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집(큰글자도서)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 안희연 산문집)

단어의 집(큰글자도서)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 안희연 산문집)

$29.00
Description
가장 비문학적인 단어들에서
가장 문학적인 순간을 길어 올리는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따뜻한 허밍
시인은 단어를 ‘산다(live)’고들 말한다.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부터 2020년 펴낸 세 번째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까지 맑고 세밀한 언어로 사랑받아온 안희연도 날마다 수많은 단어들의 안팎을 ‘살아간다.’ 그에게 머무는 단어들은 얼핏 보기엔 시인의 노트에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적산온도, 내력벽, 탕종, 잔나비걸상, 선망선, 플뢰레, 파밍, 모탕…. 8시 뉴스나 신문의 과학·기술 섹션에서 본 듯한, 혹은 학술·전문 콘텐츠에 나올 법한 단어들. 평소 잘 쓰이지 않아 그 뜻이 한 번에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 신간 《단어의 집》은 이렇게 비(非)시적인, 건조한, 테크니컬한, 아카데믹한 단어들이 시인의 일상에 기습적으로 끼어들어 ‘가장 문학적인’ 사유의 통로를 여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안희연은 “모든 단어들은 알을 닮아 있고 안쪽에서부터 스스로를 깨뜨리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45편의 글을 통해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발산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기운을 목격”한다.

“저에게 세상은 양초로 쓰인 글자 같습니다. 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들어서면 감춰져 있던 장면이 서서히 나타나기도 해요. 그곳엔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무언가가 있어요. 파닥임과 반짝임이 있어요. 그 마주침의 순간이 좋아서 저는 계속 글을 씁니다.”_프롤로그 중에서
저자

안희연

2012년창비신인시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너의슬픔이끼어들때》,《밤이라고부르는것들속에는》,《여름언덕에서배운것》과산문집《흩어지는마음에게,안녕》,《당신은나를열어바닥까지휘젓고》를썼다.세계의비밀을예민하게목격하는자로살아가기위해,오늘도촛불을들고단어의집으로향한다.

목차

프롤로그:촛불을들고다가서면

1.성냥갑에딱하나남은성냥같은말
길항
규모
적산온도
주악
삽수
라페
몰드
버저비터
휘도
잔나비걸상
버력
피막
블라이기센

2.홀로짓는표정같은말
모루
유루
내력벽
루어
흑건
오고오고
가시손
빈야드
구득
홈질
선망선
출몰성
플뢰레
덧장
탕종
꼭두

3.나의작은말들의놀이터
안료
탁성
벼락닫이
적화
밀코메다
묘실
파밍
기저선
네온
불리언
덖음
시드볼트
모탕
페어리서클
도량형

출판사 서평

“여기실금가득한단어를좀보세요.
무언가태어나려하고있어요.”
단어에서단어로미끄러지는,무한의도미노놀이

안희연은평소자신을‘시쓰는누구누구입니다’라고소개하지만이책에서만큼은‘단어생활자’라일컫는다.그는TV를켜놓고요리하다가,길을걸으며간판을보다가,세탁물을수거하러온기사님을마주하다가,갑자기끼어들어주변을채색하는단어들로인해멈칫한다.그리고단어들을‘파밍(게임에서캐릭터의능력을상승시키기위해아이템을모으는행위)’한다.“구멍뚫린봇짐을이고지고가느라흘리고놓치는게일상이어도,내영혼이세상과닿는접촉면이점점더넓어지기를바라며”(p.205)흩뿌려진단어들을줍는다.뉴스의날씨코너에서,작물의생육에필요한열량을나타내는용어인‘적산온도’라는단어를접한뒤‘온도를저금한다는말’에관해생각한다.“모든존재가꽃이라면,나의피어남에는얼마간의시간이필요할까.”(p.27)아빠없고엄마없는친구들과‘부재’의기억을통해쌓아온우정의내력(來歷)을,건축용어인내력벽(耐力壁)으로연결하기도한다.무슨일이있어도철거할수없는최후의보루인내력벽에빗대어“팔을들어슬픔을받치고선모양.나란한두개의기둥”(p.101)으로친구를정의한다.나와타인의관계를‘휘도’와‘조도’라는개념에비추는부분에서도안희연특유의맑고사려깊은시선을엿볼수있다.특정면적에직접도달한빛의양을말하는조도와그렇게도달한빛이반사되어우리눈에얼마나들어오는지측정하는휘도를분별한다음,사람과사람은‘휘도’의방식으로관계맺음을통찰한다.“내가여기있어서당신을사랑하는게아니에요.당신이먼저거기있기에이렇게나도당신눈속에담길수있습니다.”(p.62)당신을통해나를보듯,안희연은그렇게‘단어’를통해‘삶’을본다.단어에서단어로미끄러지는도미노놀이는평범한일상에다채로운무늬를그리며계속된다.

삶에대한충실성만으로도예술에이를수있다
나의작은말들의놀이터에서

《단어의집》에사는안희연은‘문학하는사람’이기전에당장오늘저녁메뉴를고민하기벅찬생활인이다.대파한단에7천원이라니말세도이런말세가없다중얼거리고,단추하나를다는데6천원이라는말에무거운겨울점퍼를도로들고세탁소에서집으로되돌아온다.만지기만해도물건을고장내는재주(?)가있으며어떤사양의노트북이필요하냐는점원의물음에한글작업과인터넷이필요하다고대답하는기계치이기도하다.삶이라는매일의과업속에복닥거리는시인의하루를그는담백하고진솔하게보여준다.제빵용어인‘탕종’이라는말을알고나서,탕종법으로만들어진빵이자신이원하는삶의모습을닮았음을깨닫는부분은그야말로탕종빵의식감처럼찰지고촉촉하다.

“탕종기법으로만들어진빵은유달리식감이훌륭하고결대로부드럽게찢어지며손가락으로꾹눌러도천천히원상태로돌아온다고한다.이문장들은내가원하는삶의모습을담고있었다.찢어지더라도결대로부드럽게찢어질수있는유연함,그리고충분한회복력을지닌삶.”_161~162쪽

눈이온다고환호하며모자와장갑을챙겨밖으로달려나가는사람들사이에서창문을걸어잠그고커튼을치는이유,자동차헤드라이트불빛들이온통책망의눈이되어자신을혼내는듯했던밤의기억들은저마다의상실과후회를이고사는‘평범한우리’의슬픔과맞닿으며고요한위로를건넨다.동시에이‘사사로운’이야기들은그자체로“드라마나신화없이도,삶에대한건강한충실성만으로도우리는얼마든예술의세계에이를수있다”(p.140)는저자의철학을보여준다.건강한충실성속에틈틈이자신을위로하는‘놀이’같은단어들이있을뿐이다.어떤단어는기울기가상당한미끄럼틀이었고어떤단어는혼자탈수없는시소였다.그놀이터의모래속에시가있고문학이있음을《단어의집》을들여다본독자는자연스레알게된다.그것이문턱도없이,누구에게나열려있다는것또한.

쓰고,가르치고,다짐하는삶
세상에존재하는모든단어의문을열어보는쪽으로

2018년온라인서점예스24가시행한‘한국문학의미래가될젊은작가’투표에서시부문1위를차지했던저자는2020년한국예술종합학교서사창작과교수로임용되어동시대의고민과감각으로문화예술인을양성하고있다.그는새학기첫시간,자기소개를대신해단어세개를건넨다.‘녹는점,어는점,끓는점.’(p.171)선생과학생들은세단어를돌다리삼아자신의온도와색깔을나눈다.사는곳,나이,학벌따위가아니라.과학에쓰이는용어지만이시간만큼은그무엇보다문학적인영혼이드나들길을열어주는단어들이다.

“사각거리는연필소리.손등에돋아나는힘줄.집중하는입.나는지금세상에서가장아름다운풍경을마주하고있다.문학의자장안에놓여있다는사실만으로도생면부지의사람에게단단한결속력을느낄때가많다.왜하필문학인가요.세상에재미난게얼마나많은데.”_172쪽

시쓰는일을업으로삼다보면단어가그저단어가아니라자신을이루는피와살처럼느껴질때가많다고저자는말한다.시쓰는일을업으로삼겠다며자신을찾아온이들과그러한감각을나누는것도《단어의집》에사는큰기쁨이다.그는쓸것이고갈되어못쓰겠다는학생들에게“만일네가충분한시인이라면그런보잘것없음에서도시를불러낼것”(p.204)이라말하는동시에,정작자신은녹화된영상을반복재생한것처럼관성적으로살고있는건아닐지수시로얼굴을들여다보는선생이다.선생이라는호칭이종이호랑이처럼여겨질때마다자신을‘시인’으로살게했던선생님들의말씀,그말씀으로백지를채우며나아갔던순간들을되새기는마음도깊고미덥다.

“장수(將帥)는태생이장수인것이아니라매순간결심하기에장수인것이라는나의시선생님의말씀을기억한다.나는그말을,자신감은영원히생기지않을것같으니대신믿음의크기를키워보자는말로바꿔읽는다.”_167쪽

안희연은〈빚진마음의문장〉(《밤이라고부르는것들속에는》수록)이라는시에서“세상에존재하는모든단어의문을열어보는쪽으로나의시가움직였으면좋겠다”라고썼었다.살아가는과정에서발견되고발명되어자신만의사전에등재되는단어들의목록을늘리는것을,그는여전히목표로한다.목록이늘어날수록세계의비밀은드러나며우주는넓어진다.‘아름다움쪽으로’유영할가능성이커진다.자신이목격한세계의배면이담긴《단어의집》에안희연이독자를초대하는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