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그렇게 일러주었으므로

경험이 그렇게 일러주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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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 작고 쓸쓸한 것들의 힘
홍정연 시인의 첫 시집 『경험이 그렇게 일러주었으므로』가 문학의전당 시인선 403으로 출간되었다. 홍정연은 ‘제도권’이라는 그 괴상망측한 괴물과 일정 부분 떨어져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고, 스스로의 선택이었지만 그가 추구하던 시의 본질까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홍정연의 시들은 이 세계의 생명 있는 구성원들이 하나 같이 작고 약하며 쓸쓸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운명을 향해 가는 작고 쓸쓸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홍정연 시인이 인간만이 아니라 지상의 다양한 생물에게도 한결같이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집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부족하지만 죽음의 ‘절벽 묘지’에 다다를 때까지 시간의 바람에 온몸을 내주며 혼신을 다해 살아간다. 회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도 생명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는 이 태도야말로 작고 쓸쓸한 것들의 부정할 수 없는 힘이다.
저자

홍정연

충남당진에서태어나대전대학교문예창작학과를졸업했다.시집으로『경험이그렇게일러주었으므로』가있다.2025년충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을수혜했다.

목차

제1부
패총13/이석14/거미16/묵을쑤다17/눈물의전염18/생리증후군20/둔덕22/절벽묘지23/게으른씨앗24/연어26/추락주의구간28/이주29/정적30/반딧불이32/소망의집33/오르골34/난시36

제2부
낙과39/핸드드립40/문어42/육필44/다육45/미모사46/안개주의보48/깨진그릇49/규화목50/택배52/풍매54/수첩55/폐어56/해풍58/MRI59/간월도60/해물칼국수62

제3부
코끼리들의장례식65/짓다66/고장난시계68/석류70/압화71/낙타72/눈티74/유리닦는사람76/매향(埋香)77/뇌우78/동충하초80/소동82/부전나비83/탐구생활84/인터뷰86/내위치는88/몸과마음90

해설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명예교수)91

출판사 서평

[해설엿보기]

크고힘센것들이따로있어서그것들이세상을지배하는것같지만,하늘아래피조물중에그런것들은없다.설사크고힘세보이는것들이있다고쳐도,그것은상대적인것일뿐이다.세상은온통작고약하고쓸쓸한것들의집합이다.그러니만일누군가이세상이돌아가는법칙을알고자한다면,작고약하고쓸쓸한것의의미를탐구해야한다.이것을제외하고,이런속성을제외하고,인간의‘의미론’을쓴다는것은어불성설이다.“인간은극복되어야할그무엇”이며따라서‘초인’이되어야한다는니체의주장은절반만옳다.인간은‘극복되어야할그무엇’으로가득차있되,이것들은절대로인간이아닌상태(초인)에이르도록극복되지않는다.문학은극복되지않는결핍들의상세한목록이며,그것들보다불과조금나은미래를가정할수있을뿐이다.문학은이런점에서희극보다는근본적으로비극에가깝다.아리스토텔레스는훌륭한비극이갖추어야할조건중의하나로주인공이반드시‘위대한사람(greatmen)’이어야한다고주장하였다.여기서‘위대함’이란물론인품이나사상이아니라,사회적신분이나권력의크기를말한다.아리스토텔레스를따르자면비극에걸맞은주인공은노예나평민이아니라왕,왕자,장군,귀족들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이런주장이후셰익스피어시대에이르기까지서양문학의주인공은거의예외없이귀족들이었다.그래서그귀족들은,주인공들은,그렇게크고힘센것들이었나?전혀아니다.아리스토텔레스가제시한비극의효과란,신분상가장우수한인간들을주인공으로내세워그들을비극적으로몰락하게함으로써,무한능력의소유자처럼보이는그들을포함하여모든인간이결국유한하고(한심할정도로)덜떨어진존재들임을증명하는것이었다.잘나봐야,잘난체해봐야,인간은결국그모양,그꼴에서벗어나지못한다는것이고대에서르네상스에이르는서양비극의강력한메시지이다.

바지락한사발얻었다

찬없는부엌이소란해진다
부르르들썩이더니살이열린다

밥상모서리에
당신과마주앉아쌓아올린조개껍데기

쓸어모아마당한쪽에던져놓고들어온다

희끄무레짚어지는
이저녁이그리워지끌거리는날있을까

층층파묻힌끼니

띠를이룬다
-「패총」전문

홍정연에게세계는작고약하고볼품없어보이는것들의집합이므로,스펙터클(spectacle)은오히려세계의본질을가리는‘빤짝이옷’에불과하므로,그리고가장일상적인것이야말로가장본질적인것이므로,홍정연은굳이스펙터클을시적소재로삼지않는다.위작품에서홍정연은기껏해야마주앉아남에게얻어온바지락한사발이나까먹는커플의지극히평범한모습을보여준다.홍정연에겐스펙터클이아니라,오히려이런장면이시가된다.이사소한일로“찬없는부엌이소란해”질정도로이들의삶은작고,조용하고,평범하다.그럼에도이들삶의이순간이전우주에서오로지이들에게만있는유일무이한것이며,그래서매우절실한것임을,시인은“이저녁이그리워지끌거리는날있을까”라는질문으로대신한다.이작고특별할것도없는저녁이너무그리워지끌거리는시간을앞질러그림으로써,시인은이사소하다면사소할장면이결코하찮은것이아님을시사한다.게다가“패총”이라는제목(이들의이평범한삶이유적이될수있다니!)은,조개나까먹는(?),이작고평범한시간을인류문화의유구한역사안으로끌어들인다.이제목덕분에커플의사소해보이는일상은보편적인류의다층적이고도역사적인자산의일부가된다.그러니조개를까먹든무엇을하든,인간이하는일중에하찮고사소한일이란없다.그것은모두역사,문화,사랑,그리고상처의의미로무거운기호(sign)들이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