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치욕의 역사, 병자호란을
당대의 맥락에서 새롭게 살펴보다
당대의 맥락에서 새롭게 살펴보다
당대의 맥락에서 병자호란 다시 보기
병자호란은 흔히 굴욕의 역사, 치욕의 역사로 인식되며, 전쟁의 발발과 참패가 당시 국왕을 포함한 지배층의 무능과 한계, 즉 국제 정세에 대한 오판이나 국방 태세의 해이에서 초래되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적 해석은 그것과 상이한 사실을 전해주는 당대의 또 다른 기록들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기록을 검토해 보면, 인조반정의 집권 세력 역시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후금?청의 군사적 위협과 조선의 전력 열세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방어책을 집권 초기부터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 예측과 대비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일방적 패배를 당하며 끝내 항복하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1592∼1598년의 임진왜란, 1619년의 심하 전투, 1627년 정묘호란의 연이은 시련을 겪은 후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반복된 병자호란의 참패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른바 대명의리對明義理라는 당대의 보편적?절대적 가치를 고수하려 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심성心性과 내면을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면, 17세기 전반의 컨텍스트로 돌아가야 하며,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사료와 현상에 눈길을 돌려야만 한다.
병자호란은 흔히 굴욕의 역사, 치욕의 역사로 인식되며, 전쟁의 발발과 참패가 당시 국왕을 포함한 지배층의 무능과 한계, 즉 국제 정세에 대한 오판이나 국방 태세의 해이에서 초래되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적 해석은 그것과 상이한 사실을 전해주는 당대의 또 다른 기록들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기록을 검토해 보면, 인조반정의 집권 세력 역시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후금?청의 군사적 위협과 조선의 전력 열세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방어책을 집권 초기부터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 예측과 대비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일방적 패배를 당하며 끝내 항복하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1592∼1598년의 임진왜란, 1619년의 심하 전투, 1627년 정묘호란의 연이은 시련을 겪은 후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반복된 병자호란의 참패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른바 대명의리對明義理라는 당대의 보편적?절대적 가치를 고수하려 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심성心性과 내면을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면, 17세기 전반의 컨텍스트로 돌아가야 하며,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사료와 현상에 눈길을 돌려야만 한다.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禮,中華) - 한국연구총서 96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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