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목소리

사악한 목소리

$13.00
Description
이중의 정체성으로 시대를 돌파한 천재
버넌 리의 국내 첫 단행본
헨리 제임스가 “지적인 만큼이나 위험하고 섬뜩하게 낯설다”라고 평가한 영국 작가 버넌 리의 대표 공포소설 세 편을 담았다. 세 작품 모두 작가의 단행본으로서는 국내에 처음 출간되는 것. 버넌 리의 소설은 인문학적 지식과 파괴적 매력을 두루 갖춘 남다른 캐릭터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표제작인 단편 〈사악한 목소리〉 역시 바그너만을 추종하며 인간의 육성이 만들어낸 음악을 음란하고 불순한 것으로 치부했던 한 작곡가의 광기를 다룬 작품이다. 버넌 리의 인물들은 모두 아는 만큼 두려워지고, 두려운 만큼 새로워지는 환각과 환영의 세계를 경험한다. 나아가 “왜 꼭 현재가 옳고 과거가 틀려야 하는가?”라고 의심하며 예술과 역사를 축으로 삼아 어떠한 시공간도 단숨에 뛰어넘어버린다. 이는 오직 한쪽 방향으로밖에 시간을 체험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동시에 이율배반의 세계나 세월의 흐름, 고정된 젠더의 구분까지 경계 없이 허물어뜨리는 버넌 리 소설만의 다층적이고 독자적인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저자

버넌리

VernonLee|1856년프랑스불로뉴에서살고있던영국인부모사이에서태어났다.본명은바이얼릿패짓.스무살이되기전부터‘버넌리’라는필명을사용했다.필명을쓰는이유에대해“여자가예술이나역사,미학에대한글을쓴다고하면노골적인경멸심을드러내지않고는읽을사람이아무도없기때문”이라고말했다.버넌리는열네살에프랑스어로쓴소설을스위스신문《라파미유》에발표할정도로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등다양한언어에능통했지만주로영어로글을썼다.런던에도여러차례방문했지만대부분의생애를유럽의다른나라,특히이탈리아에서보냈다.공공연히페미니스트임을선언했던버넌리는젊은남자처럼차려입고거침없이유럽전역을여행했으며제1차세계대전중에는강경한반전주의자로나서기도했다.영국작가에이미레비를비롯한몇명의여성과오랜세월내밀한관계로지냈지만레즈비언으로고정되고규정되기를거부했다.주요작품으로는가장유명한예술저서인《18세기이탈리아에대한연구》(1880),헨리제임스에게헌정한장편소설《미스브라운》(1884),예술과역사를축으로어떠한시공간도단숨에뛰어넘는다층적인매력을지닌고딕소설을모아놓은《출몰》(1890)등이있다.1935년이탈리아피렌체에서세상을떠났다.

목차

유령연인_007
끈질긴사랑?스피리디온트렙카의일기중에서_105
사악한목소리_175

부록
마법의숲_227

해설|언캐니,두려운낯섦과중첩된정체성의공포미학_238

출판사 서평

사랑이라는이름의집착과광기,
여성에대한관습적인제약에맞서는낯선활력

《사악한목소리》에등장하는남성캐릭터들은‘확신’한다.나만은그녀가진정원하는것이무엇인지안다고,나만이그녀의진정한사랑을얻을만하다고,내가알아보는가치만이진짜의미있는것이라고믿는다.그반대지점에있는것들은어리석고무의미하다고치부하며선을긋고배척한다.버넌리는바로이런근거없는확신을무너뜨리고불필요하게인물들을구속하는경계를지우는것에서소설을시작한다.버넌리는평생유동적인삶을살았다.본명인‘바이얼릿패짓’과필명인‘버넌리’라는이중의정체성사이를경계없이오갔고,영국작가에이미레비를비롯한몇명의여성과오랜세월내밀한관계로지냈음에도레즈비언으로고정되고규정되기를거부했다.젊은남자처럼차려입은채유럽전역을거침없이여행하기도했던버넌리에게성정체성이나국가에대한소속감따위는자신의현재를침습하는거치적거리는장애물에불과했기때문이다.여성에대한관습적인제약이남아있던시대에눈치보지않고스스로의삶을개척했던버넌리의모습은,어쩐지그의작품속여성캐릭터들과도닮아있다.

여행의즐거움,각지역의친절한수호정령들을찾아나선모험은아마도내인생최고의축복이었다.(〈마법의숲〉,232∼233쪽)

편집증과의처증에사로잡힌‘오크씨’와권태에빠진그의아내‘오크부인’사이에서정신을놓지않고오크부인의초상화를그려내야하는어느화가의진술로진행되는단편〈유령연인〉은버넌리소설의특장점을가장잘보여주는대표작이다.오크부인은자신의선조인‘앨리스오크’를자신과동일시하며흠모하고,급기야앨리스와연인관계였던시인‘크리스토퍼러브록’을사랑하는지경에까지이른다.여기에오크부인의비현실적인이미지에미학적으로집착하게된화가마저섬뜩하고기이한존재로변해가면서소설은기기묘묘대혼란의의식구조속으로빠져든다.그러나흥미로운것은언뜻냉철하고이성적으로보이던남성캐릭터들이하나둘망상에걸려들어초라하고피폐해져가는와중에여성캐릭터들만큼은괴이할지언정남다른활력을유지한다는사실이다.지독한권태에침잠해있던오크부인은앨리스와러브록의피튀기는치정과로맨스에동참하면서비로소‘팜파탈’로서의매력을드러내고,단편〈끈질긴사랑〉에는낡은역사책에서튀어나온르네상스시대의여인‘메데아다카르피’가한폴란드인학자를종횡무진사로잡아끝내참혹한파국에까지이르게한다.메데아는자신의손에피한방울묻히지않은채자신에게사로잡힌남자들끼리싸우고살인하다힘없이주저앉도록만든다.

“당신은지나가면안된다고!당신은그녀를가질수없어!그녀는내거야.나만의여자야!”(〈끈질긴사랑〉,171쪽)

통제의주체라고자신했던남성화자들은자기자신조차통제하지못하고,손에잡히지않는대상을향해허우적거릴뿐이다.손에쥐고뜻대로휘둘러야하는데잡히지조차않으니어찌할바를모른다.결국집착은광기로변하지만,그들은자신의집착과광기에‘끈질긴사랑’이라는으스스한이름을가져다붙인다.버넌리는사랑이라는명목으로대상을소유하고장악하려는남성인물들의욕망을극단까지밀어붙이면서독자로하여금그들에게서한걸음물러서도록만든다.안전거리를두었을때비로소드러나는그들의실체없고후줄근한민낯에오싹해하고몸서리치도록만든다.역설적이지만이는우아하고정확한문장으로수많은소설을번역해온전문번역가인김선형의번역으로더욱명백하게드러난다.수록작을세심하게고르고유려하게번역한김선형번역자의작가에대한관심과애정을느낄수있는부분이기도하다.

괴물로변해가는자신을지켜보아야하는
섬뜩한절망과공포

버넌리가그리는불안과공포는일상적이다.확실히알고있다고생각한것에대해실은아무것도모르고있었다는충격,절대변하지않을것같던것이변했을때의낯섦,옳다고믿어의심치않았던것이전복될때의섬뜩함,자신을둘러싼거의모든것이불분명하다는데서오는두려움…….버넌리의소설에등장하는유령이무서운이유는그것이실질적인위협을가해서가아니다.그것은그저우리눈앞에희미하게나타날뿐이다.선명하고분명한것,단언하고확언하는일에익숙한우리는눈앞에나타난희미한형체를가만둘수없다.선명히칠하려해보지만가능할리없다.대상을향한덧없는시도는마침내몸을틀어자기자신을향한다.선명하고분명했던‘나’가서서히지워지고,단언하고확언했던혀는마비된다.‘나’라는존재자체를의심해야하는일만큼두려운것이있을까.괴물로변해가는자신을어쩔도리없이지켜보아야하는인물들의절망과공포가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