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 책은 영문학계의 주요 시인들을 선별하고, 시를 선별하여 모아 낸 ‘소명영미시인선’ 시리즈이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는 그 네 번째 책으로, 아일랜드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시인, W. B. 예이츠의 시선집이다.
W. B. 예이츠의 생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1865년 6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버틀러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유명한 초상화가, 어머니 수전 메리는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1867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두 살 때, 가족이 런던으로 이사하였다. 화가로 성공하고픈 아버지의 열망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은 돈에 쪼들리다가 1880년 말에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더블린 근교의 어촌마을 호스에서 살게 된다. 그는 더블린 에라스무스 스미스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아버지의 화실이 학교 근처에 있어 많은 시간을 그 화실에서 보내며 더블린의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을 만났다. 이때부터 예이츠는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885년에 두 편의 시가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에 실렸다. 그는 초기에 주로 낭만주의풍의 서정시를 쓰다가, 한결 사실주의적인 시풍을 거쳐, 심미주의 및 상징주의 시풍으로 거듭났다고 평가된다. 1939년 1월 28일 , 예이츠는 프랑스 남동부 해안 도시 망통의 한 호텔에서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아일랜드의 연극 발전에 공헌하다
예이츠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인 중 하나가 그레고리 부인이다. 그레고리 부인은 극작가요 민속학자로, 아일랜드 문예 부흥을 주도한 여걸이자 문예 후원자였다. 예이츠의 시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는 그녀의 영지 골웨이의 ‘쿨 파크’는 아일랜드 문예 부흥운동을 주도한 문인들의 회합소였다. 예이츠는 극작가 에드워드 마틴의 소개로 1896년에 그녀를 처음 만났다. 이 셋에 소설가 겸 극작가 조지 무어까지, 네 명의 뜻있는 문인들이 합심하여 1899년에 아일랜드 문예 극장을 설립하고, 존 싱, 숀 오케이시 같은 극작가들과 함께 아일랜드의 연극 발전에 공헌하기에 이른다.
예이츠는 1904년 12월 24일 애비 극장 개관일 밤에 무대에 올린 1막의 극 〈캐슬린 니 훌리한〉을 비롯하여, 일본의 전통 가면극 〈노〉를 모방해서 지은 〈매의 우물에서〉(1917)와 〈무희를 위한 네 극〉(1921)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직접 써서 무대에 올렸고, 극장 이사진의 한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극장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19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일랜드의 독립을 외치다
예이츠는 문예 부흥을 통해 아일랜드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예이츠 자신도 ‘비종교적이고 반-가톨릭적이고 반-아일랜드적인 사람’이라고 비난받기 일쑤였다. 1907년 1월 26일에 애비 극장 무대에서 첫선을 보인 싱의 〈서쪽 세상의 한량〉은 비난의 표적이 된 것도 모자라, 상연 도중에 관객들이 분노해서 폭동을 일으키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고, 1911년의 미국 순회공연에서도 비슷한 소란이 일었다.
예이츠는 1922, 1925년에 아일랜드자유국의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어, 검열, 건강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권 보호, 국제연합 가입 등과 같은 현안들에 큰 관심과 노력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23년 12월에,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예이츠는 노벨상 수락 연설에서 자신을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문화적 독립의 한 기수로 소개하며, 노벨상 수상을 십분 활용하여 영국의 지배에서 갓 독립한 아일랜드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그간 출간된 책들의 판매로 이어졌고, 그제야 예이츠는 처음으로 큰돈을 벌어 자신의 빚뿐 아니라 아버지의 빚까지 청산할 수 있었다.
W. B. 예이츠의 생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1865년 6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버틀러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유명한 초상화가, 어머니 수전 메리는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1867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두 살 때, 가족이 런던으로 이사하였다. 화가로 성공하고픈 아버지의 열망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은 돈에 쪼들리다가 1880년 말에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더블린 근교의 어촌마을 호스에서 살게 된다. 그는 더블린 에라스무스 스미스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아버지의 화실이 학교 근처에 있어 많은 시간을 그 화실에서 보내며 더블린의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을 만났다. 이때부터 예이츠는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885년에 두 편의 시가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에 실렸다. 그는 초기에 주로 낭만주의풍의 서정시를 쓰다가, 한결 사실주의적인 시풍을 거쳐, 심미주의 및 상징주의 시풍으로 거듭났다고 평가된다. 1939년 1월 28일 , 예이츠는 프랑스 남동부 해안 도시 망통의 한 호텔에서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아일랜드의 연극 발전에 공헌하다
예이츠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인 중 하나가 그레고리 부인이다. 그레고리 부인은 극작가요 민속학자로, 아일랜드 문예 부흥을 주도한 여걸이자 문예 후원자였다. 예이츠의 시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는 그녀의 영지 골웨이의 ‘쿨 파크’는 아일랜드 문예 부흥운동을 주도한 문인들의 회합소였다. 예이츠는 극작가 에드워드 마틴의 소개로 1896년에 그녀를 처음 만났다. 이 셋에 소설가 겸 극작가 조지 무어까지, 네 명의 뜻있는 문인들이 합심하여 1899년에 아일랜드 문예 극장을 설립하고, 존 싱, 숀 오케이시 같은 극작가들과 함께 아일랜드의 연극 발전에 공헌하기에 이른다.
예이츠는 1904년 12월 24일 애비 극장 개관일 밤에 무대에 올린 1막의 극 〈캐슬린 니 훌리한〉을 비롯하여, 일본의 전통 가면극 〈노〉를 모방해서 지은 〈매의 우물에서〉(1917)와 〈무희를 위한 네 극〉(1921)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직접 써서 무대에 올렸고, 극장 이사진의 한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극장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19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일랜드의 독립을 외치다
예이츠는 문예 부흥을 통해 아일랜드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예이츠 자신도 ‘비종교적이고 반-가톨릭적이고 반-아일랜드적인 사람’이라고 비난받기 일쑤였다. 1907년 1월 26일에 애비 극장 무대에서 첫선을 보인 싱의 〈서쪽 세상의 한량〉은 비난의 표적이 된 것도 모자라, 상연 도중에 관객들이 분노해서 폭동을 일으키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고, 1911년의 미국 순회공연에서도 비슷한 소란이 일었다.
예이츠는 1922, 1925년에 아일랜드자유국의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어, 검열, 건강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권 보호, 국제연합 가입 등과 같은 현안들에 큰 관심과 노력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23년 12월에,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예이츠는 노벨상 수락 연설에서 자신을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문화적 독립의 한 기수로 소개하며, 노벨상 수상을 십분 활용하여 영국의 지배에서 갓 독립한 아일랜드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그간 출간된 책들의 판매로 이어졌고, 그제야 예이츠는 처음으로 큰돈을 벌어 자신의 빚뿐 아니라 아버지의 빚까지 청산할 수 있었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 소명영미시인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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