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왕진의사 양창모 에세이 | 병원 밖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왕진의사 양창모 에세이 | 병원 밖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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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어떤 아픔은 병원에 닿지 않는다”
강원도 왕진의사가 기록한 가장 먼 곳의 통증들
‘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것이 상식인 세계에서는 병원에 닿기조차 어려운 아픔을 짐작하기 어렵다. 의사를 만나러 가는 일이 아픔을 참는 일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소외된다. 왕진의사 양창모의 첫 책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는 한 평 반짜리 진료실 안에선 보이지 않는, 가장 먼 곳의 통증에 대한 이야기다. 가파른 산길과 고개 넘어 도착한 마을들에는 돈이 없어서,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차편이 없어서… 수많은 ‘없어서’ 때문에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없어서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들의 집을 방문하고 그 사연에 귀를 기울이며 저자는 진료실이라는 공간에서 너무 쉽게 제거되는 삶의 ‘맥락’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맥락이야말로 환자를 치료하는 데 꼭 필요한 정보이며 의사와 환자 사이에 흘러야 할 소통의 원천임을 절감한다. 손가락의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할머니의 관절염은 몸 자체가 아니라 한겨울에도 찬물에 손빨래를 할 수밖에 없는 삶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반신 마비로 거동이 어려운 할아버지를 진료실에서만 만났다면 그가 병원으로 가기 위해 엉덩이를 끌면서 큰방에서 현관으로 가는 것, 그걸 위해 집에 있는 문턱이란 문턱은 다 깎아놓은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600회가 넘는 왕진을 통해 한국에서 남의 집을 가장 많이 드나든 의사 중 하나가 된 저자는 치열한 성찰과 따뜻한 시선으로 써 내려간 56편의 글을 통해 말한다.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질병’이지만 왕진에서 마주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잠을 깨우는 소리에 찌푸린 얼굴을 하며 ‘누구요?’ 하던 박 할머니는 막상 우리 얼굴을 보고는 정말 반가운 웃음을 지으신다. ‘어이구, 의사 선생님 오셨네!’ 근 두 달 만에 뵈는 건데도 내 얼굴을 알아보셨다. 1, 2초 동안 사람의 표정이 그렇게 달라지는 걸 보면서 나라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그토록 반가운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막연한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_82~83쪽
저자

양창모

저자:양창모
강원도의왕진의사.
경희대학교의과대학을졸업하고이웃의평범한일상을지키며가까이오래있고싶어서가정의학을전공했다.국가보다한사람의이웃이훨씬중요하다믿고시민이병원의주인인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의사생활을시작했다.
한사람의이웃으로지역에서이런저런시민사회활동을해왔다.등떠밀려앞으로나간적이몇번있으나모임에선주로맨뒷자리에앉는다.
춘천에서10년간일했던병원을그만두고시골어르신들댁을찾아가는‘호호방문진료센터’를시작했다.전공의시절부터지금까지600회가넘는왕진을가다보니한국에서남의집문턱을가장많이넘나든의사중하나가되었다.동네에서욕먹지않는의사로살아가는게꿈이다.

목차

프롤로그

1.찾아가야보이는세계
6분의오디션
추억은방울방울
멀미
매운냄새
가까이오래
가난하지않다
서로다른시계
선을넘지않는다는것
대체불가능한사람
태장동할머니(1)-내가만난숲
태장동할머니(2)-거미줄
태장동할머니(3)-구름의발자국
숯이놓인방
두가지마술
말없이하는말
따듯한통증
어둠속에있어야보이는것들
탁류속행복
날개를감추다
빛나는여백

2.어른거리는얼굴들
민할아버지의수난극
쓰잘데기없는의사
코끼리는움직일수있다
할아버지의산나물
기적
산소통없이
주스한잔
반성문
후배가찾아왔다
사라진구멍가게
메아리
병주고약주는
질문합시다
요양원풍경
마음의속도
나를잡은항생제
월식
사람을사람답게만드는사람들
내가할수있는작은일
10분
내몸이아플때

3.우리를마중하는세계
무통사회
운이좋다면노인이된다
간병을거부할자유
지역의사가보는‘지역의사제’
싸움이후의시간
의사들의힘이나오는곳
두종류의전문가
미세먼지수치가말하지않는것
황소개구리
혈당54
오솔길에대한예의
우리가빛의속도로내릴수없다면
작은공간의행운
뚜껑열리는소리
진료실문을열고나오면

출판사 서평

좁은길과높은언덕넘어
질병아닌‘사람’을만나다

몸이아파병원을찾아본사람이라면한번쯤환자와의사사이에놓인보이지않는벽을느낀다.이름이불리고진료실안에들어서면누가등을떠미는것도아닌데금방얘기를끝내고나가줘야할것같다.의사는좀처럼환자의얼굴을보고말하지않는다.환자보다모니터의차트와사진을보면서얻을수있는정보가더많다고판단하는것은지극히짧은진료시간을효율적으로쓰기위해불가피한일이다.하지만왕진을가면얘기가달라진다.환자는‘한사람’으로자신의삶속에앉아있다.벽에걸려있는가족사진하나만눈에들어와도그는이미특정질환이아니라한명의사람으로의사에게받아들여질수밖에없다.그러니과잉진료나3분진료가불가능하다.왕진이환자의입장에서도물론필요하지만의사에게도절대적으로필요한이유가이것이라고저자는강조한다.“왕진을경험하고나면다시진료실로돌아간다하더라도절대같은의사로돌아갈수없기때문이다.”(90쪽)
이책의1부‘찾아가야보이는세계’는그왕진이라는경험이알려준‘진료실너머’에관한기록이다.여기저기안아픈데가없는여든의노인이고작‘멀미’때문에몇년째병원을못가고있다는이야기를말로만들었을때는의아했지만,높은고개를넘어실타래처럼꾸불꾸불한길을지나다속이울렁거려차를잠시세우고나서야저자는노인을이해하게된다.당뇨에중풍,치매까지동반된남편에게아침저녁으로인슐린주사를놔줘야하는아내는눈이침침해주사기의단위를읽을수없고,결국저자는이노부부의이웃에사는다른당뇨환자에게할아버지의주사를부탁하고나온다.굳어진무릎관절탓에몇년간바깥구경한번을못한할머니의골방엔지린내를없앤다고자식들이갖다놓은숯이덩그러니있다.이러한삶의맥락속에놓여있는환자를의사가그저모니터안의차트가말해주는‘질환’으로치환하기는어렵다.

“마을주민들간의관계가어떤지는통증주사를놓아보면대번에안다.통증주사를맞고있던신할머니가그런다.‘여기옆집송씨도허리가아파서애를쓰잖아.허리아프다면서일을할건다해.’거기를가보란얘기다.송할머니집에가면또그런다.‘이위에윤씨있잖아.그이가그렇게무릎이아픈가벼.’(…)서로가서로를돌봐준다는것은이런것이었다.”_42쪽


‘의사놈들’과‘의사선생님’사이
어른거리는얼굴들

저자가의사생활내내왕진만했던것은아니다.2부‘어른거리는얼굴들’에서는평범한봉직의로일하는동안마주쳤던사람들,고민했던문제들,‘의사놈들’과‘의사선생님’사이의후회와반성이때론격렬하게,때론담담하게그려진다.“2분마다환자가들어오는곳에서정성어린진료를하려면인공지능수준의판단력과부처님수준의마인드컨트롤이동시에가능해야한다”(118쪽)고저자는말한다.좋은의사가되려는마음과달리한국사회의의료현실은그를차갑게시험한다.진료실밖에환자들이밀려있을때면당장앞에있는환자를빨리내보내야한다는생각에사로잡히며그는괴로워한다.‘의사로서정말이게바닥일까.’하지만그에겐‘어른거리는얼굴들’이있었다.아직냉기가가시지않은봄산에올라가직접딴나물을건네주는할아버지의딱딱한손,새벽부터개천주차장구석에서야채를팔다병원문열자마자약을타러와서는얼른가봐야한다고재촉하는할머니의빠듯한하루,오르막길에서당신몸보다더큰리어카를두고어찌할지몰라하는노인들이병원까지걸어왔을시간….저마다고단한삶을살아내려애쓰며아픈몸을다독이는이웃들의풍경은‘좋은의사가되려면먼저좋은이웃이되어야한다’고마음먹게만든다.
처음의사생활을시작한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의이야기도나온다.동문모임에가서의료생협에서일한다고하면“그게뭔데요?”라는시큰둥한반응들이지만,동일한가정의학과전문의들이받는것의절반도안되는월급으로일한다고말하는순간분위기는반전된다.차로한시간넘는거리를일부러찾아와통증치료를받는노부부가복숭아를보내줬다는이야기에는무반응이었던이들이갑자기저자를존경하는듯바라보는것이다.돈이지배하는병원이싫어서시작하게된일에대한가치도돈으로저울질되는아이러니.자신이하는일이어떤‘뜻’이전에물질로교환되기어려운행복으로지탱된다는걸어떻게알릴수있을까.그리고3년후원주의료생협은전국에서동일질환으로처방하는약의개수가가장적은상위5퍼센트병원에든다.‘어른거리는얼굴들’을보지못했더라면불가능했을일이다.

“질병을치료하는것이의사의역할인것은분명하다.열은떨어져야하고기침은줄어야하고산소수치는정상화되어야한다.하지만진료실안에서내건너편에앉아있는사람이환자로서만있는것이아니듯진료실안에서나또한의사로서만있는것은아니다.아픈사람과,그아픈사람에게도움을주고싶은또한사람이진료실안에함께있는것이다.그안에서는어쩔수없이질환에대한치료뿐만아니라인간적인상호작용이일어날수밖에없다.그리고때론그상호작용이질병을치료하는것보다환자에게더큰의미가되고그럼으로써의사본인도큰의미를갖게되기도한다.”_180쪽


세상의중심은‘중요한사람’이아니라
‘고통받는사람’이어야한다

드러나지않는고통,보이지않는세계쪽으로움직여온저자의삶은‘공고한엘리트?기득권계층’이라는의사에대한세간의관념을깨뜨린다.“환자들은진료실을나가도환자로서의삶이끝나지않는다.그런데왜의사의역할은진료실을나가는순간끝나는걸까.”(284쪽)지금여기의공동체에던지는저자의근본적인질문은3부‘우리를마중하는세계’에서더명료해진다.사회적고통에대한태도는그사회자체를보여주는지표라고그는말한다.아픈사람이움직일때통증이일어나는부위에온신경을집중하듯이사회가변화의방향을정할때는그사회의가장아픈곳을최우선적으로생각해야한다는것이다.2020년논쟁의중심이됐던의사파업과의대생들의고시거부,지역의사제공론화등을바라보며저자는‘밥그릇싸움’이후의시간에대해묻는다.국가와의료의본질적인역할이무엇인지,‘의사’라는직업이가지는힘은어디에서나오는지,그힘이시민들의건강에고스란히연결되려면무엇이달라져야하는지묵직하고도날카로운목소리를던진다.

“공공의료의결여가누군가에게는추상적인얘기일수도있지만이들에게는구체적인고통이다.(…)지난수년동안할머니의집을방문한사람은최근의나를제외하면딱두사람뿐이었다.요양보호사와이상한사람(병원브로커로의심되는그는원하지도않는한의원진료를보게해서할머니를화나게만들었다).행정계획을세우는이들이제일먼저해야하는일은여기에와서현장을보는일이고그들의목소리를듣는것이다.왜냐하면시골집에갇혀누워있는분들의목소리는결코복지공무원의책상머리까지들리지않기때문이다.”_219~220쪽

한사람의건강을넘어한사회의건강을회복시키기위해‘할수있는작은일’들을찾아나서는저자의일상은시민사회곳곳으로넓어지는동시에‘가장아픈곳’으로수렴되기를반복한다.생활방사능문제로시청앞에서일인시위를하고,골프장반대농성을위해도청앞에서밤새천막을지킨다.아파트동대표에홀로입후보해관리사무소직원들의최저임금문제로토론을벌이기도한다.세상사람들이흔히상상하는의사의길과는조금다른방향에서그는막다른골목에낙심하다이웃의손길하나에다시일어서고,또다시한계를실감하는순간슬픔에잠기다가도‘마음이있으면길은보인다’고믿으며왕진가방을챙긴다.보이지않는곳에웅크린아픔이있듯보이지않는마을에이런의사가있다.사랑이니휴머니즘이니하는것들이떠나간듯한시대,《아픔이마중하는세계에서》는사랑과인간을믿는한의사가‘평범한이웃들’에게보내는첫번째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