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 (최초의 현대적 정치인과 정치 작가 | 양장본 Hardcover)

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 (최초의 현대적 정치인과 정치 작가 | 양장본 Hardcover)

$21.94
Description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의 재기 발랄한 책을 읽다 보면, 나폴레옹은 위대한 문체를 갖고 있는 작가들에게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케르의 만찬」과 이탈리아 원정 때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 보낸 편지들에 담긴 서정적인 표현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여느 작가보다도 그를 사로잡은 문인은 다름 아닌 《기독교의 정수》를 쓴 작가 샤토브리앙이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샤토브리앙과 직접 대면한 건 1802년 4월 22일 단 한 번뿐이었다. 분명 나폴레옹은 샤토브리앙을 자신과 대적할 만한 적수라고 여겼던 듯하다. 파리 변호사단의 변호사이자 문학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는 칼을 뽑고 쓴 교차 전기의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작가와 정치인을 맞붙였다(세바스티앙 라파크, <르 피가로>).
저자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Alexendre Duval-Stalla, 1974∼ )

프랑스 정치?외교 분야 엘리트의 산실인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을 졸업하고, 1999년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파리와 뉴욕의 여러 법률사무소에서 활동하다가 2006년 ‘뒤발 스탈라 & 아소시에’라는 법률사무소를 직접 개설하고 상법과 형법 분야 전문 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파리 변호사협회 연수 담당 총무로 일하고 있다. 파리 정치대학에서 역사와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파리 제13대학에서 상법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말로와 드골』, 『모네와 클레망소』가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1장 화합과 타고난 재능
2장 코르시카 사내와 브르타뉴 사내
3장 자코뱅파와 망명 귀족
4장 작가와 제1통령
5장 시인과 황제
6장 추락과 비상
7장 마법사와 경기병
8장 정치 작가
9장 죽음 저편에 대한 사색과 회상록

출판사 서평

최초의 현대적 정치인 나폴레옹과
정치 작가 샤토브리앙,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영광

프랑스는 혁명과 함께 태어났다. 영광과 위대함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나폴레옹이 영광과 위대함을 세운 건축가라면, 샤토브리앙은 선구자다. 두 사람은 정치적인 그리고 문학적인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정치와 문학을 연결했다. 분노와 공포 속에 프랑스 혁명이 모든 것을 휩쓸어낸 후, 샤토브리앙과 나폴레옹은 프랑스 역사의 새로운 장을 썼다. 새로운 사회가 세워졌다. 매사에 무감각하고 무심한 새로운 사회는 개인주의 속에서 구원을 찾았다. 수직적인 사회에서 수평적인 사회가 되었다. 이런 평등은 열정이 되었고, 공로는 평등을 감추는 가면이 되었다. 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은 지금의 현대성의 기본 형태를 가르쳐주었다. 정치인과 작가는 유일하게 세상에 맞서는 이들이다. 역사를 공유하는 자아도취자들이다. 새로운 경계를 세우는 현대인들이다. 결코 결합하지 못하고 끝없이 대립하며 고뇌하는 격렬한 두 열정은 흡사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쓰인 새로운 소설과도 같다.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는 『말로와 드골』, 『모네와 클레망소』에 이어 이번에는 『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의 교차 전기물을 완성했다. 책 한 권에서 두 위인의 전기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 가며 함께 담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를 찬미한 동시에 서로를 증오했던 위대한 두 남자,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편의 회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 지어진 두 남자를 앞세운 탁월한 책이다.
-오드리 르 루아, <악튀알리테>

[책속으로 이어서]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샤토브리앙 역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은 두 사람 모두에게 낭만주의로 물든 영광에 대한 꿈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시골마을 플랑쿠에의 외가댁에 맡겨지는 생애 첫 망명을 가야 했다.” 그곳 외할머니 댁에서 생후 삼 년을 보냈다. 샤토브리앙은 플랑쿠에에서 자라면서 강인하게 단련된 듯했다. 샤토브리앙에게는 누나 여섯과 형 셋이 있었는데, 그중 형 한 명과 누나 네 명만 살아남았다. 샤토브리앙은 네 살 무렵 생말로에 돌아와서도 살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늘 유모들의 품을 전전했다. “[어머니의] 애정은 모두 형에게만 집중되었다.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장남인 어린 콩부르 백작만 맹목적으로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 결국 나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졌다. 게다가 교양과 기품이 넘치는 어머니는 사교생활과 종교적인 의무들에 몰두했다. […] 어머니는 정치, 떠들썩한 분위기, 사교계를 좋아하셨다[…]. 기질적으로 산만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데다 검소하고 잔소리가 많은 탓에 어릴 때에는 어머니의 훌륭한 장점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명령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휘어잡으셨고, 인색한 척하면서도 너그러우셨으며, 늘 투덜댔지만 마음은 여리셨다. 아버지가 집안 식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어머니는 골칫거리였다.” 어머니는 샤토브리앙에게 거리감을 뒀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욕까지 했다. “못생겨서는!” 샤토브리앙이 어린 시절 내내 듣던 핀잔이었다. 그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서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부모의 무관심과 냉대로 고통 받았다. 특히 어머니의 애정에 몹시 굶주렸다. 물론 시대 탓이기도 했지만, 부모는 아버지가 그토록 힘겹게 되살린 가문의 이름과 지위를 굳건하게 지킬 장남만 유독 편애했다. -64쪽

나폴레옹의 공화주의 사상 뒤에는 사실 코르시카의 독립과 파올리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파올리는 나폴레옹이 몇 차례 부탁을 했는데도 그를 기용하기 꺼림칙한 기색이었다. 사실 파올리는 나폴레옹의 아버지가 예전에 프랑스 측으로 전향했던 일로 보나파르트 일가를 상당히 불신하는 상태인데다 옛 충신들을 더 선호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를 몇 번 오가는 과정에서 희망을 품기까지 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십만 명 가까운 의용군을 모집하는 법안이 표결에 붙여지자 희망은 더욱 커졌다. 나폴레옹은 내심 코르시카 의용군을 지휘할 장교에 자신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791년 10월에 다시 코르시카로 돌아갔다. 유럽 군주 세력들을 상대로 예고된 전쟁이 임박했다. 프랑스 국민공회는 선거로 뽑히는 경우가 아니면 장교들이 코르시카 의용군 지도자로 나서지 못하게 금지했다. 나폴레옹은 선택의 여지가 없자 마지못해 선거에 나섰다. 그는 파올리의 지지를 받는 장 바티스트 ?자와 동맹을 맺고 2인자 역할을 맡았다. 선거는 활기를 띠었고, 결국 1792년 4월 초에 두 사람이 뽑혔다. 며칠 후, 파올리의 사주를 받은 ?자와 나폴레옹이 이끄는 코르시카 의용군은 프랑스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아작시오 요새를 탈환하려고 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는 중립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결국 코르시카 의용군이 퇴각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나폴레옹은 파올리의 신뢰를 잃었고 명령도 받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7 92년 5월, 나폴레옹은 입신출세를 위해 파리로 돌아갔다. 사실상 프랑스 군대에서 그가 얻은 마지막 휴가는 1791년 12월 31일에 끝난 상황이었다. 1792년 2월 6일, 나폴레옹은 군대 지휘관에서 제명되자 집행부에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했다. 마침 왕권이 실추되어 군대 지휘관이 필요했던 터라 나폴레옹은 쉽게 복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위로 승진했다. -75쪽

1791년 7월 10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자마자 샤토브리앙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을 만나려고 했다. 그래서 아르망 연대장이라고 불리는 라루에리 후작의 추천장까지 받았지만, 당시 워싱턴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결국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도 샤토브리앙은 『죽음 저편에 대한 사색』에 성사되지 않았던 그들의 만남을 이렇게 언급했다. “마음이 상하진 않았다. 나는 원래 영혼의 위대함이나 부의 막대함에 절대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다. 영혼의 위대함에는 위축되지 않을 정도의 감탄을 느낄 뿐이고, 부의 막대함 앞에서는 존경보다 연민을 느낀다. 어떤 사람을 보고 못 보고의 문제로 동요되는 일은 전혀 없다. […] 뭔가 고요한 것이 워싱턴의 행동을 감싸고 있다. 움직임이 차분하다. 미래의 자유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듯하다[…].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 짊어지고 있는 건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 조국의 운명이다[…]. 과연 그 깊은 겸양에서는 어떤 빛이 솟아오를까! […] 워싱턴은 자신의 전장에 미국이라는 전리품을 남겼다.” -100쪽

툴롱에서 나폴레옹은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워졌다. 특히 툴롱이 함락된 후 진행된 엄청난 탄압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면서 더 친해졌다. 오귀스탱은 나폴레옹을 맹목적으로 믿었고, 형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에게 나폴레옹의 “탁월한 장점”을 늘어놓았다. 1794년 2월 7일, 나폴레옹은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 방면군 포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사령관이 되어 제일 먼저 맡은 임무는 파리에 진정서를 보내 이탈리아에서 공격을 재개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의 계획은 채택은 되었지만 결국 유보되었다. 그러자 라자르 카르노는 “방향을 잘못 잡은 혁명 조직과 정복정신으로 바뀌어버린 민족정신이 갑자기 프랑스에 확산된 것은 아닌지” 염려했다. 나폴레옹에게 승진 직후는 불확실한 시간이었다. 시대가 혼란스럽다 보니 무작정 충성하기도 위험했고 불운한 일도 많았다. 혁명의 핏빛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이튿날,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순수하게 믿고 좋아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그런 참담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만일 아버지가 전제정치를 열망했다면 나 역시 칼로 찔러 죽였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를 무척 존경했지만, 실패한 로베스피에르와 달리 자신은 혁명을 끝내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106쪽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은 야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1796년 3월에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은 영광을 향해 승승장구했다. 툴롱 공성전 이후부터 1795년 방데미에르 사건 사이에 구상된 이탈리아 원정은 대혁명과 프랑스의 전망에 대한 깊은 정치적, 전략적 사색의 결실이었다. 나폴레옹의 구상은 프랑스 혁명의 최종 승리를 목표로 브뤼메르 18일까지 이어졌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대프랑스 동맹의 주요 적국이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를 물리치는 건 혁명을 성공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혁명을 마무리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혁명의 부차적인 무대였을 뿐, 핵심은 외국 군대의 통로를 차단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통해 빈으로 가는 길을 열어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방면군은 삼만 명밖에 안 되는 병력에 장비는 보잘 것 없었으며, 군수품 납품업자들이 매수되어 물자 보급마저 어려워지자 여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정면에는 팔만 명의 적군 병사들이 버티고 있었다. 상대는 볼리외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와 콜리 장군이 지휘하는 피에몬테 군대였다. -116쪽

나폴레옹은 자신의 장점을 밀어붙여 모 아니면 도로 과감하게 운명을 걸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의 운을 쓰고 또 쓰며 남용한다. 이제 두 군대는 수적으로 동등했지만 정신 상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연패를 당하면서 사기가 땅에 떨어진 반면, 리볼리 전투 이후로 스스로 천하무적이라 느끼는 프랑스 군대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도처에서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뒷걸음을 쳤다. 그때 라인 방면군이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칫했다가는 기지에서 멀어질 위험도 간과할 수 없었다. 총재정부는 라인 방면군의 지원이 없어도 행동을 개시하라고 지시했지만, 나폴레옹은 이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1797년 3월 31일,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을 이끄는 카를 대공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섯 번째 원정은 불길한 조짐이 보이고 있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양쪽 모두 몇 천 명은 더 죽을 겁니다. 그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