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관일기 1 : 1974년 11월 1일~1976년 12월 29일

지명관일기 1 : 1974년 11월 1일~1976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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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지명관일기』의 역할과 의의
이 『지명관일기』는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초대 소장이신 지명관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 때 일본에서 ‘TㆍK생’이라는 필명으로 당시 독재정권에 맞서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국내 현장과 모습을 이와나미서점이 발간하는 월간지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연재를 게재해서 생생한 실상을 알리는 한편으로, 일본ㆍ독일ㆍ미국 교회와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민주화 투쟁을 지원하면서 싸운 시기에 남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구자에게 ‘일기’라는 것은 글쓴이의 내면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때로는 글쓴이가 독자를 의식하면 사실이 잘못 전달될 수도 있다는 단서가 붙기도 한다. 또한 주관적 시점이 들어간 서술이라는 이유로 객관성에 대한 조심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지명관일기』를 간행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는 데 일조하기 위함이다. ‘일기’라는 성격 때문에 다양한 접근이 가능할 수가 있겠으나, 이 『지명관일기』가 당시 국내에서는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던 일본과 기타 해외에서 전개된 민주화 투쟁에 대한 지원과 협력의 네트워크 조감도를 그려내는 데는 유의미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지명관일기』와 ‘TㆍK생’
이번에 간행한 제1권은 1974년 11월 1일부터 1976년 12월 29일까지를 수록하는데, 1974년은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즉 문세광사건이 발발한 해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첫날에 “사건이 일어나 이것이 압수된다면 많은 동지들이 무서운 운명을 당할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을 담고 있는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보관해야 했는데, 실제로 A4 사이즈 루즈리프에 만년필로 쓴 일기는 모두 4등분으로 접은 흔적이 남아 있다. 작게 접어서 은밀히 숨겨놓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명관일기』는 일본에서 지인 등에 여러 갈래로 분산해서 맡겨놓았다가 일본학연구소에 계시는 동안 하나씩 회수하신 것으로 알며, 연구소를 떠나실 때 연구소에 자료로 써달라고 기증하신 것이다. 참고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원고는 하나 탈고하면 길거리에서 접선한 야마구치 마리코 씨에게 건넸으며, 『세카이』 편집부에서는 당시 야스에 료스케 편집부장, 오카다 아쓰시, 야마구치 마리코 씨가 은밀하게 내용을 다른 원고에 옮겨 적고 원본은 불태워 없앴다고 한다. 필적을 남기지 않고 지명관 선생님 특유의 표현이나 표기를 은폐해서 KCIA가 혈안이 되어 ‘TㆍK생’ 찾기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지명관 선생님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 작업을 처음에는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이 혼자 담당하다가, 야마구치 마리코 씨가 『세카이』 편집부에 들어온 후 퇴사할 때까지 6년 반 동안 이 은밀한 작업이 진행되었고, 야마구치 씨가 퇴사한 후에는 이 일을 함께 할 후임자는 없었다고 한다. 이 모두가 ‘TㆍK생’을 지키기 위한 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지명관일기』는 친필 원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후학으로서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지명관의 정신과 지혜, 미소와 사랑을 오롯이 담다
일본으로 망명했던 지명관 선생님은 한국 국민이 위대하고 용감한 노력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자, 마침내 귀국할 수 있었다. 온화하지만 분명하고 확고한 그의 성품, 그리고 민주화운동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헌신했던 그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에도 진력했다. 더 깊은 차원의 화해를 위한 지명관 선생님의 노력을 존경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민주주의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수호하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자비로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미소로 재치와 지혜를 나누며 ‘우리 한가운데를 걸어온’ 그는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의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는 『지명관일기』가 소란하고 혼란스러운 지금, 우리에게 위로이자 용기의 근간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저자

지명관

저자:지명관池明觀,ChiMyong-kwan
1924.10.11~2022.1.1.평안북도정주에서태어났다.1946년김일성종합대학에제1회입학생으로입학하였으나1947년김일성종합대학을중퇴하고,월남했다.1950년한국전쟁에통역장교로참전했다.1954년서울대학교종교학과를졸업하고1958년동대학원종교학과석사이후박사과정을수료했다.1960년덕성여자대학교철학과교수를역임하고,1964년부터1967년까지월간『사상계』주간으로근무했다.1967년에서1968년까지뉴욕유니언신학교에서유학했으며1972년일본으로망명해1972년부터1993년일본도쿄여자대학교수직을역임했다.1993년에서2003년까지한림대학교일본학연구소소장으로있었으며1998년에서2003년까지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위원장직을,2000년부터2005년까지KBS이사장직을역임했다.2012년제7회일송상과2020년5·18언론상공로상을수상했다.

엮음:한림대학교일본학연구소『지명관일기』간행위원회
서정완徐禎完,Suh,JohngWan
『지명관일기』간행위원회위원장
고길미高吉美,Ko,KilMi
『지명관일기』간행위원회위원
서영혜徐榮慧,YounghyeSeoWhitney
『지명관일기』간행위원회위원
심재현沈載賢,Shim,JaeHyun
『지명관일기』간행위원회위원

목차

책머리에

제1부
1974년
1975년
1976년
별지자료

제2부‘T·K생’,그리고지명관선생님을생각하며
‘글쓰는사람’지명관선생님(오카모토아쓰시)
지명관선생님이일본교회에남기신것(오카다히토시)
「T·K생」과지낸6년반(야마구치마리코)
존경하는동료이자자비로운친구지명관교수를기억하며(데이비드H.새터화이트)
「한국으로부터의통신」재고-한·일관계정상화를위해실천하신지명관선생님(박일)
그때도오늘(고길미)
생생하게살아있는역사교과서-지명관선생님,강정숙사모님이야기(심재현)
「한국으로부터의통신」연구를통해만난지명관선생님(서영혜)
‘동아시아인지명관’(서정완)

지명관선생님저서목록

출판사 서평

『지명관일기』와‘TㆍK생’

이번에간행한제1권은1974년11월1일부터1976년12월29일까지를수록하는데,1974년은박정희대통령저격사건즉문세광사건이발발한해이다.일기를쓰기시작한첫날에“사건이일어나이것이압수된다면많은동지들이무서운운명을당할것이아닌가”라는걱정을담고있는데,당시의긴박했던상황을염두에두고읽어야할것이다.그만큼조심스럽고은밀하게보관해야했는데,실제로A4사이즈루즈리프에만년필로쓴일기는모두4등분으로접은흔적이남아있다.작게접어서은밀히숨겨놓은흔적이그대로남아있는것이다.

『지명관일기』는일본에서지인등에여러갈래로분산해서맡겨놓았다가일본학연구소에계시는동안하나씩회수하신것으로알며,연구소를떠나실때연구소에자료로써달라고기증하신것이다.참고로「한국으로부터의통신」원고는하나탈고하면길거리에서접선한야마구치마리코씨에게건넸으며,『세카이』편집부에서는당시야스에료스케편집부장,오카다아쓰시,야마구치마리코씨가은밀하게내용을다른원고에옮겨적고원본은불태워없앴다고한다.필적을남기지않고지명관선생님특유의표현이나표기를은폐해서KCIA가혈안이되어‘TㆍK생’찾기를하는긴박한상황에서지명관선생님을지키기위한방법이었다.이작업을처음에는야스에료스케편집장이혼자담당하다가,야마구치마리코씨가『세카이』편집부에들어온후퇴사할때까지6년반동안이은밀한작업이진행되었고,야마구치씨가퇴사한후에는이일을함께할후임자는없었다고한다.이모두가‘TㆍK생’을지키기위한민주화운동의한부분이었다고할수있다.그에비하면『지명관일기』는친필원고그대로남아있다는것이후학으로서참으로다행스럽게생각한다.

지명관의정신과지혜,미소와사랑을오롯이담다

일본으로망명했던지명관선생님은한국국민이위대하고용감한노력으로민주주의를회복하자,마침내귀국할수있었다.온화하지만분명하고확고한그의성품,그리고민주화운동뿐아니라,국제사회에대한깊이있는이해를위해헌신했던그는한국과일본의관계개선에도진력했다.더깊은차원의화해를위한지명관선생님의노력을존경하고전폭적으로지지하며,민주주의를앞으로도계속해서발전시키고수호하며한반도와동북아시아의항구적인평화를실현하기위해서주변의많은사람이그의정신을계승해야한다.자비로운마음과사랑스러운미소로재치와지혜를나누며‘우리한가운데를걸어온’그는참으로놀라운사람이었다.그의정신이오롯이녹아있는『지명관일기』가소란하고혼란스러운지금,우리에게위로이자용기의근간이되어주길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