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 게임, 삶, 유토피아

베짱이: 게임, 삶, 유토피아

$26.75
저자

버나드 슈츠

저자 : 버나드 슈츠
1925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해군에서 복무한 뒤 시카고 대학교에서 철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7년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해 1959년 퍼듀 대학교로 옮겼고, 1966년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 철학과에 부임해 1994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재직 중 철학과 학과장과 인문대학 대학원 담당 부학장을 지냈고, 1982년 우수 강의상을 받았으며, 은퇴 후 석좌 명예교수(Distinguished Professor Emeritus)로 있었다. 국제스포츠철학회 회장(1975~1976)을 역임했다.
1967년 학회지 『윤리학(Ethics)』에 발표한 「삶은 우리가 하고 있는 게임인가?(Is Life a Game We Are Playing?)」와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에 실은 「게임이란 무엇인가?(What Is a Game?)」에서 시작된 그의 물음은 「스포츠의 요소들(The Elements of Sport)」(1973), 「놀이에 관한 몇 마디(Words on Play)」(1977)를 거쳐 1978년 『베짱이: 게임, 삶, 유토피아(The Grasshopper: Games, Life and Utopia)』로 완성되었다. 게임에는 공통된 본질이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단언에 맞서, 그는 죽어 가는 베짱이와 제자들의 문답이라는 형식으로 게임의 정의를 세우고, 나아가 게임하기야말로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선이라는 대담한 주장으로 나아갔다. 이 책은 스포츠 철학에서 게임과 스포츠를 정의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게임 디자인 이론과 현대 가치 철학에서도 되풀이해 소환되며, 철학자 토머스 허카는 이를 “20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철학서 가운데 하나”라 평했다. 생전에 낸 단행본은 이 한 권뿐이다. 2007에 타계했으며, 세상을 떠난 뒤 남긴 후속작 원고가 『베짱이의 귀환(Return of the Grasshopper)』(2022)으로 유고 출간되었다.

역자 : 박신영
2001년부터 2005년까지 KTF MagicNs와 SUMA G.O 프로게임단 소속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저그)로 활동했다. 2002년 MBC게임 스타리그의 전신인 KPGA 투어에서 3위에 올랐고, 온게임넷, MBC게임 양대 팀리그 우승팀의 일원이었다. 프로게이머 은퇴 후 NHN과 EA코리아에서 <야구9단>, <니드 포 스피드 엣지>, <피파 온라인 4>(현 ) 개발 및 라이브 프로젝트에 게임 기획자로 참여했다. 이후 클라우드게임 서비스 <지포스 나우>의 Product Owner로 일했다.
서강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대학에서 정보경영 석사 학위를 받았다. 『움직임의 철학』, 『e스포츠 연구』 등 학술지에 게임과 e스포츠를 주제로 논문을 게재했다.

서문 : 토마스 허카
1952년생. 토론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1977년에 철학 석사학위를, 1980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사이 존 로크 심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부터 옥스퍼드 대학교와 캘거리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이후 1992년에 캘거리 대학교 철학과 정교수가 되었다. 1994년과 1995년 캘거리 대학교 최우수 교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1년에는 캐나다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의 구겐하임 펠로우십 등을 거쳐, 최근 모교인 토론토 대학교 철학과에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저서로는 <완전주의Perfectionism>, <미덕, 악덕, 가치Virtue, Vice, and Value>, <원칙들: 윤리학에 관한 짧은 에세이Principles: Short Essays on Ethics> 등이 있다.

목차


서문 ㆍ 8
머리말 ㆍ37
감사의 말ㆍ 40
등장인물ㆍ42
일러두기 ㆍ44

1장
베짱이의 죽음ㆍ46
2장
제자들 ㆍ56
3장
정의의 구성ㆍ66
4장
시간때우는자들, 속이는 자들, 흥 깨는 자들ㆍ102
5장
먼 길로 돌아 집으로 ㆍ112
6장
이반과 압둘ㆍ122
7장
게임과 역설 ㆍ142
8장
등반ㆍ158
9장
역회전ㆍ166
10장
포르피리오 스니크의 놀라운 경력 ㆍ180
11장
바솔로뮤드래그의 사례사ㆍ208
12장
열린 게임ㆍ226
13장
아마추어, 프로, 그리고 심리 게임ㆍ244
14장
부활 ㆍ268
15장
해결ㆍ284

부록
부록 1. 언덕 위의 바보ㆍ310
부록 2. 풀밭의 비트겐슈타인 · 337 부록3. 놀이에 관한 몇 마디 ㆍ348
수록 허가ㆍ380
옮긴이의 말ㆍ381

출판사 서평


『이솝 우화』의 베짱이는 여름 내내 놀다가 겨울에 굶어 죽는다. 버나드 슈츠의 베짱이도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 다만 그는 따르는 이들이 나눠 주겠다는 먹을 것을 마다하고, 일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끝까지 변호한 뒤 숨을 거둔다. 떠나면서 수수께끼 하나를 남긴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실은 게임을 하고 있다는 꿈이다. 두 제자 스켑티쿠스와 프루던스는 그 꿈을 풀려고 베짱이와 함께 보낸 여름의 대화를 하나씩 되짚는다.

그 대화의 한가운데에 게임의 정의가 있다. 베짱이는 목표, 수단, 규칙, 그리고 게임하는 이의 태도라는 네 요소로 정의를 짜 나간다. 이루려는 상태가 있고, 그곳에 이르는 더 쉬운 길을 규칙이 막으며, 사람은 오로지 게임을 하기 위해 그 규칙을 받아들인다. 슈츠는 이 마지막 태도를 ‘유희적 태도’라 부른다. 정의가 선 뒤에는 까다로운 사례가 줄지어 나온다. 카우보이와 인디언 같은 흉내 놀이, 끝이 정해지지 않은 게임, 관람석의 폭탄을 해체하러 트랙을 달리는 주자가 그렇다. 사례마다 정의가 어떻게 버티는지 보여 주는 이 공방은 철학 논증이면서 그 자체로 잘 짜인 한 판의 게임이다.

수수께끼의 답은 마지막 장에서 나온다. 기적처럼 돌아온 베짱이는 먹고사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기계가 맡은 유토피아를 그려 보이고, 그곳에서 사람에게 남는 일은 게임뿐이라고 말한다. 일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을 다시 지어내는 장면까지 내다본 대목은, 기계와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가져가기 시작한 지금 읽으면 더욱 날카롭다.

1978년 토론토 대학교 출판부에서 처음 나온 이 책은 스포츠 철학에서 게임과 스포츠를 정의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게임 디자인 이론서들이 게임의 정의를 논할 때 거듭 인용하는 고전이 되었다. 한국어판은 2014년 브로드뷰 출판사의 3판 전문을 옮겼다. 철학자 토머스 허카의 서문, 초판에 실렸던 프랭크 뉴펠드의 삽화, 그리고 정의의 가능성과 반례와 놀이의 개념을 다룬 부록 세 편이 함께 실렸고, 원문의 말장난과 인용 출처는 옮긴이 주로 밝혔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와 게임 기획자로 일한 박신영이 옮겼다.

책 속에서

게임을 한다는 것에 대한 분석을 펼 때, 슈츠는 유희적 태도를 규칙이 게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규칙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본다(가령 골프의 규칙이 골프를 골프로 만들기 때문에 그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 이렇게 보면 얼마간은 돈을 벌려고 게임을 하는 프로도 유희적 태도를 가진 셈이 된다. 심지어 순수 프로라 부를 만한 사람, 곧 게임 자체에는 관심 없이 오로지 돈을 위해서만 하는 사람까지 그렇다. 가령 순수 프로 골퍼는 돈을 벌려면 골프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골프의 모든 규칙을 지켜야 함을 안다. 그는 규칙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받아들일지 모른다. 그래도 골프를 하려고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만은 분명하고, 그래서 유희적 태도를 가진다. 그리고 슈츠의 분석으로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순수 프로 골퍼가 골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 부조리할 테니까. -25쪽(토머스 허카, 서문)

“내가 자네에게 줄 답이 셋 있네, 스켑티쿠스. 서둘러야겠네. 해는 이미 졌고 서리가 벌써 들판을 기어 들어오니. 첫째, 분명 나는 이 땅에 삶을 끝까지 놀다 죽으라고 보내졌네. 내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불경한 일이겠지. 그것이 말하자면 이 일의 신학일세. 둘째, 이 일에는 논리도 있네. 운명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논리, 아니 논리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운명 말일세. 베짱이의 삶을 살지 말라는 유일한 논거는, 지금으로선 일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우연한 사실에서 나오지. 한데 그 답은 이러하네. 어차피 내 죽음은 피할 수 없네. 여름에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겨울에 죽을 것이요, 세우면 정의상 더는 베짱이가 아니게 되지. 그런데 여름에 나는 대책을 세우거나 세우지 않거나 할 뿐, 셋째 길은 없네. 그러니 나는 죽거나, 베짱이이기를 멈추지. 한데 나는 베짱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죽는 것과 베짱이이기를 멈추는 것은 나에게 한가지라네. 이 논리에서도, 이 운명에서도 나는 벗어날 수가 없네. 허나 나는 베짱이요 자네들은 아니니, 이 논리가 자네들까지 옭아매지는 않는 듯하지. 앞서 비쳤듯,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하네. 자네들을 위해 죽으라고, 그 무겁지만 피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라고, 내가 이 땅에 보내졌다고 말일세. 다만 고백하건대, 그런 생각은 내가 초기 그리스도교의(혹은 후기 이교의) 마음결에 잠시 잠겨 있을 때에나 드는 것이지. 다른 때에는(이것이 자네 이의에 내놓는 셋째이자 마지막 답일세, 스켑티쿠스) 더없이 묘한 생각이 드네. 자네들 둘이 실은 변장한 베짱이라는 생각, 사실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베짱이라는 생각이.” -53쪽

지식의 탐구란 더 명백한 데서 덜 명백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옛 규준을 마음에 두고[베짱이가 운을 떼었다] 게임을 하는 것은 일하는 것과 다르다는 통념에서 출발해 보세. 그렇다면 게임은 어떤 두드러진 측면에서 일이 아닌 무엇이리라 짐작해 봄 직하지. 일이란 ‘기술적 활동’이라고 단도직입으로 규정해 보세. 곧 행위자가 원하는 목표에 이르려고 동원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쓰려 하는 활동 말일세. 그런데 게임에도 분명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려고 수단이 동원되지. 그러니 게임이 기술적 활동과 갈리는 것은, 게임에서 쓰이는 수단이 가장 효율적이지는 않다는 점에서인지도 모르네. 그렇다면 게임을 두고, 비효율적 수단이 일부러 선택된 목표 지향 활동이라 일러 보세. 가령 경주 게임에서 사람은 결승선에 닿으려고 ‘분별 있게’ 내야를 가로지르는 대신, 트랙을 한 바퀴 고스란히 자발적으로 도니 말일세. -68쪽

게임에 더 곧장 다가가려면[베짱이가 말을 이었다] 이른바 게임하기의 요소를 식별하면 되네. 게임은 선택을 품은 목표 지향 활동이니, 목표와 수단은 게임의 요소 가운데 둘일세. 그러나 수단-목표 지향 활동이라는 데 더해, 게임은 또한 규칙이 다스리는 활동이기도 하지. 그러니 규칙이 셋째 요소네. 그리고 곧 보겠지만 게임의 규칙은 꽤 특별한 종류의 규칙을 이루니, 요소를 하나 더 셈에 넣어야 하네. 곧 게임 플레이어인 한에서의, 게임 플레이어의 태도일세. ‘게임 플레이어인 한에서’라 덧붙이는 까닭은, 내가 뜻하는 바가 이러저러한 조건에서 이러저러한 플레이어가 어쩌다 품을 만한 태도(가령 상금을 따리라는 바람이나, 감탄하는 청중 앞에서 몸 솜씨를 뽐내는 만족)가 아니라, 그것 없이는 도무지 게임을 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이지. 이 태도를, 잠시 뒤 더 다루겠지만, 유희적 태도(라틴어 ludus[‘게임’]에서)라 부르세. -90쪽

게임 플레이어의 태도가 게임하기의 한 요소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목표에 이르려고 더 나은 수단 대신 더 못한 수단을 쓰라 다그치는 규칙을 사람이 받아들이는, 그 묘한 사태를 설명해 낼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일세. 보통 금지 규칙을 받아들이는 일은, 배제된 수단이 비록 허용된 수단보다 효율적이긴 해도 당사자가 보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근거로 정당화되네. 가령 핵무기가 전투에서 이기는 데에 재래식 무기보다 효율적이지만, 핵 공격이 낳는 다른 결과만으로도 배제하기에 넉넉하다는 견해가 다행히도 나라들 사이에 아직 남아 있지. 이런 일은 국제 전략에서 일상의 평범한 일에 이르기까지 늘 일어나네. 가령 치통을 확실히 없애는 길 하나는 머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효율적인 수단을 배제할 좋은 까닭을 찾지. 그러나 게임에서는, 더 효율적인 수단이 배제되고 또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는 까닭이 핵무기를 피하고 제 머리를 지키는 까닭과는 사뭇 다르네. 도보 경주자가 내야를 가로지르지 않는 까닭은, 가령 내야에 지뢰가 자주 묻혀 있어 위험을 품고 있어서가 아닐세. 내야를 가로지르기가 꺼려지는 까닭은 오직 그것을 금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일상에서는 이것이 보통(그리고 마땅하게도) 어떤 행위를 피하는 데 댈 수 있는 가장 못난 정당화로 여겨지네. 어떤 행위를 금하는 정당화가 그저 그것을 금하는 규칙이 있다는 것뿐이라면, 이는 관료적 정당화라 부를 만하지. 곧 정당화랄 것도 없는 정당화일세. -96쪽

게임을 하는 일과 게임을 이기는 일의 관계는 더 일반적으로 ‘시도와 달성’ 활동이라 부를 만한 특별한 활동 부류에서 드러나네. 곧 시도와 달성 각각이 그 자체로 목적으로 추구되는 활동일세. 짚어 두세. 게임은 이런 종류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네. “사랑하고 잃는 편이 아예 사랑하지 않는 편보다 낫다.” 표준이라 부를 만한(물론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성행위는 어쩌면 이런 종류의 활동 가운데 내재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일 뿐 아니라 가장 또렷한 사례이기도 하네. 오르가슴에 이르려는 시도와 오르가슴에 이르기는, 내가 짐작건대 꽤 널리 각각 그 자체로 목적으로 여겨지는 듯하지. 그래서 한쪽의 달성이 다른 쪽의 달성을 좌절시킬 수 있네. 오르가슴이 그 자체로 목적이지만, 이를 즉시 달성하는 일은 오르가슴을 향해 고조해 가려는 목표를 무산시키는 일이지.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고조에만 외골수로 매달리는 일은 오르가슴 자체를 막을 수 있네. 그에 따라 우리는 성행위가 게임의 한 종류로 다루어져야 하는가를 물을 만하네. 그러지 않아도 됨을 보려면, 우리가 기술한 성행위의 본질적 노력은 그저 시도와 달성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인 듯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데서 시작해 볼 수 있네. 그러나 게임의 노력은 그저 게임에서 이기기지. 게임이 잘 구성되어 있고 플레이어들의 기량이 잘 맞는다면, 시도와 달성 사이의 바라는 균형이 실현될 걸세. 다만 그 균형이 플레이어의 노력이 의식적으로, 1차로 향하는 대상일 필요는 없네(그리고 어쩌면 그래서는 안 되네). 곧 잘 짜인 게임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를 이기려는 것이지 역설을 이기려는 것이 아닐세. -153쪽

훌륭하네, 스켑티쿠스. 그러나 이 주제를 떠나기 전에, 카우보이와 인디언 같은 게임에 관해 우리가 품었던 이전 의심으로 잠시 돌아가, 열린 게임에 관한 새 이해가 그 의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