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촌6길

점촌6길

$15.00
Description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사유, 대상에 대한 미시적이고 섬세한 표현으로 한국 수필의 전통성과 독자성을 잘 구축하고 있는 배혜숙의 신작 수필집
1977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50년 가까이 수필가로 활동해온 배혜숙의 다섯 번째 수필집 『점촌6길』. 표제작 「점촌6길」을 포함해서 40편의 수필이 실렸다.

집에도 정체성이란 것이 있다. 점촌6길도 지향하는 목표가 있기 마련이다.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동네 사람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곳이다. 고층 아파트 주민, 골목 안쪽에 사는 젊은이, 편의점 음식에 길들여진 혼자 사는 사람들은 물론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종일 일하는 직장인들도 드나든다. 그래서 지붕 낮은 촌집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이 무한대로 확장된다. 점촌이란 오래된 동네의 중심에 있으며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곳이다. (중략)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글을 쓰듯이 집을 짓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기록해 두는 것이다”라고 『행복의 건축』에서 말한다. 즉 집은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라는 뜻이다. 후배의 촌집에서는 오래된 기록들이 묻히거나 지워져 희미해지고 있다. ‘점촌6길’은 오늘도 중요한 기록을 남긴다. 떨림과 설렘, 드나드는 사람들의 몸짓과 발길을. 저녁이 시작될 무렵의 고요와 벌레들의 언어도 기록된다. 점촌 주민들의 심리적 안식처다. -「점촌6길」 중에서
저자

배혜숙

진주에서나고자랐다.지금은울산사람으로살고있다.
『월간문학』신인상으로등단했다.수필집『목마할아버지와별』,『양파썰기』,『밥』,『토마토그짭짤한레시피』와수필선집『너희가라이파이를아느냐』가있다.여행산문집『한국탑순례』를발간하였다.울산문학상,울산펜문학상,황의순문학상을수상했다.한국문인협회,국제펜클럽한국본부,북촌시사회원이다.

목차

책머리에

1부태화강을읽다

왕이처용무를추다
금의환향
명왕성오다
백가지맛의어른
위양댁바람을다스리다
모서리에게
오늘이딱그런밤이다
강물을읽다

2부구영리카페

902카페
산타모니카
체호프에게사과를
동백꽃질까봐
장가가긴틀렸어
슬로슬로퀵퀵
기특한놈
점촌6길

3부입술에관하여

오늘의반성지수
고사리앞치마
달적을부치다
무나물
깃발
흑과적
별을줍다
입술에관하여

4부박물관옆미술관

산문에들다
도깨비망와
말달리다
혼돈
할빈그리고하루삥
스님바랑속의동화
나목
날개를달다

5부가지치기

누란미녀
새살
책으로가는문
붉은여우꼬리풀
가지치기
자운영꽃밭에서웃다
보호자
저울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어머니는내가간이덜된아이라고했다.심심하다못해맹맹해서사람구실을못할까봐조바심을냈다.맞춤하게짠맛이나야제것을챙길줄아는데나는뭐든줄줄흘리고다녔다.감정마저소금기가빠져울음보를터트리기일쑤였다.어머니는모두를소금에비유했다.손끝이야무진친척언니네집을다녀오면매번“아이고,살림이어찌나짭질밧던지!”감탄을연발했다.예쁘고똑똑한내친구들을만나면간이쫀득하다고부러워했다.웃음을실실흘리고다니는언덕위에사는노총각을밍밍한싱건지같다고마땅치않게여겼다.제한식을하는동안나도김칫국물속에서푹익은무처럼힘을잃고말았다.-29쪽

글쎄골목길을돌다가모퉁이에부딪쳤어.얼마나아픈지.터져나오려는비명을참느라온몸을뒤틀었지뭐야.무릎이움푹패피가나고어깨도아려서주저앉아울고말았단다.지나친내참을성에대해지독하다며네가자주눈을흘겼잖아.그런데이번엔아니야.산고만큼참기힘들었다니까.하마터면얼굴까지다칠뻔했어.이나이에험하게다치면그건치명적이잖아.그래서왈칵무섬증이들더라.어린날,앞도안보고달리다건물모퉁이에부딪혀얼굴에상처가났었거든.아직도희미하게자국이남아있단말이야.그쓰린기억이떠올라종일우울했어.빨간약인머큐로크롬대신연고를덕지덕지바르고그래도모른다며옆지기에게등떠밀려병원가서주사도맞았단다.-38쪽

넘실대는붉덩물이흐르고아버지는나를안고다리위에서무심히강을내려다보고있다.나는겨우다섯살이었다.그런데그날아침을생생하게기억한다.편도선이심하게부어전날나는입원을했었다.밤새고열로보채다아침이되자열이조금떨어졌고아버지는나를안고병원근처강으로갔다.새벽까지내린비로강물은엄청불어나물살이거셌다.잠도못자고찡얼대던내가순하게강물을보더라고아버지는자주그말을했다.내가고개를갸웃하게빼고강물을내려다보던장면은아직도어제일처럼선명하다.다른기억들은다지워지고없는데그날아침은너무또렷해하나하나그려낼수도있다.특히젊은아버지의표정은더욱그랬다.-48쪽

아뇨.이이야긴꼭해줘야겠네요.열한살이었어요.새원피스를처음입은날이기도했답니다.평소내옷은어른들의헌옷을리폼하거나양장점에서얻어온자투리천을잇대어만든것이전부였거든요.따스한봄날,어머니는무슨마음이었는지꽃무늬옷감을끊어와서원피스를뚝딱만들어주었답니다.새옷을입고나비가되어골목길에서훨훨날고있는데커다란개가나타났지뭐예요.피할사이도없었어요.그개가잽싸게원피스자락을물고늘어졌으니까요.달아나려고안간힘을쓰다돌부리에걸려무릎이랑팔이까져피가났지요.마침퇴근을하던아버지가그광경을목격하지않았다면큰사고로이어질뻔했답니다.그날이후,한동안나풀거리는치마는입지않았고어머니꽁무니만따라다녔답니다.당신의개를보니어린날의공포가생생하게되살아나숨이가빠오네요.이여름에한기가들고속이떨려헉헉숨이차오릅니다.-69쪽

많은것을포기한N포세대,그들에겐세상이만만하지않다.쉬지않고뛰어보지만,모든상황이불리하다.톱니바퀴가제대로맞물리지않아헛돌기만한다.그바람에화가끓어올라아침부터공원으로나온것은아닐까?하지만얼마나고마운일인가.이불속에서끙끙대지않은것이.지하게임방에서시간을죽이지않은것도.어둡고습한골목을서성대는것도아니라는사실이.동네에서가장안전한곳은햇빛내리는공원이니까.흔들리는바구니그네에몸을맡긴채허물을벗고성충이되기를바랐을지도모른다.-92쪽

점촌6길은옛동네의모습이얼마쯤남아있다.도시속시골이다.살짝굽이진골목을들어가면낡은기와집이나온다.담도울도없는집앞에넓은텃밭이있다.저녁무렵,흙담을두른통나무집에서흘러나오는불빛이따뜻하다.홀로사는할머니가쉬었다가라고의자를권한다.마을앞에는‘점촌’이란표지석이우람하다.자연부락을이루며살았던흔적이다.그뒤로새마을기가펄럭이는점촌노인정이옹골진세월을품고마을을지키고있다.그러니점촌6길,당호로는최고가아닌가.-96쪽

토란은껍질을까는일부터만만하지않다.잘못하여피부에닿으면가렵고부풀기도한다.가느다란팔에의지해큰칼로무를삐지고소고기의등심부분을결대로찢었을것이다.버섯이며파도다듬고들깨를곱게갈아면포로맑은물을짜내느라온힘을다하는모습이자꾸어른거린다.제덩치만한솥에넘치도록국을끓이느라40킬로그램이조금넘는사시랑이같은몸으로종일불앞에서있었을것이다.그런데환장하게맛이난다.어머니가끓여준국에비길바가아니다.큰딸이되어어머니를닮지않은나의누추함을반성하느라숟가락을들어올리는속도가점점느려진다.반성지수가쑥쑥올라500을넘기고있다.-102쪽

아버지가제일좋아하는음식이바로애호박전이었다.지금이야채소나과일이철도없이나지만예전에는애호박전을먹으려면유월은지나야했다.본격적인더위가시작되는유월유두무렵에야제맛이난다.어린호박이나올때쯤나는매일시장으로나가봐야했다.그러다진초록호박잎으로살포시감싼어른주먹만한호박이선을보인날,아버지의얼굴은하회탈처럼변하셨다.좀체감정을드러낼줄모르는아버지는눈가에주름을모아소리까지내며웃었다.햇것이라가격이만만치않아한개만달랑사왔다.나뿐만아니라동생들도호박요리는먹지않는게얼마나다행이냐고어머니는아버지를향해살짝눈을흘기곤했다.-111쪽

가을에수확하여땅속에묻어두고겨우내꺼내먹는무는다양하게변주되어입맛을돋웁니다.특히생선조림에빠질수없지요.냄비바닥에서제대로양념을품은무는생선보다훨씬구미가당깁니다.푹물러야젓가락이자주갑니다.눈이푹푹내리는날먹는토란국에는섬벅섬벅썰어넣은무에들깨향이깃들어야고소함을느낄수있지요.가을볕에잘말린무말랭이는도시락반찬으론그만입니다.고춧잎이들어간촉촉한무말랭이무침은친구들에게도인기였지요.혹시무밥을아시나요.뜨끈한무밥을양념장에비벼생선한토막올려먹으면그거야말로건강한밥상이지요.-117쪽

망성리(望星里)를아세요?이름그대로별을바라보는동네입니다.북쪽으로낮은산들이마을을감싸고남으로는멀리우뚝한봉우리의문수산이보이는아늑한곳이지요.굽이굽이흐르는태화강중류를끼고있는오래된마을이라무수한설화가탄생된곳이기도합니다.한때,이곳감나무골에터를잡을까하여기웃대기도했습니다.하늘의별을공짜로보는것은아무에게나허락이되지않더군요.일의상황이이리저리얽혀단념아닌단념을했습니다.그래도미련을버리지못해가까운아파트동네로이사를왔습니다.집을나서면별이아니라망성리그동네가잘보인답니다.-131쪽

박물관과달리바깥세상은사람들의통제에서벗어나마구내달리고있습니다.무한궤도를달리는과학문명으로인해‘재앙’이올것이라고설왕설래가한창입니다.아슬아슬한곡예를보는듯하여괜히나까지갈피를잡을수없답니다.사실이런재앙을막아주는것이바로도깨비의역할이아닐까요.크고튼튼한뿔에서나오는힘과쑥들린들창코의위력으로말입니다.자로잰듯가르고자르며사는숨막힌세상에그의해학적인모습은뻣뻣하게굳은내얼굴과몸을부드럽게이완시켜줍니다.마음이느슨해져그의들창코를만져봅니다.희룽희룽버릇없이굴다가도깨비방망이가‘퍽’어깨를내려칠지도몰라화들짝물러섭니다.-150쪽

시간을거꾸로돌려보는일은허망하다.백발의노파가된자야앞에나타난옛사랑은젊은날의열정을고스란히간직하고있다.그남자는왜그렇게젊고뜨거운지말이다.객석은숙연하다못해웅숭깊은심해처럼고요하다.“후회없습니다.돈천억이그의시한줄만못하니까요.”그렇다면흰슈트를입은저남자의시는천억이아니라천억의수십배가될테니까.나타샤에게거꾸로가는시계를선물하고싶다.무대위엔고작세명의배우만등장한다.무대장치도거의없다.별다른소품도등장하지않는다.오직피아노반주뿐이다.나타샤와백구두의셰프는애절한눈빛과몸짓으로노래하고화답한다.-177쪽

동물들에게꼬리는존재의증명입니다.꼬리가긴놈,짧은놈,두툼한놈에다얄따란꼬리를가진놈도있습니다.게다가동그랗게말고다니거나슬쩍숨기기도합니다.동물에게꼬리가없다면볼썽사납겠지요.두발로직립보행을하는인간들에겐거추장스러울뿐인데왜꼬리에연연하는지알
수없습니다.붙어있지도않은꼬리때문에시시비비를만들고온갖말들이오가는게우습기조차합니다.욕심이라는것이무한대인사람들에겐꼬리뼈만남은것에대한진한아쉬움일수도있겠네요.-198쪽

저울눈금이적정선을지났는데도아저씨는계속토마토를올렸다.나는그만해도된다고손사래까지치며말렸다.“내마음이시키는대로합니다.”무뚝뚝하게말했다.그럼필요없는저울은왜사용하느냐고의아한얼굴을하자장사를처음시작할때장만한거라그냥가지고다닌다고했다.전자저울이일원단위까지계산해주는시대에앉은뱅이저울을쓰는것은그만의장사방식이었다.옆구리의초록색칠이군데군데벗겨진저울은예순을훌쩍넘긴늙수그레한아저씨의신념을말해주고있었다.-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