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겸재는 단지 걸출한 순수 문예인이었을 뿐일까?
조선시대 대표적 문예인을 둘러싼 기존 미술사학 평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제3탄!
조선시대 대표적 문예인을 둘러싼 기존 미술사학 평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제3탄!
〈추사코드〉(2016년) 〈추사난화〉(2018년)로 기존 미술사학의 추사 작품 해석에 대해 전복顚覆적 문제제기를 했던 화가 이성현이 이번에는 겸재 정선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한국과 중국을 포함해 동양의 서화 작품을 거듭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기 위한 일련의 작업 중 세 번째 결과물이다.(이후로도 저자는 필생의 사업으로 10여 권의 관련 서적을 집필할 예정이다.) 한국의 주류 미술사학계에서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문예인으로 겸재 정선을 내세우면서, 그의 진경산수화로부터 ‘진경문화’가 꽃피웠고, 그로써 서양의 르네상스를 방불하는 ‘진경시대’가 열렸다고 찬미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르네상스의 의미를 표피적으로 차용한 것일 뿐 아니라, ‘진경’과 ‘산수화’의 근본 개념에 대한 몰이해, 나아가 겸재가 실제로 놓여 있던 위치와 그가 표현해내고자 했던 작품의 본래 의도를 완전히 사상해버린 겉핥기 감상에 불과하다. 물론, 조선회화사에서 겸제 정선만큼 큰 족적을 남긴 화가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후기 문예의 특성을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규정하고, 이를 ‘진경문화’ ‘진경시대’로 확산시키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결국 조선후기 문화를 노론이 선도하였다는 주장에 다를 바 없다. 왜인가?
겸재가 조선회화사에 등장한 것은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 집안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하게 되면서였고, 이때 제작된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은 그의 금강산 그림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후 겸재는 평생토록 장동 김씨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전폭적 후원 아래 화업을 이어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술사가들은 겸재의 진경산수화에서 ‘진경’이란 말을 차용하여 조선후기 문화를 ‘진경문화’라고 하면서도 한사코 겸재를 노론의 화가라 부르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사가들 스스로 ‘진경문화는 조선중화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을 펼쳐왔고, 그 중심에 겸재를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겸재를 노론의 화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겸재 정선의 가장 큰 후원자가 장동 김씨들이었고, 장동 김씨들의 정치적 행보와 부침에 따라 겸재의 이력과 화업의 변화가 함께하였음은 수많은 자료들이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술사가들은 겸재와, 겸재를 점찍고 이끌었던 사천?川 이병연李秉淵 그리고 김창흡이 함께한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예인들끼리의 친교일 뿐, 정치적 만남이 아니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대과大科는커녕 초시조차 치른 적 없음에도 당상관까지 오른 겸재의 감투가 너무 무겁고, 예술가가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니, 이를 예술의 순수성을 헤치는 것인 양 쉬쉬할 일은 아닌 듯하다. 겸재 정선이 아무리 빼어난 화가라 해도 조선후기 회화의 특성을 그의 작품을 통해 규정하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다. 조선후기 화가들이 모두 겸제와 같은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도 아니고, 조선후기 문예계에 불어닥친 새로운 흐름이 회화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겸재가 조선회화사에 등장한 것은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 집안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하게 되면서였고, 이때 제작된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은 그의 금강산 그림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후 겸재는 평생토록 장동 김씨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전폭적 후원 아래 화업을 이어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술사가들은 겸재의 진경산수화에서 ‘진경’이란 말을 차용하여 조선후기 문화를 ‘진경문화’라고 하면서도 한사코 겸재를 노론의 화가라 부르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사가들 스스로 ‘진경문화는 조선중화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을 펼쳐왔고, 그 중심에 겸재를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겸재를 노론의 화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겸재 정선의 가장 큰 후원자가 장동 김씨들이었고, 장동 김씨들의 정치적 행보와 부침에 따라 겸재의 이력과 화업의 변화가 함께하였음은 수많은 자료들이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술사가들은 겸재와, 겸재를 점찍고 이끌었던 사천?川 이병연李秉淵 그리고 김창흡이 함께한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예인들끼리의 친교일 뿐, 정치적 만남이 아니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대과大科는커녕 초시조차 치른 적 없음에도 당상관까지 오른 겸재의 감투가 너무 무겁고, 예술가가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니, 이를 예술의 순수성을 헤치는 것인 양 쉬쉬할 일은 아닌 듯하다. 겸재 정선이 아무리 빼어난 화가라 해도 조선후기 회화의 특성을 그의 작품을 통해 규정하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다. 조선후기 화가들이 모두 겸제와 같은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도 아니고, 조선후기 문예계에 불어닥친 새로운 흐름이 회화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 : 다시 읽어내는 겸재의 진경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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