산딸기ㆍ28

제2부

너의장례식ㆍ31/장마ㆍ32/그여름,배롱나무ㆍ33/현상ㆍ34/의존성ㆍ36/어린이날ㆍ37/살구ㆍ38/노인ㆍ40/가을장미ㆍ41/빗금ㆍ42/속담ㆍ44/이석(耳石)ㆍ45/보름달ㆍ46

제3부

안개ㆍ49/동백ㆍ50/사월ㆍ51/늦봄ㆍ52/웃는고양이ㆍ53/탁목ㆍ54/오월ㆍ56/아까운일ㆍ57/콘서트ㆍ58/그녀의수법ㆍ60/편의점에서ㆍ61/이상한야근ㆍ62/바닥ㆍ63/청혼ㆍ64

제4부

생각나무ㆍ67/고양이의언어ㆍ68/빈집ㆍ69/짐승으로ㆍ70/슬픔이여안녕ㆍ72/입양ㆍ73/식구ㆍ74/블루스타임ㆍ75/새벽ㆍ76/상강ㆍ78/연민ㆍ79/참외밭ㆍ80/매미ㆍ81/까마귀ㆍ82

제5부

오후ㆍ85/해안선ㆍ86/마당ㆍ88/산당화피는저녁ㆍ89/배송ㆍ90/개복ㆍ92/암탉의시간ㆍ93/개조심ㆍ94/수덕여관ㆍ95/국경ㆍ96/우화ㆍ98/봄바람ㆍ99/응급실ㆍ100

해설
저두터운은유의숲,혹은미장센/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교수)ㆍ101

출판사 서평

■해설엿보기

이시집에나오는시들의제목은대부분명사형이다.인은주는사물에붙여진낡은이름들을건드려시의종(鐘)을울린다.그녀가낡고관습화된세계를건드릴때,마치요술처럼새로운서사들이튀어나온다.마술사의보자기에서갑자기날아오르는흰비둘기처럼,그녀는클리셰를흔들어새로운것들을쏟아낸다.그녀의은유는이름바꾸기가아니라형태바꾸기(morphing)이다.그녀가낡은이름들을소환할때,그것들은내러티브로바뀐다.그녀는짧은음절의명사들을상징적이야기로바꾼다.그것은영화의미장센같기도하고,소설의클라이맥스같기도하다.그녀가낡은이름의소쿠리에상상력의콩주머니를던질때,무수한이야기의색종이들이쏟아진다.그빛은새로운은유의탄생을보여주는숲같다.그녀의시를읽는것은,호기심을가득품은채,이름만이달린문을열고들어가두터운은유의숲을만나는행위이다.그숲은때로죽음으로무겁고사랑으로숨가쁘지만,흐트러짐이없이단정하다.그는만가지이야기를가능한한짧은서사의상자에담는다.그리하여단아한시의집에큰이야기를울려퍼지게하는것이그녀의장기이다.

딱따구리부리가나무를두드릴때

슬픔은숲에잠겨있다
까마귀한마리가숲을가로질러날아간다
슬픔을목격하려는나무들은자라나기위해목을키운다
밤에서깨어난아침이숲길을걷고있다
두더지가파놓은구멍은밤의흔적으로남아지하와지상을연결하고있다
아침은밤을덮는다
숲은나무를포괄한다
빛과어둠이나무를위협한다
죽어가는나무와죽은나무사이
벌목으로드러난발목들이둥근원을그리고있다
둥글게그려진나무들의기호가슬픔의형식으로숲을잠그고있다

딱따구리가나무를찍고자찍었을때

그것은
예약된슬픔

둥근산을깨트린다
-「탁목」전문

이시의문패는“탁목”이다.문을열기전까지아무도이시의내부에서펼쳐질이야기를예견하지못한다.문을열면나무를두드리는딱따구리의소리가들리고,멀리고요한슬픔의숲위로까마귀가날아가는장면이보인다.이미벌목당한나무들의죽음을내려다보는다른나무들도죽음의선로위에있다.역설적이게도그들은슬픔을바라보기위해자란다.슬픔(죽음)은바로살아남은것들의미래이기때문이다.밤과아침,지상과지하를잇는미장센은이렇게“예약된슬픔”을향해있다.시인의카메라는딱따구리와까마귀와벌목당한나무의발목들이둥글게그려내고있는죽음의기호들을따라간다.파노라마처럼펼쳐진풍경속에울려퍼지는탁목소리는슬픈미래를예기(豫期)하는조용한조종(弔鐘)소리이다.그것은도래할운명의회피불가능한시간을향해째깍째깍울린다.슬픈운명은이렇게고요히,그러나멈추지않고온다.

엄마잃은아이는엄마라고불렀다
툭하면아이는울고그러면또비가왔다
날마다해가뜨기를아이는기다렸다
-「빈집」전문

“빈집”이라는명패를단이집은비어있지않다.그곳에는깨진가정의서사가남아있다.그것은사라진과거일수도있고,(사람이살고있지만)빈집이나다를바없는황량한현재일수도있다.아이는툭하면울고그럴때마다비가추적추적내린다.없는엄마를부르는아이의울음소리가울려퍼지는이“빈집”은어둡고처량한느와르영화의한장면같다.인은주시인은이렇게몇음절안되는낡은보통명사에내러티브의은유를덧씌운다.그녀가펜끝을놀릴때,명사는구절이되고,구절은문장이되며,문장은이야기가된다.그러나그녀의스토리가산문이아닌이유는,그것이기승전결의구조를완전히박살내기때문이다.그녀의서사는압축된한장의컷(cut)이다.그녀는간략하게잘라낸하나의풍경만을보여줌으로써그안에더욱많은이야기를담는다.시의언어가침묵의웅변이라면인은주의시가바로그러하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교수)

■시인의산문

오랫동안나는나의얼굴과대면했다.구겨지고포장된무수한얼굴들,볼것은다보았다.그럼에도불구하고얼굴은아름다움을이야기한다.그래,나는잠깐만이라도아름다운얼굴이되고싶은거였다.

봉숭아꽃잎사이로너를훔쳐보았다.아기고양이가쪼르르달려왔다.나는꺼졌다.나는너의태양이될수없다.우리는서로에게일부일뿐이다.그것으로비극이시작된다면기꺼이받아들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