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는

우리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는

$14.00
Description
세상의 끝에 단둘이 남겨진 소녀와 노인
이 세계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두 사람의 모험
고블씬북 열네 번째 책

『우리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는』
아무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회색 세계에서, 소녀는 왜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는가. 제4회 SF어워드 중단편 부문 우수상, 제9회 비룡소문학상 대상에 빛나는 곽유진 작가가 처음으로 경장편 SF 환상소설을 선보인다. 소설은 현대적 분위기의 병원, 인류 대부분이 멸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사회, 영화 〈아바타〉를 연상케 하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외계 행성 등 다양한 배경을 넘나들며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펼쳐내는 메타적 연출을 선보인다. 겹겹이 중첩되는 이야기들 끝에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잔혹한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찌할 것인가.’ 좌절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멈춰버릴 것인가. 만약 이 세계의 본질이 절망이라면, 그 안에 갇힌 우리에게 이 모든 이야기가 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초현실적인 공간 배경과 인물들의 의식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가히 SF를 넘어 판타지/환상문학의 면모 또한 가졌다 할 만하다. 디스토피아를 다루면서도 동화처럼 아름다운 묘사와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따뜻한 감정 교류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것은,

회색 눈이 쉼 없이 내리는 세계 위로
썰매를 끌고 가는 소녀의 이야기,
그 썰매에 탄 노인이 들려주는
먼 외계에 사는 또 한 명의 소녀 모투나의 이야기

이들이 속한 세계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 모든 이야기는 어떻게 끝날 것인가
이제 병원의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노인이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이야기한다. “나 같은 노인을 보살피던 한 소녀가 있었다. (…) 소녀가 살던 시대는 세상이 한 번 무너진 시대였다.” 모종의 이유로 멸망한 세상. 모든 시계와 기계가 멈추었고, 끊임없이 내리는 회색 눈에 찬란했던 문명은 폐허가 되었다. 이제 간신히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이들은 지하철 역사 밑에 숨어 근근이 삶을 이어 간다.
어느 날, 소녀는 노인을 다른 지역에 있는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는 임무를 띠고 그와 함께 회색 세상을 횡단하게 된다. 소녀는 행동이 굼뜨고 답답한 노인이 성가시고, 무엇보다 그가 자신이 살아갈 미래를 망쳐버린 구세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증오스럽다. 그런 소녀에게 노인은 세상이 망가지기 전에 자신이 보았던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외계 행성의 헤르보렛사라 이름하는 깊은 산꼭대기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부족이 있다. 소녀 모투나는 부족을 대표하여 산아래 마을과 교역하고 적들을 물리치는 ‘순찰자’의 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모투나의 부족은 커다란 위기에 처하고, 모투나는 마침내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가 깊어가는 동안 서로 적대하던 노인과 소녀는 점점 가까워지고 저마다 상대방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나 쉼 없이 내리는 회색 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목적지가 가까워 옴에 따라 노인과 소녀의 이야기는 곧 끝이 날 참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결말에 도달할 것인가.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야기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이 세상에서 잊혀 가는 모든 이야기에 바치는 헌사
작품 속에서 노인의 이야기는 어느 백화점에서 시작한다. 회색 눈보라와 어둠을 피해 찾아 들어간 한 폐허. 과거에는 백화점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파는 곳이었노라고, 노인은 소녀에게 알려준다. 그곳에서 발견한 빛바래고 반쯤 찢겨 나간 광고 사진 한 장을 어루만지며 노인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 사진 속 아이가 딱 한 번 주인공 ‘모투나’ 역으로 출연하였다는 영화에 대하여.
저자 곽유진은 「작가의 말」에 쓴다. “소설은 분명 작가가 쓴 허구의 문장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때때로, 아니 대부분 다른 무언가가 되어 제멋대로 살아 움직인다. 그렇기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어느 작가는 소설을 아이라 칭한다.” 소녀와 노인의 우정과 모험 서사에 집중하는 외에도 우리는 이 소설을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읽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희박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서로 닮은 이야기들이 우리 곁을 빠른 속도로 스쳐 간다. 그중 많은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얻지 못하는 이야기들은 쉽게 잊힌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사라져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의 이야기가 창조자의 손을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순간, 이야기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순간을 꿈꾸며.
우리 곁에 머물렀다 사라져 가는 이야기와 이야기꾼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가득 담긴 소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는』 을 ‘이야기의, 이야기에 의한, 이야기를 위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저자

곽유진

통영에서태어나바다의아름다움과조선소의웅장함을동시에보고자랐다.「어머니들의아이」로2017년제4회SF어워드중단편우수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꽝없는뽑기기계』로2019년제9회비룡소문학상대상을수상했다.SF앤솔로지『당첨되셨습니다』(비룡소,2021)『이토록아름다운세상에서』(현대문학,2022),동화앤솔로지『나는빛나는3학년이야』(위즈덤하우스,2025)에참여했다.

목차

우리가우리에게이야기를들려준이유는

작가의말:내가아이를쓴이유는

출판사 서평

제4회SF어워드중단편우수상
2020비룡소문학상대상수상작가
곽유진의SF환상소설소설을읽는간호사를보았다.공원에내리는나른한햇살아래에서간호사는낡은책에적힌글자하나하나를입술을움직이며읽었다.이따금불어오는바람에눈을살짝찡그릴뿐,꾸며낸세계에빠져이곳의풍경이나소음따윈잊은듯보였다.간호사는이내나를발견하고미소지었지만나는급히고개를돌렸다.소설이라니.소설따위라니.

이제열일곱살이라는간호사는내성질에도아랑곳하지않고작은목소리로재잘거렸다.“저는소설을좋아해요.꾸며낸이야기따윈시시한세상이죠?그래도소설이좋아요.”

나같은노인을보살피던한소녀가있었다.그시절여느소녀처럼당찼으며동시에차가웠고,모두를사랑했으며모두를미워했다.이제돌이켜보니그역시그소녀가익힌살아남는법.소녀가살던시대는세상이한번무너진시대였다.그시대가어떻게무너졌는지,왜무너질수밖에없었는지는굳이이야기하지않겠다.소녀와내가겪은일을떠올리고이야기하기에도내몸과마음은너무나지쳤으니까.그저어느날세상모든시계와기계,전선에흐르던전기가멈춘때,인간들이사랑하던도시와문명이무너졌던시대,회색눈이끊임없이내리던시절이라는사실만이야기하겠다.

먼곳에서들려오는소음에소녀는눈을떴다.어둠속에서소녀의갈색눈이반짝였다.소녀는눈도한번깜빡이지않으면서조용한걸음으로창문에다가갔다.그걸음은너무나차분하여서소리가조금도들리지않을지경이었다.오랫동안도시를횡단하면서생긴버릇이고생존법이었다.누가알려주지않아도스스로익힌몸짓.소녀는제목에목걸이처럼걸고있던쌍안경으로먼곳을관찰했다.쌍안경이라고는하지만한쪽렌즈는이미오래전에깨졌고한쪽만이겨우제기능을하고있었다.소음의정체는언제나그랬듯,낡은건물에쌓인눈덩이들이아래로쏟아지는소리였다.하지만소녀는혹시나모를위협을생각하며신경을곤두세웠다.이도시를서른두번이나횡단하면서위협이될만한존재를만난적은많지않았지만말이다.하지만지금은사정이다르다.걸리적거리는짐이하나있지않은가.

지금은회색눈보라에파묻힌이곳이사람이사는진짜도시일때의모습을소녀는한번도본적이없다.지금뒤를따르는노인이나진짜도시의모습을기억할까.누구에게도묻지않았고,그누구도들려준적이없었다.도시가도시이던시절의이야기를.

-다른층으로는가지않는게좋겠어.백화점은창문이없거든.어두울거야.
-왜지?창문이있어야물건들을자랑할수있는거아니야?
-아니야.창문이없어야사람들이해가지는줄도모르고물건을사지.
-흥.역겨워.
소녀는역겨워,라는세음절에힘을줘서말했다.그끝에는당신같은노인네들이편하게살았던시절도포함해서,라고덧붙일생각이었다.노인이웃음을터뜨렸다.
-맞아.역겨웠지.
노인의말에소녀는말문이막혔다.

모투나는허리춤에달려있던손도끼를천천히움켜쥐었어.두손으로도낏자루를쥐고비틀듯이힘을주기시작했어.그래야힘이완벽하게전달되거든.머릿속에선족장이모투나를훈련시킬때했던말이떠올랐어.‘새의아이야,적에겐내발걸음소리가세상에서제일크게들리는법이란다.적이듣는첫소음은그의비명소리여야한단다.’

하지만소녀는한번도움직이는시계를본적이없다.소녀가태어나던해에세상모든시계는멈췄으니까.시계도시간도이해할수없었다.그럼에도영화는떠올릴수있었다.하얀눈이가득쌓인숲속을순찰하는순찰자.손에는작은도끼가들려있다.그도끼는비록작지만순찰자에겐그무엇보다도든든한무기였다.이무기를손에꼭쥐고있다면어디든다녀올수있을것만같았다.손에닿는도낏자루의감촉을상상하니쓸쓸함이조금가셨다.숲에는종종이름모를동물이뛰어다녔고순찰자는가끔그풍경을혼자감상했다.순찰을마치면집으로돌아가야했지만그곳이라고따뜻한모닥불과아늑한사람이있는것은아니었다.소녀가속삭였다.
-내가모투나였다면떠났을거야.바다멀리,크고크신새가고래를찾아갔다던그바다로.
마침눈보라가백화점을흔들고멀리달아나고있었다.그진동을느끼며소녀는잠이들었다.

-그건나도몰라.그후엔누구도그아이를본적이없으니까.아무도찾지않는이야기는그렇게사라지는거야.아무도보지않은채끝난영화처럼말이야.시간이흐른뒤누군가는잠깐궁금해했을수도있겠지.‘아그런영화가있었지’‘아그런영화에그런배우가나왔었지.맞아.그게첫주연작이었어.그런데연기를참못했어.영화도형편없는삼류였고.그런데그아이는어디에서뭘하고있을까?그땐인기가그렇게많았는데.’

소녀는노인이준초에라이터로불을붙이고지하계단을찾아건물안으로들어갔다.계단이향하는지하에는너무나검고깊은어둠이차있었지만,소녀는심호흡을했다.코로숨을들이마시고입으로길게내뱉었다.계단을내려갈수록지상에서들어오는햇빛은점점옅어졌다.이어둠속에서연약한불빛하나에만의지해야한다니.다시는돌아올수없는모험을떠나는듯한두려움과설렘이동시에소녀에게달려들었다.괜찮다.나쁘지않다.두려움에도소녀는차분하게발걸음을옮겼다.어둠속에낯선존재가숨어있을지도모르니까.그에겐지하에들어온내발걸음소리가세상에서제일크게들리니까.

우리는죽을때마다모든이야기를잊어버리지.우리가누구였는지,무엇이되고싶어했는지.하지만난별종,회색늑대같은돌연변이일까?끝없는두갈래길이있어.한쪽은사라지는이야기가가는길,한쪽은새로태어나는이야기가가는길.그갈림길가운데에이돌연변이가서있지.그게내이야기야.이제이이야기가내게오고만의미를알수있어.

또하나의아이가나왔다.나는또아이를쓰겠지.그리고독자들도여전히아이를읽겠지.
수많은오락이넘치는시대에굳이아이를찾은독자.
수많은소음이넘치는순간에굳이홀로고요한아이를읽어내는독자.
이아이의해답을찾기위해작가의말을펼친독자.
모두에게작은구원이있기를바란다._「작가의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