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근대 일본사에서 '만들어진' 제도로서의 국가신도는 근대천황제 확립을 목표로 일본의 전통신앙 지형에 '변혁'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해외 식민지에도 국가신도를 침투시켜 식민지의 전통 신앙에도 '변용'을 불러일으켰다. 굴곡의 근대 일본 종교사와 식민지종교의 변주곡에 대한 이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국내와 그들의 구(舊) 식민지의 종교를 파악하는 데 불가결한 주제이다. 우리 종교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과연 알고 있는가.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이후 1910년대에 식민지법을 제정하기 위해 '구관(舊慣)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우리의 전통신앙과 종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동화(同化)주의를 주창하면서 조선을 통치해 나갔으나 3ㆍ1독립운동 이후로 조선신궁 조영(1926년)을 비롯하여 본격적으로 우리의 전통신앙과 종교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돌입하였다. 그 결과가 무라야마 지쥰의 무속과 풍수, 석존 등 4부작이다. 이러한 성과들은 1930년대에 들어서서 전쟁수행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심전개발운동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동시에 일제는 전국에 신사를 설립하여 우리의 전통신앙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이른바 '국가신도화'를 지향하였다.
학설사적으로 보면 식민지 종교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상황에서도 식민지(대만과 조선 등)에서 국가신도의 기능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한 연구는 보다 적은 상황이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전국에는 조선신궁을 비롯하여 1도(道) 1사, 마을의 신사(神祠), 학교 내 호코라 등 1200기에 가까운 국가신도의 제사 공간이 있었다. 이러한 제사활동은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신앙 개념의 변용을 강요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이후 실패로 돌아갔으나, 우리의 전통신앙과 종교지형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식민지적 변용을 이해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국가신도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이후 1910년대에 식민지법을 제정하기 위해 '구관(舊慣)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우리의 전통신앙과 종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동화(同化)주의를 주창하면서 조선을 통치해 나갔으나 3ㆍ1독립운동 이후로 조선신궁 조영(1926년)을 비롯하여 본격적으로 우리의 전통신앙과 종교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돌입하였다. 그 결과가 무라야마 지쥰의 무속과 풍수, 석존 등 4부작이다. 이러한 성과들은 1930년대에 들어서서 전쟁수행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심전개발운동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동시에 일제는 전국에 신사를 설립하여 우리의 전통신앙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이른바 '국가신도화'를 지향하였다.
학설사적으로 보면 식민지 종교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상황에서도 식민지(대만과 조선 등)에서 국가신도의 기능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한 연구는 보다 적은 상황이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전국에는 조선신궁을 비롯하여 1도(道) 1사, 마을의 신사(神祠), 학교 내 호코라 등 1200기에 가까운 국가신도의 제사 공간이 있었다. 이러한 제사활동은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신앙 개념의 변용을 강요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이후 실패로 돌아갔으나, 우리의 전통신앙과 종교지형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식민지적 변용을 이해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국가신도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일본 국가신도의 창출과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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