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큰글자도서)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큰글자도서)

$24.00
Description
‘현실’ 그 자체를 정면으로 파고드는 작법 스타일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온 김이설의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 ‘소설, 향’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가족을 둘러싼 절망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통해 오늘날의 가족의 의미를 진지하게 모색한 첫 장편 『나쁜 피』로 2009년 동인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오르며 크게 주목받은 김이설 작가는 당시 “간결하고도 긴장감 넘치는 문체로 첫 문장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솜씨가 일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가장이자 어머니이자 여자인 윤영의 고군분투를 담은 『환영』, 외형상의 흉터로 인해 가족과 불통하게 된 여자의 이야기 『선화』까지, 그의 소설들은 우리가 가족에게 기대하는 환상과 허위를 적나라하게 들추고, 개인의 삶과 존엄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져왔다.
『선화』 이후 6년 만의 신작 경장편인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에서는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의 족쇄에 발이 묶인 한 여성의 숨 막히고도 진저리나는 일상들이 펼쳐진다. 때론 고통스럽고 참혹하기까지 한 삶을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이러한 현실 직시를 통해 좀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이라는 희망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몇몇 문장과 장면에서 눈길이 멈출 때마다, 잊은 척했던 환멸이 속에서 치받쳐 오른다. 그런 상태를 감내하고 통과해본 사람이 알 수 있는 감각”이라는 구병모 소설가의 말처럼, 지리멸렬한 일상의 파편들과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주는 극명한 대비는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며 잊을 수 없는 감각을 새겨 넣는다.

그러니 오늘 밤에도 써야겠다.
오늘도 달리고 있는 당신들의 흙먼지와
흙먼지 속에서 기어이 피어오르는 우리의 언어에 대해서.

_김이설, 「작가의 말」에서
저자

김이설

2006년《서울신문》신춘문예에단편소설「열세살」이당선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아무도말하지않는것들』『오늘처럼고요히』,경장편소설『나쁜피』『환영』『선화』등이있다.

목차

우리의정류장7
목련빌라17
필사의밤53
치우친슬픔이고개를들면95
여름그림자123
시인의밤153

우리의문장을싣고달리자-구병모175
작가의말189

출판사 서평

중력반대방향으로고개를쳐든작은싹,
고단한시절의복판을통과중인우리들이써내려가는
가장보통의희망에관한이야기

하루의일과란매일이똑같았지만어느하루도같은날은없었다.다른것들이란주로아이들에관한것들이었고,같은건시를쓰지못한다는것뿐이었다.나는몇년째오로지필사만하는중이었다._본문55쪽

‘나’는낡고오래된목련빌라에서일흔이다되어가도록평생기운이없는사람이었던아버지와,무기력한가장을대신해집안의모든결정을도맡아온어머니,남편의폭력을피해세살과갓백일지난아이를품에안고집으로돌아온동생과함께살아간다.넉넉하지않은집안의장녀로태어나,똑똑하고야무져늘전교상위권을유지하는동생과는달리한번도무언가가되고싶다거나애써노력을기울여본적이없던나는어느날자신이보통사람들이추구하는일반적인삶의방식에는관심이없다는것을깨닫고,가슴속에서무언가꿈틀거리는것을발견한다.그것은바로‘시’를쓰고싶다는것.그러나현재의나는동생이다시집으로들어온3년동안시를쓰지못하고있다.낮밤으로회계사무와학원강사일을병행하는동생을대신해육아는결혼도하지않은나의몫으로고스란히남았던것이다.

마음처럼되지않는글이,아무짝에도쓸모없는나의전공이,마흔살이라는중압감이,그럼에도불구하고두조카들에게꼼짝없이손발이묶인나의현실이,내가자처한족쇄에엉켜탈출할수도없는이집이,나에게는육중한관처럼느껴졌다._본문42~43쪽

식구들이졸지에아이둘을키워야하는상황에놓이자아버지는물론엄마마저다시일을시작했고,나는자연스레집에머무는사람,즉집안일을담당하는사람이된다.그것은나스스로가자처한족쇄이기도했다.뒤늦게라도대학에가라고학자금대출까지책임져준동생이었다.게다가가족은공동희생구조가아닌가.희생의경중은엔분의일로정확히나눌일이아니었다.이들여섯가족은,여섯살네살아이들마저도각자가짊어진생의무게로숨을허덕이기에바빴다.

며칠째읽고있는시집과필사노트,
흰종이와잘깎은연필한자루
“그러나지금은잠시만이라도
나는나로살고싶었다”

그누구보다도열심히집안일을했지만나의노력은너무쉽게보잘것없는것으로전락되었다.내가식구들의일상을위한도구로사용되는것에화가났다._37~38쪽

‘오늘은쓸수있을까.’그러나나의눈앞에는‘끔찍하게지루한’일의반복만이놓여있다.나의다짐은아이들물건이널브러진거실,부엌에쌓여있는설거지,김치용열무세단,아이들이벗어놓은옷가지와오줌싼이불로수북한하루치의빨래앞에맥없이무너지고만다.가족들의행복과안위를위한,의미없는희생만은아니라고생각하면서도나는자신이식구들의일상을위한도구로사용되는것에화가치민다.아이들을키우기위해8년을만나온연인과도이별한참이었다.나는살면서주인공인적이없었던것처럼,이제야어쩌면자신과잘어울리는상황에놓인것같다며자조하지만,자신의노력이너무쉽게보잘것없는것으로전락된다는사실에절망한다.

가슴깊숙이어딘가가뻐근한기분이들었다.멀리사이렌소리가들렸다.이밤에아픈이가또있는모양이었다._142쪽

가족이라서,또는가족이기에더한상처와폭력을휘두르는현실을견디기위해화자가선택한방법은바로시를필사하는것.그마저도녹록지않은밤들이더많았지만나만의언어를찾겠다는,그러지않으면이대로죽어버릴것같다는절박함과절실함으로화자는필사노트를펼쳐시집의한페이지를한글한글자베껴써내려간다.

몇번의봄을,
몇번의여름과가을과
몇번의겨울을보낸뒤……
눅진하고습한밤의시간들을지나온,
마땅히눈부실너와나의계절들

네인생이실패한것이아니라그저터널을통과하는중이라고.터널은결국끝이있고,그끝은환하다고._78쪽

하루에도몇번씩울려대는재난문자경보,온세상을잡아먹은것처럼이어지는미세먼지의나날들.그속에서여섯식구가창문도열지못한채복닥거리며살아가는집은나로하여금마치사방이막힌상자,때로는육중한관속에갇힌기분이들게한다.
작가는한인터뷰에서이소설을두고이른바‘K장녀(Korea+장녀)에대한서사’라고말한바있다.시인지망생인‘나’는40대비혼여성이고장녀로,여동생의이혼으로곤궁에처한집안을위해조카들의‘돌봄노동’을맡는다.그리고각종집안일에시달리며자신에게집중할시간은조금도주어지지않는다.‘조용히,쓸쓸히,오롯이,가만히,차분하게’같은단어들을누릴수없는일상,시를필사하는일조차건너뛰는날들.그러나가사노동의무미함과고단함보다도나를더욱좌절케하는건,‘나’의노력과수고가경제적가치로환산할의미조차없는일,능력이없어스스로주저앉고떠맡은일,‘누구나할수있는일이어서아무도하기싫은일’로치부되고만다는사실이다.우리가화자의상황에처한다면다른어떤선택을할수있을까.

오늘은그래서그런시를쓰고싶었다.생의끈질긴얼룩과여름소나기에대해서,그소나기끝에피어오르는흰구름에대해서.나는지금여기있다는것에대해서._본문171~173쪽

소설에서는남의시를베껴쓰는것에서한걸음더나아가,좁아터진목련빌라의한구석에웅크리고앉아자신만의시를쓰기로용기를내기까지의지난한과정이정밀한소묘화처럼사실적으로그려진다.‘오늘은쓸수있을까’하고되뇌던눅진하고습한밤의시간들이‘오늘은그래서쓰고싶었다’라고발화하며자신에게몰입하는충만한하루로이어지기까지,이번의정류장이다음승차의어느목적지를향할지는확신할수없지만,한동안은계속되기를바라본다.나는잠시만이라도,진정한나자신으로살고싶다는열망을되찾은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