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심주의를 탈피하여 새로운 관점으로
동일성을 해체하는 차이로 바라볼 때, 각 나라와 사회에는 각각의 중세성과 근대성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나 유럽식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있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나 세습적 귀족제에서 벗어나 능력주의에 따라 과거제를 통한 관료의 임용을 한 것이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 근대성을 선취한 것이라는 우드사이드의 주장 모두 유럽의 기준을 다른 국가나 사회에 일반화한 데서 빚어진 오류다. 세습적 귀족제를 유지한 유럽과 달리 과거제를 바탕으로 한 관료제가 한국의 중세이고 이에서 벗어나 동학농민전쟁 시기에 집강소에서 농민과 천민이 동등하게 집강, 집사 등의 임원이 되어 의사결정을 하고 자치를 행한 것이 근대다. 이처럼, 각 나라와 사회에는 차이의 중세가 있고, 18~19세기의 달라진 맥락에 따라 중세적 흐름에서 탈주하려는 탈중세적 변화들이 나타났다.
이에 저자는 유럽의 근대성 기준을 떠나 조선조 현실과 이를 재현한 텍스트를 차이의 사유로 직시했다. 각 분야별로 실제 현실과 텍스트로 재현된 것을 구분하여 분석하며 전반적인 흐름과 변화, 한 사건과 다른 사건과 연기적 관계, 그 사건과 텍스트가 놓여있는 맥락을 관찰했다.
그렇다고 중세로부터 탈주, 탈중세성이 곧 바로 근대성과 동일화할 수는 없다. 아무리 큰 변화라 하더라도 기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고 지속적이지 못하고 비전이나 미래와 연결되는 지점들이 없다면 근대로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여러 학자들이 자유로운 사랑을 노래하고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사설시조들이 이를 강하게 억압하였던 유교이데올로기와 도덕관으로부터 탈주이기에 근대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행위를 관능적으로 묘사한 대다수의 사설시조들은 신분과 젠더에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권력관계에 있는 양반 남성이 성을 독점하고자 만든 기생제나 축첩제를 이용하여 기생을 포함한 천민이나 서민 여성에 대해 행한 억압적 탈승화다. 지속성을 갖기는 했지만 오히려 기존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고 비전도 전혀 드러내지 못하였으며 신분과 젠더를 초월하여 주체의 자기실현과 존재의 연속성과 합일을 지향한 근대적 사랑이나 여러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욕망과도 연계되지 않는다. 이들 시조는 근대성을 선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건성을 심화한 사례다.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 근대성과 식민성
문화란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유전적 능력과 더불어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진 다양한 주체들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토대와 맥락에서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세계를 해석하고 지향하며 여러 실천을 행하는 것들이 서로 부딪치고 어우러지며 인정투쟁, 담론투쟁, 헤게모니 투쟁을 하는 장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행해진다. 그러기에 현실과 문화 모두 이중적·복합적·대대적(待對的)·연기적(緣起的)이다.
상품화폐의 발생으로 물신화가 나타나고 상공업의 발전으로 유흥업이 번성하면서 성적 자유가 확대되고 민란과 변란이 발생하자 지배층은 유교이데올로기 강화와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경민편(警民編)」을 발간하여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반작용을 행한다. 이전 시대에 유교 윤리와 도덕이 상층에만 머문 데 반하여, 18~19세기에는 이의 서민화가 일어난다. 서민계급은 자신들이 나서서 「오륜가」를 짓고 서당을 세울 정도로 충, 효, 열(烈), 신의, 우애 등의 유교적 가치를 자발적으로 내면화하고 일상화하여 생활규범으로 삼는다. 이는 일시적으로 지배이데올로기의 강화와 체제의 생활세계 침투로 나타나지만, 본연지성과 예의 구현이 정당성 확보, 권력과 명예, 헤게모니의 바탕이자 양반과 서민을 가르는 핵심 준거인 조선조 사회에서 서민들은 자신들을 양반과 다름없이 유교적 도덕을 구현하는 주체로 각성하였고 일부는 양반계급에 저항하였다. 또, 여성들의 치산(治産)은 17세기에 장자 상속제가 확립된 이후 막대한 제사비용을 감당하면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가 권력과 헤게모니의 바탕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그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 가부장적 폭력의 소산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치산을 하면서 상품화폐경제에 눈을 뜨고 경제권을 확보하며, 가정의 단위든, 마을의 단위든 상품화폐경제가 유교적 삶을 대체하는 만큼 점점 발언권을 높였다. 그럼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전자에만 주목하여 조선의 자생적 근대성을 부정하고,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후자의 실증이나 사례에 기반한 해석만을 견지한다.
18~19세기 실제 현실과 재현된 텍스트를 통해 근대성을 규정하다
18~19세기의 실제 현실과 재현된 텍스트에서 ① 중세로부터 탈주하는 탈중세적 변화 가운데 ② 기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③ 지속성을 갖고 나타나면서 다른 사건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서 ④ 비전을 제시하여 ⑤ 미래의 한국 사회와도 연계되는 것을 근대로 규정한다. 이에 대해 차이의 사유로 분석하되, 서양/동양, 제국/식민, 중심/주변, 엘리트/서발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분법이 아니라 대대(待對)의 논리로 서로 모방하거나 저항하면서 거울이자 타자, 내 안의 남과 너 안의 남으로서 서로 생성하는 과정에 대해, 비동시적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권력, 헤게모니, 사회경제적 토대를 종합하여 해석하였다.
조선조 건국에서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도도한 흐름이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18~19세기를 기점으로 하거나 그 이전부터 기존의 중세와 다른, 괄목할 만한 변화 가운데 조선조 봉건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지속적으로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비전을 제시하여 이후의 한국 사회와도 연계되는 것들에 주목하였다. 이를 크게 상품화폐, 계급과 주체, 세계관, 시론(詩論), 시공간, 욕망, 문학의 대중화와 통속성, 타자 등 8가지의 분야로 정리한다.
조선사회의 목표는 왕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이기고 본연의 성을 되찾아 예(禮)를 구현하는 것이다. 조선사회는 인의(仁義), 충(忠), 효(孝)와 같은 유교의 이념과 가치를 세계관이나 통치이념,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삶의 원칙으로 삼아 실천하였다. 당연히 이런 가치보다 물질과 화폐를 추구하는 이는 공동체에서 배제되거나 추방당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상품화폐의 발생은 패러다임과 삶의 양식에 대전환을 가져왔고 토대를 변화시켰다.
또 조선조는 다른 중세 국가처럼 신분상의 구분과 차별이 명확하였다. 사회학적으로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극소수의 자작농과 중인을 제하고는 왕족과 양반만이 토지와 권력, 한문의 리터러시와 이에서 비롯된 지식을 독점하였다. 계급은 토대와 상부구조를 매개하는 행위자다. 토대가 계급을 결정하지만, 계급의 변화는 토대와 상부구조 모두의 변화를 야기한다. 18~19세기에 상공업의 발전에 따라 신분질서에 동요가 일었다. 중인이 확대되고 이들과 민중들이 두레와 장시의 공론장을 매개로 계급의식과 민권의식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과도한 수취, 삼정의 문란, 세도정치 등의 현실을 몸으로 겪으면서 봉건모순을 인식하고 근대적 주체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유교 이데올로기와 지배질서에 대해 합법적으로는 상언과 격쟁으로, 비합법적으로는 민란과 무장폭동으로 저항하였다. 현실비판가사는 봉건모순에 대해선 핍진하게 비판했지만 새로운 비전을 펼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판소리는 지배이데올로기/지배층과 타협적 평형을 이루기는 했지만, 봉건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펼쳤으며 대중적으로 연행이 되면서 체제 수렴과 해체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세계관은 세계의 부조리에 대하여 집단무의식적으로 대응하는 양식이자 세계의 의미를 구성하고 해석하는 바탕체계이고 기업이나 국가처럼 그 구성원들이 서로 실재한다고 믿을 경우 실제 현실을 구성하는 상호주관적 실재로서 작동하는 믿음의 체계다. 불교적 세계관이나 샤머니즘적 세계관이 잔존하기는 하였지만 조선조 사회는 승려나 무당을 천민으로 타자화할 정도로 유교적 세계관이 주동적 세계관으로 압도하였다. 본연의 성을 되찾아 예를 구현하며 안빈낙도를 추구하면서 물욕을 천시하던 조선조 사회에서 물질주의는 문학에도 일대 전환을 야기하였다. 곧, 물욕으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하고 공동체가 몰락하는 현실을 세계의 부조리로 인식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개인이 물욕을 추구하는 자에 맞서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서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휴머니즘적 세계관과 신분을 초월한 평등을 추구하는 민중들의 세계관이 부상적 세계관으로 출현하면서 공고했던 주동적 세계관에 균열이 발생했다.
조선조 사회에서 문학은 단순히 예술적 향유를 넘어 풍류를 즐기고 과거를 통해 권력을 얻는 수단이자 헤게모니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조선조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시론(詩論)이다. 조선조 내내 시는 옛 전고에 근거하여 유교적 이념이 추구하는 도(道)나 리(理)를 전달하는 방편이었다. 하지만 상공업과 도시의 발전으로 유흥문화가 발달하고 중인들이 이를 주도하면서 실제 자유로운 성애가 질펀하게 이루어졌다. 시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메우려는 욕구와 옛 전고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 도나 리가 아니라 개인의 성령(性靈)의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는 시론이 안과 밖에서 태동하였다.
조선조는 다른 중세사회와 마찬가지로 우주와 자연의 패턴에 인간이 조응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왔으며 24절기에 맞추어서 의례를 행하고 놀이를 하고 삶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 시간에 자신의 패턴을 종속시키기 시작하였다.
중세인들은 타계와 대립되는 세속의 공간을 설정하고 이를 다시 신전과 교회나 절 등의 성소, 왕이 사는 궁성, 귀족들의 거주처, 평민들의 거주처, 배제된 자들의 거주처로 분할하였다. 근대에서 공간은 타계를 소거하고 경제적 목적과 권력에 따라 구획화한다. 상공업의 발전에 따라 상공인과 일꾼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1789년에 한성부 내 도성 밖 인구는 거의 절반인 15만 명에 이른다. 서울의 공간 절반 정도가 신분질서와 권력이 공간을 분할던 데서 벗어나 경제적 목적과 이에 따른 권력에 의해 비교적 자유롭게 구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