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최초의 동학의거 1871년 영해동학혁명의 정명(正名)을 향하여
경상북도 영덕·영해 지역은 동학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지역입니다. 이웃인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에 의하여 창도된 동학이 처음부터 포덕된 지역도 영덕지역이었습니다. 동학이 초기부터 이 지역에 확산된 이유는 예부터 영덕지역에는 자각된 지식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동학은 신분의 차이나 남녀의 차이 그리고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도 없는 모두가 하늘을 모신 위대한 인간이라는 깨우침을 통해서 평등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목표했습니다. 당시 봉건적 잔재로 인하여 조선의 백성들이 희망을 잃고 살아갈 때 동학의 등장은 하나의 빛이자 탈출구였습니다. 그것이 가장 먼저 실현된 땅이 영덕이었습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자신이 깨달은 무극대도를 채 펼쳐 보이기도 전인 1864년 3월에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고 측근 제자들은 체포령에 내려져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동학의 지하화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암흑기에도 주로 경북지역에 있었던 초기 동학도들에게는 절실하게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억울하게 처형당하신 스승 최제우의 죄를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었으며, 그것은 동학이 비로소 하나의 학문이자 종교로 누구나 마음껏 외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누구도 나서기 어려운 시기에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곳 영덕 분들은 일어나셨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보다도 23년 전에 벌써 이곳 영덕에서는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동학도들이 조직적으로 거사한 최초의 동학혁명이라고 해도 무방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조선 사회의 봉건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의 좌절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지역도 영덕이었습니다.
그러나 1871년 영해의 의로운 거사는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영덕 군민들의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는 개벽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영덕 동학도들의 의거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불의에 항거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폈습니다. 1894년의 동학혁명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1871년의 최초의 동학의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71년 영덕의 의거는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합니다. (간행사 중)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자신이 깨달은 무극대도를 채 펼쳐 보이기도 전인 1864년 3월에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고 측근 제자들은 체포령에 내려져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동학의 지하화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암흑기에도 주로 경북지역에 있었던 초기 동학도들에게는 절실하게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억울하게 처형당하신 스승 최제우의 죄를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었으며, 그것은 동학이 비로소 하나의 학문이자 종교로 누구나 마음껏 외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누구도 나서기 어려운 시기에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곳 영덕 분들은 일어나셨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보다도 23년 전에 벌써 이곳 영덕에서는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동학도들이 조직적으로 거사한 최초의 동학혁명이라고 해도 무방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조선 사회의 봉건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의 좌절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지역도 영덕이었습니다.
그러나 1871년 영해의 의로운 거사는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영덕 군민들의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는 개벽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영덕 동학도들의 의거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불의에 항거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폈습니다. 1894년의 동학혁명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1871년의 최초의 동학의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71년 영덕의 의거는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합니다. (간행사 중)
1871 최초의 동학혁명 영해 동학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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