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

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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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술청이 그리운 시인의 뒤꼍
200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화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이 가히 시인선 007로 출간되었다. 이화우는 이화우인가, 하고 보면 이화우(李和雨)는 이화우(梨花雨)가 아니다. 이화우는 이화우라는 이름으로 시조를 쓰는 지금 이곳의 시인이다. ‘梨花雨’를 다시 새롭게 일깨우는 시인의 이름, 이화우는 볼수록 아름다운 아우라를 풍긴다. 봄이면 꽃비의 운치에 잠시 기대보는 도처의 호명이 난만하다. 그런 이화우를, 그것도 할아버지의 작명으로 받아든 이화우는 이름의 운명을 어떻게 메고 왔을까. 그런 이화우 시인이 시조를 쓰는 것은 당연한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화우에 겹쳐지는 고전적 미감을 그가 어찌 되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려나, 이화우의 운치는 『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에서 더 그윽이 만날 수 있다.
저자

이화우

경북경주에서태어나2006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등단했다.시조집으로『하닥』『동해남부선』이있다.이호우시조문학상신인상을수상했다.

목차

제1부
이름13/낙산공원14/찌15/단체사진16/로드킬17/사막,그뜻18/청사포19/검룡소20/황지21/묵22/환절기23/청미래덩굴24/고래론論25/조선인민군우편함4630호26

제2부
새비재의밤29/천신薦新30/화서花序31/만곡彎曲32/금령총33/산음에들다34/연35/수국을보며36/그여름자귀나무37/장마를견디다38/적로笛露혹은적로赤露39/성벽은현을두고40/섬소년41/골격42

제3부
반추45/볼음도46/볼음도달빛47/전파장애48/파두49/쿠니사격장50/유무상생有無相生51/재미없는시조52/귀로54/남해금산56/봄그림자57/손돌목에대하여58/약속59/첫눈60

제4부
처서지나고63/상추씨를받다64/북65/징66/칸나67/벼루68/거돈사지에서비박을69/궁체쓰는가을날70/난도71/겨울산역72/소묘한점73/열매74/외출,그후75/가을밤,고향집에비내리고76

제5부
감은사지79/비비새울고80/고목이된산수유를부여잡고81/부의주를빚으며82/피맛골에서83/빗살무늬토기84/갈돌85/온달산성86/북성포구87/패覇를걸다88/미래는미래를89/이후라는것은90/한끼를소리로먹었다91/장항리별사92

해설정수자(시인)93

출판사 서평

이화우시인에게고전적미감이란일종의운명일지모른다고했지만,실은그가좋아서기울어간남다른취향일수있다.굳이이름의소임을받들고닦는데쏠렸다기보다자신의마음길이고전에더홀리는미감으로나타난것일지도모른다.그가조선선비의교양이자필수였던서예에힘쓰는것도먼저좋아야택하는것이고,최근에전통술담그기에빠진것또한그쪽에기우는정서가크기때문일것이다.무엇보다많은시편이그의정서와감각과취향이고전쪽에서더발휘된다는점에서그러하다.하지만고전의단순복기는배제대상이라시인은현대정형시에맞는고전적격조의발화에진력하는듯하다.먼저다음작품은현대의정형시로거듭나는시조의면모를잘보여준다.

그비백
뒤꼍에서


문득간꽃잎들이


던져버린향기로썩지않고쟁쟁하다


구멍집어둠속에도


메아리가
누대산다
-「봄그림자」전문

이작품에서시인은“비백”같은고전적용어와함께오늘의현실을넌지시드러낸다.비백飛白도비백의제시라기보다그“뒤꼍에서//문득간꽃잎들”을환기하기위한도입이다.중장이“던져버린향기로썩지않고쟁쟁하다”인데,그앞의“꽃잎들이”가주어니이를평서문으로펼치면“문득간꽃잎들이//던져버린향기로썩지않고쟁쟁하다”는것이다.“비백”의“뒤꼍”으로읽어야할지는조사가생략된까닭에분명치않다.하지만후각의“향기”를청각의“쟁쟁하다”로바꿔낸표현은공감각에서나아가꽃잎들이“썩지않”는주체적인모습으로치환되는효과도빚는다.그리고“구멍집어둠속에도//메아리가/누대산다”는종장은사람이떠나도여전히“구멍집”에살고있는“메아리”를집의주체로만든다.그집이사람만의거처에그치지않는것은“향기”와“메아리”가“봄그림자”로함께“누대”를살고있기때문이다.이를절묘하게잡아낸단수에서시인은여백이넓은배행을택하는데,이는함축을깊이들이는미적장치로보인다.이작품을3행배열해서읽어보면행간에서빚어지는“봄그림자”들의여운이확연히줄어들기때문이다.
시인의고전적미감이발휘되는시편은시어에서특히많이볼수있다.어떤작품은사전에서단어를다시찾아야할정도로시인의고전소양과시적활용이깊은편이다.다음작품은한문(학)이나서예등에조예가깊은이화우시인의고전취향을여실히보여준다.

가지런히세로획이옥판지에들어서고

비질하는청묵속에발묵으로오는단풍

앞서서돌돌마르며바삭이는자음들

가느다란협서挾書끝에매달려피는주사朱砂

아득히멀어지다귀에모인안부인가

깊숙이처마에드는가을볕의잰걸음
-「궁체쓰는가을날」전문

우선「궁체쓰는가을날」이라는제목에서시인의고전소양이물씬풍긴다.여기에“세로획”과“옥판지”를비롯해“청묵”,“발묵”그리고“협서挾書”며“주사朱砂”까지마음으로새기다보면,가을의그윽한시적와유臥遊라할만하다.
실은더찬찬히봐야고전적용어로아우르는가을의궁체를만날수있다.궁체는궁중에서쓰던궁녀들의한글서체로조선후기부터더많이쓰인단아한글씨체다.현대에와서는갈물이철경이궁체의경지를이루며한글서예의아름다움을널리알린것으로평가된다.그런데궁체가컴퓨터글씨체에도있으니고전속의글씨체라고할수만은없다.다만붓을잡아본사람이면“세로획”잘긋기가매우어렵다는것을알기에이대목에한참머물게된다.이화우시인은서예를잘알아서“옥판지에들어”선“가지런한세로획”을불러냈을것이다.옥판지는‘폭이좁고두꺼우면서도빛이희고결이고운고급선지’니,초장부터펼치는고전적취향은청묵靑墨과발묵潑墨에이르기까지만만치가않다.발묵이‘먹물이번지어퍼지게하는산수화법’의하나임은알아도,“청묵”은전문적인용어인까닭이다.먹에서도‘늙은소나무나그뿌리,관솔등을태울때생기는그을음을아교로굳혀만든’송연묵이약간청색을띠어청묵靑墨으로도부른다고적시해야단풍의형상화가더오롯해지기때문이다.이정도쯤찾으면“비질하는청묵속에발묵으로오는단풍”으로압축한단풍비유의진면목을볼수있다.
-정수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