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필자는 통영 나전칠기 밥을 먹고 자랐다.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문화동 골짜기에서 시작한 아버지 나전칠기 공장은 필자가 초등학교(당시 통영 국민학교) 시절 부산으로 이주하여 공장을 운영하였으며, 그러다 보니 통영에서 부산으로 학교를 옮겨야 했고, 늘 아버지가 운영하던 나전칠기 공장을 지나 등교하였다. 지금도 당시 아버지가 작업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전칠기 공장에 관한 모습 또 그곳에서 작업하던 직공들, 당시 나는 그들을 ‘삼촌’이라 불렀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그들이 공장에서 작업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그려진다. 어찌 보면 이 글 작업을 시작하게 된 목적도 막연하나마 사명감에서 출발하였다.
나전칠기 밥을 먹고 성장한 필자로서는 당연한 이유이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태어난 고향의 이야기, 그것도 통영 나전칠기 문화가 쇠락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그래서 비록 대를 이은 장인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나전칠기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인연을 가지고, 통영지역 나전칠기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고 싶었다.
나전칠기 관련 연구사를 정리하여 보니 나전칠기와 관련된 논문은 거의 미술학과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고, 정작 역사학에서는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자료라고 해봤자 조선총독부 자료와 신문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통영지역에 은사금을 이용한 일본인 나전칠기 주식회사가 설립 운영된 사실이나 또한 전람회 입상을 통하여 장인 신분에서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에 대한 자료는 흥미로웠다. 더구나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전쟁으로 인하여 군수물자인 옻칠 부족으로 제품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사도 확인하였다. 하지만 이런 문헌 자료는 무척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처럼 통영 나전칠기에 관한 문헌 자료는 빈약하지만 장인들의 기억 속에는 나전칠기의 전승(傳承)과 기법, 판매 등에 관한 정보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였다. (책을 내면서 중)
나전칠기 공장에 관한 모습 또 그곳에서 작업하던 직공들, 당시 나는 그들을 ‘삼촌’이라 불렀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그들이 공장에서 작업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그려진다. 어찌 보면 이 글 작업을 시작하게 된 목적도 막연하나마 사명감에서 출발하였다.
나전칠기 밥을 먹고 성장한 필자로서는 당연한 이유이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태어난 고향의 이야기, 그것도 통영 나전칠기 문화가 쇠락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그래서 비록 대를 이은 장인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나전칠기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인연을 가지고, 통영지역 나전칠기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고 싶었다.
나전칠기 관련 연구사를 정리하여 보니 나전칠기와 관련된 논문은 거의 미술학과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고, 정작 역사학에서는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자료라고 해봤자 조선총독부 자료와 신문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통영지역에 은사금을 이용한 일본인 나전칠기 주식회사가 설립 운영된 사실이나 또한 전람회 입상을 통하여 장인 신분에서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에 대한 자료는 흥미로웠다. 더구나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전쟁으로 인하여 군수물자인 옻칠 부족으로 제품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사도 확인하였다. 하지만 이런 문헌 자료는 무척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처럼 통영 나전칠기에 관한 문헌 자료는 빈약하지만 장인들의 기억 속에는 나전칠기의 전승(傳承)과 기법, 판매 등에 관한 정보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였다. (책을 내면서 중)
통영 그리고 근대 나전칠기의 기억 (양장)
$2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