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의 베짱이는 여름 내내 놀다가 겨울에 굶어 죽는다. 버나드 슈츠의 베짱이도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 다만 그는 따르는 이들이 나눠 주겠다는 먹을 것을 마다하고, 일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끝까지 변호한 뒤 숨을 거둔다. 떠나면서 수수께끼 하나를 남긴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실은 게임을 하고 있다는 꿈이다. 두 제자 스켑티쿠스와 프루던스는 그 꿈을 풀려고 베짱이와 함께 보낸 여름의 대화를 하나씩 되짚는다.
그 대화의 한가운데에 게임의 정의가 있다. 베짱이는 목표, 수단, 규칙, 그리고 게임하는 이의 태도라는 네 요소로 정의를 짜 나간다. 이루려는 상태가 있고, 그곳에 이르는 더 쉬운 길을 규칙이 막으며, 사람은 오로지 게임을 하기 위해 그 규칙을 받아들인다. 슈츠는 이 마지막 태도를 ‘유희적 태도’라 부른다. 정의가 선 뒤에는 까다로운 사례가 줄지어 나온다. 카우보이와 인디언 같은 흉내 놀이, 끝이 정해지지 않은 게임, 관람석의 폭탄을 해체하러 트랙을 달리는 주자가 그렇다. 사례마다 정의가 어떻게 버티는지 보여 주는 이 공방은 철학 논증이면서 그 자체로 잘 짜인 한 판의 게임이다.
수수께끼의 답은 마지막 장에서 나온다. 기적처럼 돌아온 베짱이는 먹고사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기계가 맡은 유토피아를 그려 보이고, 그곳에서 사람에게 남는 일은 게임뿐이라고 말한다. 일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을 다시 지어내는 장면까지 내다본 대목은, 기계와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가져가기 시작한 지금 읽으면 더욱 날카롭다.
1978년 토론토 대학교 출판부에서 처음 나온 이 책은 스포츠 철학에서 게임과 스포츠를 정의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게임 디자인 이론서들이 게임의 정의를 논할 때 거듭 인용하는 고전이 되었다. 한국어판은 2014년 브로드뷰 출판사의 3판 전문을 옮겼다. 철학자 토머스 허카의 서문, 초판에 실렸던 프랭크 뉴펠드의 삽화, 그리고 정의의 가능성과 반례와 놀이의 개념을 다룬 부록 세 편이 함께 실렸고, 원문의 말장난과 인용 출처는 옮긴이 주로 밝혔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와 게임 기획자로 일한 박신영이 옮겼다.
책 속에서
게임을 한다는 것에 대한 분석을 펼 때, 슈츠는 유희적 태도를 규칙이 게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규칙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본다(가령 골프의 규칙이 골프를 골프로 만들기 때문에 그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 이렇게 보면 얼마간은 돈을 벌려고 게임을 하는 프로도 유희적 태도를 가진 셈이 된다. 심지어 순수 프로라 부를 만한 사람, 곧 게임 자체에는 관심 없이 오로지 돈을 위해서만 하는 사람까지 그렇다. 가령 순수 프로 골퍼는 돈을 벌려면 골프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골프의 모든 규칙을 지켜야 함을 안다. 그는 규칙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받아들일지 모른다. 그래도 골프를 하려고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만은 분명하고, 그래서 유희적 태도를 가진다. 그리고 슈츠의 분석으로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순수 프로 골퍼가 골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 부조리할 테니까. -25쪽(토머스 허카, 서문)
“내가 자네에게 줄 답이 셋 있네, 스켑티쿠스. 서둘러야겠네. 해는 이미 졌고 서리가 벌써 들판을 기어 들어오니. 첫째, 분명 나는 이 땅에 삶을 끝까지 놀다 죽으라고 보내졌네. 내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불경한 일이겠지. 그것이 말하자면 이 일의 신학일세. 둘째, 이 일에는 논리도 있네. 운명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논리, 아니 논리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운명 말일세. 베짱이의 삶을 살지 말라는 유일한 논거는, 지금으로선 일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우연한 사실에서 나오지. 한데 그 답은 이러하네. 어차피 내 죽음은 피할 수 없네. 여름에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겨울에 죽을 것이요, 세우면 정의상 더는 베짱이가 아니게 되지. 그런데 여름에 나는 대책을 세우거나 세우지 않거나 할 뿐, 셋째 길은 없네. 그러니 나는 죽거나, 베짱이이기를 멈추지. 한데 나는 베짱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죽는 것과 베짱이이기를 멈추는 것은 나에게 한가지라네. 이 논리에서도, 이 운명에서도 나는 벗어날 수가 없네. 허나 나는 베짱이요 자네들은 아니니, 이 논리가 자네들까지 옭아매지는 않는 듯하지. 앞서 비쳤듯,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하네. 자네들을 위해 죽으라고, 그 무겁지만 피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라고, 내가 이 땅에 보내졌다고 말일세. 다만 고백하건대, 그런 생각은 내가 초기 그리스도교의(혹은 후기 이교의) 마음결에 잠시 잠겨 있을 때에나 드는 것이지. 다른 때에는(이것이 자네 이의에 내놓는 셋째이자 마지막 답일세, 스켑티쿠스) 더없이 묘한 생각이 드네. 자네들 둘이 실은 변장한 베짱이라는 생각, 사실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베짱이라는 생각이.” -53쪽
지식의 탐구란 더 명백한 데서 덜 명백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옛 규준을 마음에 두고[베짱이가 운을 떼었다] 게임을 하는 것은 일하는 것과 다르다는 통념에서 출발해 보세. 그렇다면 게임은 어떤 두드러진 측면에서 일이 아닌 무엇이리라 짐작해 봄 직하지. 일이란 ‘기술적 활동’이라고 단도직입으로 규정해 보세. 곧 행위자가 원하는 목표에 이르려고 동원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쓰려 하는 활동 말일세. 그런데 게임에도 분명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려고 수단이 동원되지. 그러니 게임이 기술적 활동과 갈리는 것은, 게임에서 쓰이는 수단이 가장 효율적이지는 않다는 점에서인지도 모르네. 그렇다면 게임을 두고, 비효율적 수단이 일부러 선택된 목표 지향 활동이라 일러 보세. 가령 경주 게임에서 사람은 결승선에 닿으려고 ‘분별 있게’ 내야를 가로지르는 대신, 트랙을 한 바퀴 고스란히 자발적으로 도니 말일세. -68쪽
게임에 더 곧장 다가가려면[베짱이가 말을 이었다] 이른바 게임하기의 요소를 식별하면 되네. 게임은 선택을 품은 목표 지향 활동이니, 목표와 수단은 게임의 요소 가운데 둘일세. 그러나 수단-목표 지향 활동이라는 데 더해, 게임은 또한 규칙이 다스리는 활동이기도 하지. 그러니 규칙이 셋째 요소네. 그리고 곧 보겠지만 게임의 규칙은 꽤 특별한 종류의 규칙을 이루니, 요소를 하나 더 셈에 넣어야 하네. 곧 게임 플레이어인 한에서의, 게임 플레이어의 태도일세. ‘게임 플레이어인 한에서’라 덧붙이는 까닭은, 내가 뜻하는 바가 이러저러한 조건에서 이러저러한 플레이어가 어쩌다 품을 만한 태도(가령 상금을 따리라는 바람이나, 감탄하는 청중 앞에서 몸 솜씨를 뽐내는 만족)가 아니라, 그것 없이는 도무지 게임을 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이지. 이 태도를, 잠시 뒤 더 다루겠지만, 유희적 태도(라틴어 ludus[‘게임’]에서)라 부르세. -90쪽
게임 플레이어의 태도가 게임하기의 한 요소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목표에 이르려고 더 나은 수단 대신 더 못한 수단을 쓰라 다그치는 규칙을 사람이 받아들이는, 그 묘한 사태를 설명해 낼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일세. 보통 금지 규칙을 받아들이는 일은, 배제된 수단이 비록 허용된 수단보다 효율적이긴 해도 당사자가 보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근거로 정당화되네. 가령 핵무기가 전투에서 이기는 데에 재래식 무기보다 효율적이지만, 핵 공격이 낳는 다른 결과만으로도 배제하기에 넉넉하다는 견해가 다행히도 나라들 사이에 아직 남아 있지. 이런 일은 국제 전략에서 일상의 평범한 일에 이르기까지 늘 일어나네. 가령 치통을 확실히 없애는 길 하나는 머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효율적인 수단을 배제할 좋은 까닭을 찾지. 그러나 게임에서는, 더 효율적인 수단이 배제되고 또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는 까닭이 핵무기를 피하고 제 머리를 지키는 까닭과는 사뭇 다르네. 도보 경주자가 내야를 가로지르지 않는 까닭은, 가령 내야에 지뢰가 자주 묻혀 있어 위험을 품고 있어서가 아닐세. 내야를 가로지르기가 꺼려지는 까닭은 오직 그것을 금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일상에서는 이것이 보통(그리고 마땅하게도) 어떤 행위를 피하는 데 댈 수 있는 가장 못난 정당화로 여겨지네. 어떤 행위를 금하는 정당화가 그저 그것을 금하는 규칙이 있다는 것뿐이라면, 이는 관료적 정당화라 부를 만하지. 곧 정당화랄 것도 없는 정당화일세. -96쪽
게임을 하는 일과 게임을 이기는 일의 관계는 더 일반적으로 ‘시도와 달성’ 활동이라 부를 만한 특별한 활동 부류에서 드러나네. 곧 시도와 달성 각각이 그 자체로 목적으로 추구되는 활동일세. 짚어 두세. 게임은 이런 종류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네. “사랑하고 잃는 편이 아예 사랑하지 않는 편보다 낫다.” 표준이라 부를 만한(물론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성행위는 어쩌면 이런 종류의 활동 가운데 내재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일 뿐 아니라 가장 또렷한 사례이기도 하네. 오르가슴에 이르려는 시도와 오르가슴에 이르기는, 내가 짐작건대 꽤 널리 각각 그 자체로 목적으로 여겨지는 듯하지. 그래서 한쪽의 달성이 다른 쪽의 달성을 좌절시킬 수 있네. 오르가슴이 그 자체로 목적이지만, 이를 즉시 달성하는 일은 오르가슴을 향해 고조해 가려는 목표를 무산시키는 일이지.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고조에만 외골수로 매달리는 일은 오르가슴 자체를 막을 수 있네. 그에 따라 우리는 성행위가 게임의 한 종류로 다루어져야 하는가를 물을 만하네. 그러지 않아도 됨을 보려면, 우리가 기술한 성행위의 본질적 노력은 그저 시도와 달성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인 듯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데서 시작해 볼 수 있네. 그러나 게임의 노력은 그저 게임에서 이기기지. 게임이 잘 구성되어 있고 플레이어들의 기량이 잘 맞는다면, 시도와 달성 사이의 바라는 균형이 실현될 걸세. 다만 그 균형이 플레이어의 노력이 의식적으로, 1차로 향하는 대상일 필요는 없네(그리고 어쩌면 그래서는 안 되네). 곧 잘 짜인 게임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를 이기려는 것이지 역설을 이기려는 것이 아닐세. -153쪽
훌륭하네, 스켑티쿠스. 그러나 이 주제를 떠나기 전에, 카우보이와 인디언 같은 게임에 관해 우리가 품었던 이전 의심으로 잠시 돌아가, 열린 게임에 관한 새 이해가 그 의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