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미로하지 말아요 (이가은 시집)

아무 미로하지 말아요 (이가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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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한낮에 머물 권리, 한낮을 즐길 권리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가은 시인이 등단 10년 만에 첫 번째 시집 『아무 미로하지 말아요』를 시인동네 시인선 285로 출간하였다. 2026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한 이 시집에는 「길 잃기 안내서」 외 68편의 현대적 감각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정말 쉬어도 되는가. 충분히 무언가를 이룬 사람만이 온전히 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닌가. 이가은의 시는 이 물음 앞에 아직 괜찮아지지 않은 사람들, 자신이 남아돈다고 느끼는 사람들, 약한 곳을 그대로 둔 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시간을 펼쳐놓는다. 이들은 걷고, 잎을 만지고, 빈 날개를 쓰면서 저마다 자신의 나날을 돌본다. 하지만 그 행위들이 한낮에 머물 자격을 얻기 위해 새로이 증명해야 할 쓸모가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에도, 자신을 다정하게 돌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날에도,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살아가야 할 자기 몫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이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약함을 없애는 방법에 앞서, 약함을 지닌 사람에게도 자리를 내어주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저자

이가은

시인

울산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무 미로하지 말아요』가 있다. 2026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목차

제1부
한낮은 오늘 혼자 있어ㆍ13/태어나 한 번쯤은 씩씩하게ㆍ14/이탈ㆍ15/기이하지만 무사해ㆍ16/한낮, 한낱 활기찬 가루 되기ㆍ17/나는 휴관일 문화예술회관처럼 비어 있다ㆍ18/회차지ㆍ20/우거진 생활ㆍ21/무음ㆍ22/정오 한 장 펼쳐 들고ㆍ23/금속음ㆍ24/한낮을 조곤조곤 읊조리고 있어ㆍ26/기다란 한낮을 가느다랗게 몰두해ㆍ27/한낮로빅ㆍ28/한낮 소등ㆍ30

제2부
낮 산책ㆍ33/그냥 한낮에 그냥 있기ㆍ34/투명 모스크ㆍ35/녹음이 짙은 한낮을 녹음했다ㆍ36/부재ㆍ38/잘카닥잘카닥ㆍ39/악센트ㆍ40/침수 식물ㆍ41/그저 그런 사람ㆍ42/조향ㆍ44/잠깐 자고 잠깐 깨면ㆍ45/거듭ㆍ46/무료 개방ㆍ47/휴식기ㆍ48/화상 연고에선 갓 끓인 보리차 냄새가 난다ㆍ49/폭풍이 몰려오면 오늘 밤 오로라를ㆍ50

제3부
한낮은 복작거리고 더없이ㆍ53/길 잃기 안내서ㆍ54/한낮 소곡집ㆍ55/뉴 시즌 론칭ㆍ56/안온ㆍ58/앞으로 척척 내디디면ㆍ59/그런 줄 몰랐다ㆍ60/그게 다 무슨 소용ㆍ61/무광층ㆍ62/한낮에도 석양이 어른댔음ㆍ64/나의 마리네이드ㆍ65/지금 여기에 없는 용기ㆍ66/다정한 성장ㆍ67/그곳으로 가는 지도가 정말 있는 것처럼ㆍ68

제4부
휴양ㆍ71/이름은 청페페ㆍ72/비상구ㆍ73/너무 멀리 온 파도ㆍ74/빛의 테두리ㆍ76/아무 미로하지 말아요ㆍ77/혼돈 정원사ㆍ78/눈사람엔 여름이 내렸다ㆍ79/낙담과 낙조 사이ㆍ80/잠옷은 잠옷 입은 나보다 활기차다ㆍ82/매몰자ㆍ83/실패 컬렉션ㆍ84

제5부
킥킥 별거 아닌 우린 컥컥ㆍ87/오라시온ㆍ88/청회색 반죽이 질컥 출렁일 때ㆍ89/나도 의자를 한 번은 무릎에 앉혀주고 싶었다ㆍ90/부식ㆍ91/사는 데 별 필요 없어요ㆍ92/미동ㆍ93/건너가는 월요일ㆍ94/액자 속으로 바람이 분다ㆍ95/저녁은 종이처럼 우리는 주름처럼ㆍ96/낱장에 날개 하나 달렵니다ㆍ97/진득이 들어준다면ㆍ98

해설 임지훈(문학평론가)ㆍ99

출판사 서평

[해설 엿보기]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우리는 스스로의 하루를 돌아보곤 한다. 자신이 보낸 하루에 충만한 만족감을 느끼는 날도 더러 있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떠오르는 날이면 자신에 대한 성토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기도 한다. 오늘 나는 충분히 효율적으로 살지 못했다, 왜 시간이 더 걸리는 그 길로 갔을까, 아침에 다른 버스나 지하철을 탈 걸, 회의 시간에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등등. 이미 해버린 일과 미처 하지 못한 일을 떠올리며, 다른 선택을 했다면 하루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후회와 자책이 밤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낮의 시간 속에서 더 뚜렷하고 선명해지기도 한다. 가령 실직 등의 이유로 일터를 떠나 있게 된 사람에게 한낮은 더없이 가혹한 시간으로 경험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고 있는데 오직 ‘나’만이 아무런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 그 생각 속에서는 주어진 시간조차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와는 별개로, 자기 자신만이 하루의 바깥에 남겨진 듯한 감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낮이라는 시간은 그 밝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 더욱 가혹해지는 역설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발밑의 그림자에 붙잡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시간, 오직 ‘나’ 혼자만이 마땅한 자리가 없다는 감각이 밝은 빛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밝은 빛 속에서 오직 자신의 발 디딘 곳에만 어둠이 존재하는 듯한 감각을 이가은은 『아무 미로하지 말아요』라는 시집을 통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다. 이 시집에는 더러 길을 잃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직 괜찮아지지 않은 몸으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밝은 빛 속을 헤쳐나가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이들에게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앞서, 지금의 자신을 조금이나마 돌보는 일이 절실하다.

남아도는 나 같은 건 어떻게 해야 할까
병든 현관을 열고 나아 보려고 걸었다

날씨가 너무 좋네요 지나가는 무리들

옷깃을 여밀 때면 열리는 것이 있고
햇빛이 오후 속을 피처럼 돌아다니니

한 번은 뻗어 나가자 어떤 길로든 우리

혈관을 가진 정오 한 장을 펼쳐 들 때
누가 좀 도와주세요 돌아봐도 아무도 없고

선캡을 푹 눌러쓴 채 땅만 보고 걸었다
- 「정오 한 장 펼쳐 들고」 전문

화자는 시의 첫 구절에서 자신을 “남아도는 나”라 표현하며, 자신이 필요한 만큼보다 더 많이 남겨졌다는 감각을 토로한다. 무언가 남아돈다는 감각은 어떤 필요와 쓰임을 기준으로 할 때만 성립된다. 쓸 곳이 없는 물건은 한쪽에 치워두면 되지만, 자신을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필요와 쓰임이 없는 ‘나’에 대한 토로는 그렇기에 생활의 곤궁을 넘어 삶 자체를 존속하는 것에 대한 곤란을 드러낸다. 이 물음에서 ‘나’는 하루를 사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되며, “나 같은 건”이라는 표현은 그 거리를 더욱 벌어지게 만드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여기에 있어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병든 현관”이라는 표현이다. 시의 구도를 생각해 볼 때, ‘현관’은 곤궁에 빠진 ‘나’와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통로를 수식하는 것이 ‘병든’과 같은 부정적 수식어라는 점은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화자의 우울한 마음을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면서, 그 마음이 세계와의 연결마저도 위태롭게 만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화자가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는 일에 앞서 무엇을 할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화자가 그 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부담을 없앴다는 뜻보다, 그것을 지닌 채 자신을 바깥에 내놓음에 가까울 것이다.
- 임지훈(문학평론가)

[시인의 산문]

사람들이 마구 올라탄 인도 열차처럼
너무 좁은 내가 한둘이 아닌 나로 바글거렸다.

달리는 열차 위에 서서라도 갈 수만 있다면.

예감을 구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