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지복직관”의 사전적 의미는 “신의 얼굴을 직접 목격하는 가운데 지극히 큰 희열과 행복을 체험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익숙하지만,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개신교 신학자인 한스 부어스마는 “지복직관”이야말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 개념과 정확히 상응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책은 개신교 신학자에 의해 쓰인 “지복직관”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치밀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크게 두 부분에 걸쳐 지복직관 개념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역설한다. 먼저, 저자는 철학과 신학의 역사에 나타난 지복직관 개념을 추적한다. 저자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플라톤과 플루티노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을 통해 현상의 세계를 탈피하여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하는 전통이 있었음을 밝히는 한편, 이런 초월적 경험들이 어떻게 후대의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끼쳤는지, 또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이어서 저자는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이 등장하기 이전의 주요한 기독교 신학자들이 모두 “지복직관” 체험에 큰 강조점을 두었다고 주장한다. 한스 부어마스는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를 시발점으로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신신학자 시므온, 십자가의 요한, 보나벤투라,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단테 등의 방대한 작품을 세밀하게 분석하면서 이들의 신학과 신앙에 지복직관 체험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소개한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같은 작품은 그의 “관상” 체험, 즉 그가 영적 행위 중에 하늘에 올라가 신의 얼굴을 직접 목도한 경험을 이해하지 않고는 정확한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당연시되었던, 그리고 권장되었던 지복직관의 경험은 종교 개혁가 칼뱅에 이르러 그 중요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칼뱅은 지복직관 체험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로 신학적 포인트를 이동함으로써 후대의 개신교 신학의 물줄기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전통에서 지복직관의 중요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자는 영국의 청교도,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이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개신교 안에서 여전히 지복직관의 신학이 이어졌음을 강조한다.
그다음 저자는 성서에 나타난 지복직관의 자취를 추적한다. 한스 부어마스는 태곳적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는 “신의 얼굴을 직접 목격하며 친교를 나눌 수 있었”지만, 인류의 조상이 범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인류는 신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제한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서의 전통에서 간헐적으로 신의 얼굴을 목도하는 특이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가령 아브라함, 야곱,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미가야 같은 예언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들이 “신의 얼굴”을 목격한 체험은 실제로는 “신의 등”을 본 것에 불과하다. 구약성서 시대의 어떤 신앙 위인도 신의 얼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신약성서 시대에 이르러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신의 현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누구나 신의 얼굴을 목격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태곳적의 에덴동산과 같은 이상향에 들어가 신의 얼굴을 보며 자유롭게 친교를 나눌 수 있는 회복과 구원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역사의 종말까지 이 회복과 구원의 완성은 유예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마치 희미한 거울을 보듯이 신의 얼굴에 대해 제한적인 경험과 지식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우주의 종말이 도래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모두 흡사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듯이 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베푸시는 무한한 행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염원하고 희구하는 구원의 완성이다.
저자는 이렇듯 성서와 기독교 신학의 전통이 매우 소중하게 여겼던 지복직관 개념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별다른 반향을 못 일으킬 수 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지금 이곳에서의 물질적 삶에 과도하리만큼 탐닉한 까닭에 초월적 세계에 대한 감각과 염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지복직관 경험은 단지 종말에 완성될 천국에 들어가서만 누릴 수 있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얼굴을 계시하고 중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을 통해 지금 이곳의 삶에서 형언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추구하는 신의 얼굴 보기는 내재의 세계에 임하는 초월의 신비를 상징하고 예표하는 성례전적 행위다. 예수는 팔복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마 5:8)
저자는 크게 두 부분에 걸쳐 지복직관 개념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역설한다. 먼저, 저자는 철학과 신학의 역사에 나타난 지복직관 개념을 추적한다. 저자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플라톤과 플루티노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을 통해 현상의 세계를 탈피하여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하는 전통이 있었음을 밝히는 한편, 이런 초월적 경험들이 어떻게 후대의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끼쳤는지, 또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이어서 저자는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이 등장하기 이전의 주요한 기독교 신학자들이 모두 “지복직관” 체험에 큰 강조점을 두었다고 주장한다. 한스 부어마스는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를 시발점으로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신신학자 시므온, 십자가의 요한, 보나벤투라,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단테 등의 방대한 작품을 세밀하게 분석하면서 이들의 신학과 신앙에 지복직관 체험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소개한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같은 작품은 그의 “관상” 체험, 즉 그가 영적 행위 중에 하늘에 올라가 신의 얼굴을 직접 목도한 경험을 이해하지 않고는 정확한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당연시되었던, 그리고 권장되었던 지복직관의 경험은 종교 개혁가 칼뱅에 이르러 그 중요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칼뱅은 지복직관 체험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로 신학적 포인트를 이동함으로써 후대의 개신교 신학의 물줄기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전통에서 지복직관의 중요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자는 영국의 청교도,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이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개신교 안에서 여전히 지복직관의 신학이 이어졌음을 강조한다.
그다음 저자는 성서에 나타난 지복직관의 자취를 추적한다. 한스 부어마스는 태곳적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는 “신의 얼굴을 직접 목격하며 친교를 나눌 수 있었”지만, 인류의 조상이 범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인류는 신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제한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서의 전통에서 간헐적으로 신의 얼굴을 목도하는 특이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가령 아브라함, 야곱,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미가야 같은 예언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들이 “신의 얼굴”을 목격한 체험은 실제로는 “신의 등”을 본 것에 불과하다. 구약성서 시대의 어떤 신앙 위인도 신의 얼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신약성서 시대에 이르러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신의 현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누구나 신의 얼굴을 목격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태곳적의 에덴동산과 같은 이상향에 들어가 신의 얼굴을 보며 자유롭게 친교를 나눌 수 있는 회복과 구원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역사의 종말까지 이 회복과 구원의 완성은 유예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마치 희미한 거울을 보듯이 신의 얼굴에 대해 제한적인 경험과 지식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우주의 종말이 도래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모두 흡사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듯이 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베푸시는 무한한 행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염원하고 희구하는 구원의 완성이다.
저자는 이렇듯 성서와 기독교 신학의 전통이 매우 소중하게 여겼던 지복직관 개념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별다른 반향을 못 일으킬 수 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지금 이곳에서의 물질적 삶에 과도하리만큼 탐닉한 까닭에 초월적 세계에 대한 감각과 염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지복직관 경험은 단지 종말에 완성될 천국에 들어가서만 누릴 수 있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얼굴을 계시하고 중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을 통해 지금 이곳의 삶에서 형언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추구하는 신의 얼굴 보기는 내재의 세계에 임하는 초월의 신비를 상징하고 예표하는 성례전적 행위다. 예수는 팔복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마 5:8)
지복직관 : 기독교 전통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관조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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