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다는 말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말이다 (최성규 시집)

보고 싶다는 말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말이다 (최성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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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관계라는 폐허로부터 구원받는 기적으로서의 시 쓰기
2018년 《예술세계》로 등단한 최성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보고 싶다는 말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말이다』가 시인동네 시인선 240으로 출간되었다. 최성규의 시는 인간성에 크나큰 신뢰를 부여하면서 혈연적 유대의 긴밀성을 보여준다. 또한 일견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의 의미를 살펴 그 소중한 가치를 펼쳐 보여준다. 이는 삶의 가장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뿌리가 되는 것이 혈육이자 이웃이고, 삶의 의미는 어떤 초월 상태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그의 성정에서 비롯된다. 최성규의 시는 현대인이 주목해야 할 존재와 대상, 의미가 어디서 찾아지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저자

최성규

전북익산에서태어나경기도용인에살고있다.2018년《예술세계》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으며,시집으로『멸치는죽어서도떼지어산다』가있다.경기노동문화제대상등을수상하였다.〈시언덕〉동인으로활동하고있다.

목차

제1부
있을수없는일ㆍ13/집짓는일ㆍ14/웃는일ㆍ16/잠자는일ㆍ17/의자가하는일ㆍ18/걷는일ㆍ20/봄의일ㆍ21/詩ㆍ22/결정적배설ㆍ23/나의사랑은ㆍ24/고양이ㆍ25/달랑ㆍ26/낮잠ㆍ28/그리움을듣는시간ㆍ29/먼곳에서오는말ㆍ30/틈의속성ㆍ32

제2부
충전ㆍ35/일러두기를일러두지못함ㆍ36/즐겨찾기ㆍ38/정면도(正面圖)ㆍ40/단면도(斷面圖)ㆍ41/그쪽ㆍ42/키보드온더락ㆍ44/복사도(複寫圖)ㆍ46/상세도(詳細圖)ㆍ48/나를데리고간다ㆍ50/배롱에널어둔말ㆍ52/말도안되는말ㆍ54/반생이묶는법ㆍ55/우크라이나ㆍ56/귀의울타리ㆍ58/핵버튼을누르고싶다ㆍ60

제3부
시집의무게ㆍ63/망루ㆍ64/베고니아에게묻다ㆍ66/잘못뽑았다ㆍ68/반죽의두번째의미ㆍ69/엑스맨무상교환서비스ㆍ70/짝ㆍ72/뜸들이기ㆍ74/스파이더맨의일기ㆍ75/특집다큐ㆍ76/마지막세일ㆍ78/원더우먼블루스ㆍ80/잠ㆍ82/이쯤에서ㆍ84/앤트맨ㆍ86

제4부
토란꽃이피면ㆍ89/비가오기로한날ㆍ90/별이취하는밤ㆍ92/물의그물ㆍ93/자세한편두통ㆍ94/진눈깨비ㆍ96/비어있는집ㆍ98/광명으로가는편지ㆍ99/귀뚜라미의받아쓰기ㆍ100/시인과모기ㆍ102/방습제ㆍ103/환절기ㆍ104/수술대에오르다ㆍ106/노인과개ㆍ108

해설염선옥(문학평론가)ㆍ109

출판사 서평

■해설엿보기

생의현장이라는거친금속은연금술사와도같은최성규시인의사유와몸(감각)을관통해비로소가치를발하는시(황금)가되어간다.그는세상을채운수많은잡음속에들려오는순수한소리야말로그음향이낮고작더라도두드러지기마련임을알고있는시인이다.그는시와시인이자연과인간의자리에서이탈해가고있는것은아닌지탐색한후,과학기술의성과물중하나인3D프린팅을통해무엇이든제작가능하다는믿음이시인들에게도영향을미친것이아닌가하고의문을품는다.시인은공들여구상하고제작한뒤장식하여표현할수있다는믿음은‘완성’도아니며‘시’가될수도없다고말한다.그렇게만들어진것은,발레리가강조한것처럼,살아있는것들을살아있지않은무언가로대체하려는시도일뿐이다.살아있는자연은우리가형태를부여하는방식으로배치되거나제작될수없듯이,살아있는인간역시매일주어지는유기적생산물속에서그삶의나이테를읽어낼수있을뿐이다.그래서최성규의시는“멸치떼처럼,더러는한마리의대왕고래처럼,설산(雪山)에서불어오는바람소리처럼”(정윤천,「‘멸치꽃’을피워내려는응시의자세에서태어나는노래들」,「멸치는죽어서도떼지어산다」,詩와에세이,2020,105쪽)다가오는일상의유기적생산물을침전시켜고통끝에진주를탄생시키는조개껍질로은유될수있을것이다.최성규는점액이함유된일상의유기적생산물과시의힘을믿는순수한열정과사유를시의내벽에번갈아덧발라시가우리의눈을사로잡을수있도록한다.그의시편은노을과무지개,푸른파도와나무와꽃의소리마저생생하게품은해변의조개껍질처럼여러색을담아내고있기때문이다.
이처럼시가일상을품는다는것은,믿어왔던어떠한‘시적인것’으로부터의결별을의미하기도하고일상에붙어있는‘오염된말’을수용한다는의미로해석될수있다.시인은이시대의‘말’이“밤새내리는폭설처럼수북하다가도/다음날이면흔적도없이사라지”(「먼곳에서오는말」)는존재임을의식하고있다.그러면서도그의시가관념이나주장,인습으로부터각보(却步)하여일상과소소함을다루는것은,본질적으로특별하지않은우리시대의육성그자체일수도있고현실적상황에응전하는시도일수도있다는믿음에기인하는것일터이다.이런명제들을참고한다면,그는오히려경계를허무는시를쓰고있음이분명하다.아닌게아니라그는새로움을위해매일“보고들은말들을지워”(「배롱에널어둔말」)가며시를써가고,그의시는“아슬아슬생명의詩”(「우크라이나」)가되고있지않은가.시인이시쓰기를멈추지않는것은“그말의체온은/한겨울에도빙하처럼얼지않는다”(「먼곳에서오는말」)는것을잘알기때문인것이다.
결국최성규는‘있을수없는일’,‘집짓는일’을다루고‘웃는일’이나‘잠자는일’,‘걷는일’같이당연하고소소한일을다루기도한다.‘의자가하는일’이나‘봄의일’같이제역할을묵묵히수행하는의지를담아내기도한다.그것은시란이처럼외떨어져놓인기념물(monuments)이아니라“둘이서함께살아갈섬하나를갖는”일이다.‘섬’에‘나’와나란히누워있는‘너’와‘시’에대한그의소원은매우소박하여“서로가조금씩아껴둔말들을모아/귓속말같은편지를소곤소곤쓰는일이고/하루종일편지를기다리는우편함같은/순진한눈동자를대문밖에걸어두는일”이될뿐이다.언젠가“발신인도수취인도언젠가모두시간여행을떠나겠지만/함께살았던집만큼은언제나그자리에남아서/대문을활짝열어두고/서로를약속처럼기다리는일”(「집짓는일」)이시인에게는시의자리이자삶이된다.따라서그의시는일상의‘정면도(正面圖)’이면서‘단면도(斷面圖)’이고,누군가의삶과닮아있는‘복사도(複寫圖)’이면서‘상세도(詳細圖)’일수있는것이다.때로는곡선일수도있으며“곡선이존재하지않는직선의공간”(「스파이더맨의일기」)으로다가와“냉정한도시의치열한습성을배우게”(「특집다큐」)도하는것이다.그러나최성규는일상의오염된단어와정련을거치지않은사유가쏟아지는것을경계하고있다.

보고들은말들을지워야겠다
지난밤비린내나는말들의꼬리를잘라야겠다
이빨빠진말들의가벼운속성
부질없이내두른아가미를끄집어내어
단칼에베어버려야겠다
속아넘어간두귀를모두끊어버려야겠다
짐승의말을했다는사람을미워할자격이나에게없다
사람이되고싶었던짐승의몸부림이고
그렇게해서라도사랑받고싶었으리라짐작하므로
혓바늘처럼돋아나는성난마음대신
꼿꼿하게견디며사는배롱나무한그루를심자
이말저말가지마다흔들거리는소문을묶어
밤새도록가슴깊이가라앉혔다가붉은꽃을피우는나무
배롱(焙籠)에널어둔젖은말들이마를때까지
수다스러운말들을향기로바꿀줄아는나무가되자
말이란사람을지키고키워내는것임을믿는다
길을나서는일은언젠가집으로돌아오는길
토막난말들의환청이따라오지않게
시속으로달리고초속으로날려버린다
사는동안거짓말을하지않는꽃과짐승들처럼
사람의말은괜히쓸데없다는묵언하나만빼고
다녀온길전부를지워버린다
-「배롱에널어둔말」전문

시인은“이빨빠진말들의가벼운속성”을잘알고있어“지난밤비린내나는말들의꼬리를”단칼에베어버린다.“속아넘어간두귀를모두끊어”내고“혓바늘처럼돋아나는성난마음대신”꼿꼿하게견디며사는배롱나무한그루를심으려한다.시인은“밤새도록가슴깊이가라앉혔다가붉은꽃을피우는”배롱나무처럼“수다스러운말들을향기로바꿀”준비가되어있다.‘나’는“말이란사람을지키고키워내는것임을”굳건히믿는연금술사이기때문이다.시인은“보고들은말들”과“짐승의말”도시인의정련을거치면‘향기’로변할수있다고믿는다.꽃과짐승은사는동안거짓말을하지않는데인간은그렇지않다면서,그러한“토막난말들의환청이따라오지않게”인간의말에서“묵언하나만빼고/다녀온길전부를지워”버린다면앞으로도계속“말이란사람을지키고키워내는것”일수있다고확언하고있다.거짓말을하지않고“꽃과짐승”의언어를취하는것이야말로시인과시가가야할길임을고백하는것이다.그에게시란“힘으로쓰는게아니라마음으로쓰는것”이며“한사람한사람을꽃이라생각하고/꽃보다아름다운존재라는사실을알고/꽃밭을어떻게가꾸고다듬을까고민”하는과정이된다.그렇기에시인은“죽어가는모든것들을다시살리기위해/밤새도록詩를쓰는임무”(「우크라이나」)를이어나가려하는것이다.
-염선옥(문학평론가)

■시인의산문

갑자기너의맨얼굴이보고싶었다.낯설게하기로예뻐보이는얼굴이아닌방금세수를마치고나온촉촉하고뽀얀순수함이가득묻어있는모습이보고싶었다.슬픔이나를넘어뜨리려할때마다작고초라한너의몸짓조차겉으로드러내지않고조용한걸음으로나에게다가오는너.

결핍이차고넘치는밤이계속될수록궁핍한나의언어들은너의단추를풀어숨겨진알몸을더듬고싶었다.너의가장깊숙한곳,뜨거운샘물이솟아나는그곳에서나의언어들을씻겨깨끗한알을낳고싶었다.한번도사용한적없는언어,아주먼곳에서오는언어들만키우며네속에서살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