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해방 이후 일본어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 장혁주의 자서전적 소설
장혁주는 한국 문학사에서 그리 자랑스러운 이름은 아니다. 1905년 태어난 그가 학교 교육을 받을 무렵 일본어는 이미 공식 ‘국어’의 자리를 차지했고, ‘조선어’는 ‘한문’과 함께 외국어의 지위로 강등된 무렵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문인들은 이처럼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일본어-조선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중언어(bilingual) 사용자가 된다. 장혁주가 이중언어 1세대에 속하는 작가라는 것, 그가 식민지 시기 일본어로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잘 나가던 시절, 장혁주의 유명세는 조선과 일본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다. 장혁주처럼 일본어 글쓰기를 통해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문명’을 떨치고 싶어 하는 식민지 출신 작가들이 생겨났고, 실제로 1930년대 대만의 ‘야심’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조선의 장혁주는 일종의 롤 모델이었다.
그러나 해방/패전 이후 상황은 급변하는데, 친일의 상징처럼 여겨진 장혁주는 조선 문단의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30년대 후반 이후라면 너나할 것 없이 거의 친일의 길에 들어섰던 조선 문인들이 장혁주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것은 오히려 해방 이후 그의 행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친일 경력을 가진 대부분의 조선 문인과는 달리, 민족에 대해 사죄를 표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어 글쓰기를 선택하고 심지어 1952년 일본 국적으로 귀화까지 하는, 드문 ‘일관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1954년 일본에서 발표된 장혁주의 소설 『편력의 조서』는 이처럼 독특한 선택을 거듭했던 작가 장혁주의 내면이, 거의 ‘고백’에 가까운 형식으로 담긴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나 해방/패전 이후 상황은 급변하는데, 친일의 상징처럼 여겨진 장혁주는 조선 문단의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30년대 후반 이후라면 너나할 것 없이 거의 친일의 길에 들어섰던 조선 문인들이 장혁주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것은 오히려 해방 이후 그의 행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친일 경력을 가진 대부분의 조선 문인과는 달리, 민족에 대해 사죄를 표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어 글쓰기를 선택하고 심지어 1952년 일본 국적으로 귀화까지 하는, 드문 ‘일관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1954년 일본에서 발표된 장혁주의 소설 『편력의 조서』는 이처럼 독특한 선택을 거듭했던 작가 장혁주의 내면이, 거의 ‘고백’에 가까운 형식으로 담긴 자전적 소설이다.
편력의 조서 - 장혁주 소설 선집 3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