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 타락론 외

백치 · 타락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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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일본 현대문학의 선구자, 사카구치 안고
전후 일본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 선집.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 이시카와 준 등과 ‘무뢰파(無賴派)’라 불리면서 전후 일본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독자적인 작풍을 선보였으며, 전쟁 후 일본의 새로운 출발점을 통찰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간장선생〉의 원작자로 알려진 안고의 몇몇 작품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긴 했으나 그의 다채로운 문학 세계를 균형 있게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다. 이 책은 안고의 문학관과 사상을 보여주는 두 편의 산문 외에도 일곱 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자전적 소설, 우화 소설, 설화 소설, 평론적 산문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이며, 일본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부터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유머,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동화적이고 신비로운 전개와 결말로 담아낸 이야기 등 자신의 독보적인 세계관을 다양한 빛깔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

사카구치안고

저자:사카구치안고
1906년니가타신문사사장이자시인아버지의아들로태어났다.도요대학인도철학과재학중에동인지《말》을창간한다.1931년발표한〈찬바람부는술창고에서〉,〈바람박사〉등이유명작가마키노신이치의격찬을받음으로써신진작가로급부상한다.이후문단의주목을받지못하고방랑의나날을보내다전후일본의상황을통찰한〈백치〉와〈타락론〉을발표하며큰반향을일으킨다.대표작으로〈간장선생〉,〈돌의생각〉,〈벚나무숲속만개한꽃그늘아래〉,《불연속살인사건》등이있다.

역자:최정아
한국외국어대학교영어학과를졸업하고같은학교통번역대학원에서한일어통역을전공했다.일본나라여대인간문화연구과에서〈아쿠타가와류노스케중기크리스찬물연구〉로박사학위를받았으며,현재광운대동북아문화산업학부교수다.일본근대개인의자아관념형성과정및국가주의에대한문인들의사상적대응방식을주로연구해왔으며,탈근대일본대중문학에관심을갖고있다.논문으로〈일본근대문학에서의기독교의수용과변용〉,〈아쿠타가와의명치문명개화기문명관〉등이있다.

목차

돌의생각
어디로
나는바다를껴안고싶다
백치
타락론
속타락론
바람박사
한바탕마을소동
벚나무숲속만개한꽃그늘아래

작가인터뷰
작가연보

출판사 서평

위대한낙오자의고독이길러낸육체의사상

사카구치안고의문학세계는흔히‘육체의사상’으로표현된다.그는일본이아시아전체,나아가서는전세계를목표로침략전쟁을벌이던시대의도덕과정신을불신했으며,이들이인간을조작하고억압하며이용하기위해만들어진것임을통찰했다.따라서인간본연의영혼에이르는통로는육체와감정임을자신의소설과문학론을통해역설한다.

단편〈어디로〉에는육체와감정을통해인간의영혼을발견하려는작가의노력과좌절이드러나있다.또다른수록작〈나는바다를껴안고싶다〉는마침내발견한인간영혼의아름다움을표현한다.저자스스로도문학은이성과논리,사회의규범과가치체계를부정하는것에서출발한다는관점에서가족과집,고향이갖는선험적가치로부터이반〔〈돌의생각〉〕할필요를느끼고평생방랑과낙오자의삶을살아간다.말년에공권력을상대로격렬한투쟁을벌이기도한그는소설을통해서만이아니라삶전체를통해이러한‘부정’을실천했다.

이선집에는안고의강렬한현실인식을보여주는작품외에도문학적으로독창적인작품도실려있다.소극(笑劇),광대극을뜻하는파스farce의특성과효과에착안한소설론인‘파스론’에입각하여쓴〈바람박사〉와〈한바탕마을소동〉이그것인데,이작품들은논리나지성이배제된,황당무계한공상이만들어낸현실과인간의묘사를통해어리석어보이는인간에대한한없는애정과긍정을드러낸다.

타락하라,그리고살아라

전후에발표된〈타락론〉과〈백치〉는문단에서거의사라진안고를다시부각시켰다.〈타락론〉은인간에게주어진정신적가치는그사회의지도층과권력층이권력과체제유지를위해창조한것이며인간을왜곡하고조정하기위한것임을논한다.따라서패전은슬퍼할일이아니라날조된가치를일거에허물수있게해준위대한파괴라는것이다.그런점에서전후일본사회는정신적가치의강조로인해가려진인간본연의영혼을회복하고직시하여구원에이를수있는새로운출발점을모색할수있음을주장한다.

〈백치〉는육체적쾌락에빠진한백치여자와궁핍한현실속에서허덕이던주인공이자와가우연히함께살게되며일어난일을그린다.앞날을계획할수없는전쟁통속에서둘은피난을떠나게되는데,삶의의욕과희망을잃고기본적인욕구만남은이자와의모습이흡사피난길에서도졸리다고자버리는백치를점점닮아가는듯보인다.

책속으로

그래서나는아버지의사랑따위에대해서는아무것도알지못한다.아버지가없는아이는오히려아버지의사랑에대해많이생각하겠지만내게는아버지가있었고,그아버지와는한달에한번정도불려가먹을갈아주는관계이며,아버지의우거지상을보고심기가불편해지고그러다뭔가잔소리를듣고는화를내며돌아서나올뿐이었다.그랬기에‘아버지의사랑’같은말은우스꽝스럽게여겨질만큼나와는무관한것이었다._〈돌의생각〉8p

여자의몸이내방에기거하는일만은막을수있었지만어차피오십보백보다.냄비와솥,식기가살기시작했다.내영혼은퇴폐하고황폐해졌다.이미여자를소유해버린나는식기를방에서몰아낼만큼의순결에대한정절을상실해버렸다.나는여자가앞치마를두르는것을좋아하지않는다.총채질하는모습따윌보고있느니차라리길거리에나가귀신같이생긴여자걸인을보는편이낫다고생각한다.방에먼지가한뼘이나쌓여있다해도여자가그걸쓸어내기보다그냥먼지속에앉아있어주길바란다._〈어디로〉44~45p

나는옛날부터행복을의심하고그것의작음을슬퍼하면서도동경하는마음을어찌할수없었다.그런데이제야겨우행복과손을끊을수있으리라느낀다.나는이제다시처음부터불행과고통을찾아나서는거다.이제행복같은건바라지않는다.행복같은건사람의마음을진정으로위로해주지못하기때문이다.행여조금이라도행복해지려는생각따위는해선안된다.인간의영혼은영원히고독한것이니까.나는아주위세좋게이런염불같은생각을했다._〈나는바다를껴안고싶다〉87p

“죽을때는이렇게둘이서함께하는거야.그러니까무서워하지마.그리고내게서떨어지지마.불도폭탄도다잊어버려.우리두사람의인생길은언제나바로이길인거야.이길을그냥똑바로쳐다보면서내어깨에기대따라오기만해.알았지?”여자는‘응’하고대답하듯고개를끄덕였다.그끄덕임은치졸했으나이자와는감동에겨워미쳐버릴듯한기분이었다.아아,길고도긴,몇번에걸친공포의시간,주야로이어진폭격아래서여자가처음으로표명한첫의지였으며단한번의대답이었다.그것이너무측은하여이자와는돌아버릴것같았다._〈백치〉120p

전쟁에졌기때문에타락하는것이아니다.인간이기에타락하는것이며살아있기에타락할뿐이다.허나영원히타락하지는못하리라.왜냐하면인간의마음은고난에대해강철같지못하기때문이다.인간은가녀리고위약하며,그때문에어리석은존재지만완전히타락하기에도너무약하다.인간은결국처녀를살해하지않을수없을것이고,무사도를짜내지않고는못배길것이며천황을들먹이지않을수없게될것이다.그러나타인의처녀가아닌자신의처녀를살해하고자신의무사도와자신의천황을고안해내기위해서는사람은올바르게,타락해야할길을온전히타락할필요가있다._〈타락론〉14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