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미하이 스파리오수의 책은 내가 접한 놀이의 본질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기록 중 하나다. 그 지식의 폭과 깊이는 놀랍고, 놀이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도 주목할 만하다.” -제임스 S. 한스_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미하이 스파리오수는 폭넓고 인간적인 공감을 가진 대담한 사상가이자 뛰어난 기량과 품격을 지닌 작가이다.” -스탠리 콘골드_프린스턴 대학교
책 속에서
놀이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아울러 그 본질과 기능을 설명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놀이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포착하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다. 우리 모두 놀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것을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이를 개념화하려 할 때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다시 말해, 놀이는 독일어에서 ‘das stumme Wissen’(암묵적 지식)이라고 불리는 영역에 속하며, 이는 이성적 사고보다는 직관과 관련된다. 놀이에 대한 정의는 수백 가지에 이르지만,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과학 분야의 일부 현대 이론가들로 하여금 놀이의 정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도록 만들거나, 놀이를 하나의 역설로 간주하도록 이끌었다. 한편, 문화이론 및 문화인류학 분야의 일부 학자들은 놀이와 게임을 구별하는 방식을 선호하며, paidia와 ludus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 구분에서는 paidia가 정의될 수 없는 개념으로 남아 있는 반면, ludus는 규칙에 의해 제한된 자유, 즉 제도화된 놀이로 정의된다. -19쪽
이 책은 철학적 담론과 과학적 담론 속에서 놀이 개념의 역사가 보여주는 내적 운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역동성이 각 분야에서 서로 다른 경로를 따른다는 점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각 학문 분야가 문화적 권위를 놓고 투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놀이 개념들 간의 동일 학문 내 투쟁뿐 아니라, 학문 간 투쟁 또한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이 투쟁 과정에서, 놀이 개념들은 의도적으로 서로로부터 물러나거나 공격하며, 동맹을 형성하거나 해체하고, 친연성을 주장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점에서, 놀이 개념들의 정체성은 차이의 놀이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지, 차이가 정체성 속에서 환원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아곤(투쟁, agon)을 설명할 수 있는 역사적 모델 역시 투쟁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다양한 놀이 개념들 간의 차이를 정체성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헤겔적 모델과는 다른 접근법이다. 대신, 그들의 정체성을 기능적 차이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비코적(Viconian) 혹은 니체적 모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7쪽
예술과 마찬가지로, 놀이 또한 낭만주의 형이상학에 유용한 개념이 된다. 낭만주의 형이상학은 이성과 욕망 또는 의지, 즉 정신의 이상 세계와 감각의 물질 세계 사이를 매개하려고 시도한다. 놀이 역시 예술과 마찬가지로 양면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이러한 매개적 역할에 이상적으로 적합하며, 19세기 관념론 철학 전반에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 활용된다. 비록 초기에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놀이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였으며, 그 이유 역시 동일했다. 즉 놀이가 지나치게 분명히 전(前)이성적 혹은 원시적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놀이 개념에서 전이성적이고 폭력적이며 임의적인 의미가 제거되며, 철학의 존재론적 및 윤리적 허구를 떠받치는 유용한 도구로 전환된다. 다시 한번, 놀이를 플라톤적 및 신플라톤주의적 형태로서 진지한 철학적 주제로 정립한 인물은 실러였다. 그 이후 놀이의 형이상학적 지위는 빠르게 상승하여, 젊은 헤겔은 심지어 놀이가 가장 가볍게 보이는 순간에도 “가장 고귀하며 유일하게 참된 진지함이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문구는 이후 놀이 이론가들이 끊임없이 인용해 온 말이 되었다. 그러나 칸트와 실러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 철학 속에서 놀이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 개념이 모순과 애매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곧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과 애매성은 놀이 개념이, 서양 사상의 다른 여러 핵심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이성과 전(前)이성 사이에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69쪽
아름다움은 “생명력의 증진을 동반하며, 따라서 매혹과 상상력의 (좋은) 놀이와 양립 가능하다.” 반면 숭고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쾌를 산출하는데, 이는 “생명력의 일시적 억제와 그에 뒤이은 보다 강한 분출을 통해 발생하는 감정” 때문이며, 따라서 숭고는 “놀이(여기서는 자유롭고 무관심적인 활동의 의미가 아니다)가 아니라 상상력의 진지한 작용”으로 간주된다”. 이런 이유로 숭고는 “매혹과 양립 불가능하며”, 숭고의 경험은 긍정적 쾌감이라기보다 오히려 경외나 존경과 같은 부정적 쾌감을 수반한다. 아름다움이 상상력과 이해의 조화에서 발생하는 데 반해,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의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이 갈등은 “우리가 순수하고 자족적인 이성, 혹은 크기를 판단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하며, 이 능력의 탁월함은-그 자체로는 무한한 크기들을 제시하는 [상상력]의 불충분함을 통해서만-직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이 갈등 속에서 상상력은 결국 실패해야 하며, 바로 그 실패를 통해 이성의 승리가 확보된다. -84쪽
실러는 표면적으로는 놀이의 자유로움을 근거로 칸트로부터 벗어나 놀이를 노동이나 효용보다 더 우위에 두는 듯 보이지만, 그의 이러한 개념 정의를 더 면밀히 살펴보면, 실러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놀이를 본질적으로 더 높은 차원의 노동이나 효용의 한 형태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이를 자유로서 이해하면서도 그것과 효용의 관계를 다루는 문제는, 실러가 물질적 놀이와 초월적 놀이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 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는 놀이를 정의하면서 칸트의 개념인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사심없음을 그대로 차용한다. 그리고 동물적 및 인간적(물리적) 놀이를 제한된 자유의 형태로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이성이 없는 생물들에게조차 존재에 필요한 최소한 이상의 것을 부여하였으며, 동물의 삶이라는 어둠 속에도 자유의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었다. 사자가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고, 어떤 포식동물의 도발로 전투를 준비하는 상황이 아닐 때, 그 여유로운 힘은 스스로를 위한 대상을 만든다. 그는 메아리치는 사막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과잉된 활력을 목적 없는 과시 속에서 즐긴다”. 실러에게 있어서 일은 결핍의 외적 강제이며, 물질적 놀이는 넘쳐나는 풍요의 내적 충동이다. 이러한 과잉 에너지가 분출을 요구하는 것이다. -111쪽
음악은 현실처럼 보이거나 현실을 ‘모방’하는 것처럼 나타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더 이상 플라톤적 의미의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임의적이고 폭력적이며 놀이적 성격을 지닌 의지이다. 이에 반해 서정시는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모방하는데, 이는 서정시가 의지를 직접이 아니라 어떤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비록 서정시가 디오니소스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모방론에서처럼 서정시는 결국 모사의 모사에 해당한다. 다만 니체에게서 그것이 모방하는 원형은 플라톤과는 다른 것이다. 음악은 다른 모든 예술 위에 놓이는데, 그 이유는 “음악이 현상의 모사, 좀 더 정확히는 의지의 적합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 모사이며, 따라서 세계의 모든 물리적인 것들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곧 모든 현상의 물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를 구현된 음악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구현된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칸트의 예술 위계에서 음악이 가장 마지막에 놓였던 것은, 음악이 지나치게 합리적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되기(becoming)의 놀이에 너무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체에게서는 바로 그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음악이 예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138쪽
니체는 진리에 대한 수행적이고 도덕 바깥의 개념에 대해 소피스트들에게 진 빚을 직접적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인식론적 사유의 뿌리를 전(前)이성적 소크라테스 이전 사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피스트들은 도덕성에 대한 최초의 비판, 도덕성에 대한 최초의 통찰에 거의 도달했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판단들의 다양성(지리적 상대성)을 병치시켰다; 그들은 모든 도덕이 변증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즉 그들은 모든 도덕 정당화 시도들이 필연적으로 궤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관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최초의 진리를 전제로 한다: ‘그 자체로서의 도덕(morality-in-itself)’, ‘그 자체로서의 선(good-in-itself)’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영역에서 ‘진리’를 논하는 것은 사기라는 것이다”. 끝으로, 니체는 플라톤에 대해서조차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자신조차 조건부로도 진실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을 절대적 진리로 가르치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란 바로 “영혼의 독립적 실재성과 개별적 불멸성”이다. -163쪽
놀이를 아곤(투쟁, agon)으로 이해하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글에서 비교적 늦게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예술 작품의 본질을 예술의 본질 및 진리, 즉 대존재와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하려는 시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예술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을 검토한 뒤, 예술에 대한 미학주의적 관점과 모방적(모사적 및 재현적) 관점 모두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 후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세계와 대지(earth) 사이의 대항놀이가 펼쳐지는 장(場, Spielraum)이라고 제안한다. 예술 작품은 세계를 설정하고, 대지를 제시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란 “역사적 민족의 운명 속에서 단순하고 본질적인 결단들의 넓은 길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열려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대지”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은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