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지 않았다

그는 오지 않았다

$12.00
Description
1980년 5월 광주, 그곳에서 일어난 비극과 무너진 삶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
2024년 12월 3일 밤, 초유의 ‘평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가 국회의 의결로 신속하게 해제되었다. 계엄령 선포 즉시 수백 명의 시민과 언론인, 국회 직원, 국회의원 보좌관 들이 국회로 몰려들어 계엄군을 막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경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으로 불법 계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선고 요지에서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고 명시하기도 하였다. 소설가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군부 독재와 쿠데타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현대사 덕분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닥쳤을 때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4.3과 5.18 등을 통해 비상계엄이 어떻게 국가폭력으로 이어지는지 역사적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12월 3일 내란의 밤에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에 대한 답을 똑똑히 목격한 셈이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의 작가 이경혜가 5.18 당시 희생된 어린이와 청소년 인물들의 이야기를 작은 책 한 권 한 권으로 펴내는 ‘광주 연작 시리즈’를 시작한다. 작가는 80년 ‘서울의 봄’ 당시 대학생으로 서울역 시위에 참여하고 5.18로 인해 인생의 경로가 크게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후 연희문학창작촌에 지내는 동안 바로 옆집에 독재자 전두환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분노와 슬픔을 느낀 뒤 5.18 관련 청소년 단편을 쓰게 되었다. ‘광주 연작’의 시작이 될 「명령」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늙은 독재자가 천수를 누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정의를 찾을 수 있을까? 저 낮은 곳에서 들끓는 분노는 어디를 향해 터뜨려야 하나.
작가는 화내고 울부짖는 대신 그때 희생된 이름을 나지막히, 그러나 소중히 불러주자고 제안한다. 5.18 당시 희생된 시민들 가운데는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존재가 바로 무도하고 잔인한 국가폭력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명령」은 책방 앞에서 계엄군이 휘두른 몽둥이질에 쓰러진 중학교 3학년 박기현, 「그는 오지 않았다」는 자개 공장에서 일하며 이제 막 첫 월급 수령을 앞두고 있던 열여덟 살 소년공 박인배의 삶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글 속에서 자유롭게 인물의 삶을 그려” 내려는 것이다. ‘광주 연작 시리즈’는 “역사란 결국 한 사람의 이름을 사무치게 불러주고, 기억하는 일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는 기획이다.


한 소년의 소박한 꿈도 이루어주지 못하는 국가에게
우리는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한 소년이 있었다. 가난해서 중학교도 마치지 못했고 서울에 올라가 나이를 속이고 공장 일을 시작해야 했던 소년. 소년은 열여덟 살이 되어 이제 어엿한 노동자가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와 취업한 공장에서 첫 월급날을 앞두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오래 지켜보던 소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서 약속도 잡아둔 터였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은 가난한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갖다 줘야 하겠지만 조금쯤 떼어 데이트에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생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고 이제 막 사랑이 시작되려는 때, 거리에서 큰 시위가 일어난다. 아무 잘못 없는 행인들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군인들, 불태워진 방송국, 숨죽여 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른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불의한 일이 자행된다는 사실만은 똑똑히 알겠다. 그렇다면 잠깐 거리로 나가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도 괜찮겠지.
「그는 오지 않았다」는 이미 제목에서 주인공 인호의 비극을 드러내준다. 이 이야기는 5.18 희생자인 박인배라는 실존인물의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이 복고풍 사랑 이야기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 것은 사악한 국가폭력 때문이다. 5.18은 그 자체로도 비극적인 역사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을 어떤 방식으로 짓밟고 망가뜨렸는지는 차마 헤아리기 어렵다. 이제 막 첫사랑에 빠지고 존경할 만한 어른도 만나고 희미하게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갖게 된 소년이 거리에서 총에 맞아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국가가 한 개인의 평범한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한 소년의 소박한 꿈도 이루어주지 못하는 국가에게 우리는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작가는 아주 짧은 정보만으로 인호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 후, 그에게 실존인물 박인배가 갖지 못했던 행복한 시간을 안겨 주었다. “반짝이는 한 순간, 두근거리는 한 순간이라도 깃들게 하고 싶었”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국가폭력의 부당함을 소리내어 외치는 대신 폭력에 의해 스러진 아름다운 순간을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넌지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광주 연작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동안 12.3 비상계엄이 일어났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한 잘못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더 이 시리즈가 필요한 이유다. 한손에 들어오는 작은 판형으로 만들었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설과 작가의 충실한 후기가 부록으로 곁들여져 5월에 읽기 좋은 책이다.
저자

이경혜

저자:이경혜
이야기란어떤영혼이작가의몸을통로로삼아자신을드러내는것이라고믿으며글을씁니다.청소년들을생각하며쓴글로는소설『어느날내가죽었습니다』『그녀석덕분에』『그들이떨어뜨린것』『새똥』이있고,허난설헌과허균의시를번안하고해설을붙인『스물일곱송이붉은연꽃』『할말이있다』,일기중독자에대해쓴『어느날일기를쓰기시작했다』,북유럽신화를새로이쓴『에다』등의에세이가있습니다.

목차


그는오지않았다7
5.18광주민주화운동해설103
‘광주연작’에부치는글113
작가의말133

출판사 서평

한소년의소박한꿈도이루어주지못하는국가에게
우리는무엇을요구해야하는가

한소년이있었다.가난해서중학교도마치지못했고서울에올라가나이를속이고공장일을시작해야했던소년.소년은열여덟살이되어이제어엿한노동자가되었고,고향으로돌아와취업한공장에서첫월급날을앞두고있었다.얼마전에는오래지켜보던소녀에게데이트신청을해서약속도잡아둔터였다.얼마안되는월급은가난한어머니에게고스란히갖다줘야하겠지만조금쯤떼어데이트에쓸수있을것이다.그런데난생처음누군가를좋아하고이제막사랑이시작되려는때,거리에서큰시위가일어난다.아무잘못없는행인들에게곤봉을휘두르는군인들,불태워진방송국,숨죽여시국에대해이야기하는어른들.무슨영문인지모르지만불의한일이자행된다는사실만은똑똑히알겠다.그렇다면잠깐거리로나가서수많은사람들속에서저항의목소리를내도괜찮겠지.

「그는오지않았다」는이미제목에서주인공인호의비극을드러내준다.이이야기는5.18희생자인박인배라는실존인물의정보를토대로만들어진소설이다.이복고풍사랑이야기가비극적인결말을맞게된것은사악한국가폭력때문이다.5.18은그자체로도비극적인역사지만한사람한사람의구체적인삶을어떤방식으로짓밟고망가뜨렸는지는차마헤아리기어렵다.이제막첫사랑에빠지고존경할만한어른도만나고희미하게나마미래에대한희망도갖게된소년이거리에서총에맞아야했던이유가무엇일까?국가가한개인의평범한삶을지켜주지못한다면무엇을위해존재해야하는가.한소년의소박한꿈도이루어주지못하는국가에게우리는무엇을요구해야하는가.

작가는아주짧은정보만으로인호라는가상의인물을만들어낸후,그에게실존인물박인배가갖지못했던행복한시간을안겨주었다.“반짝이는한순간,두근거리는한순간이라도깃들게하고싶었”다는간절한바람때문이다.국가폭력의부당함을소리내어외치는대신폭력에의해스러진아름다운순간을그려냄으로써우리가무엇을지켜야하는지넌지시말해주고있는것이다.작가가광주연작을기획하고준비하는동안12.3비상계엄이일어났다.역사는반복되지만우리가기억하는한잘못은반복되지않을것이다.더욱더이시리즈가필요한이유다.한손에들어오는작은판형으로만들었지만5.18광주민주화운동에대한해설과작가의충실한후기가부록으로곁들여져5월에읽기좋은책이다.

책속에서

그런홍장인이크게소리내웃는모습을인호도딱한번보았다.며칠전,갑자기전화를받고나갔다온홍장인이문을열고들어오면서큰소리로웃으며외쳤던것이다.
“나,아들생겼어요!나를꼭빼닮았어요!”(p.20)

그러던어느봄,인호는숨바꼭질을하다가커다란참나무뒤에숨었는데어디선가사과냄새같은향기가났다.쪼그려앉아나무둥치께의키큰풀들을들춰보니은방울꽃무더기가숨어있었다.하얗고조그만방울같은꽃봉오리들이조르르달려달랑거리는은방울꽃은키가새끼손가락만큼밖에안되는작은꽃이었다.차마건드릴수도없게귀엽고사랑스러웠다.인호는친구들에게도알려주지않고혼자만그꽃들을보러다녔다.짓궂은친구들이함부로짓밟거나마구따서소꿉장난반찬으로써버릴까봐서였다.(p.25)

“둘이동갑인디내외하지말고친구로잘지내랑께.”
오여사의주책스런말에순미는얼굴이빨개졌다.왜저런말을한담,무안했다.그러나그말에얼굴을붉히며고개를숙이는인호를보자순미는갑자기그에게관심이가고마음이설렜다.남자지만자기처럼부끄럼이많은사람인모양이었다.남같지않은그느낌이좋았다.(p.48)

“초파일날두시에여기서보는거여!”
인호가못박듯말했다.평소와다르게단호하게말하는그를보며순미는웃으며입을열었다.
“많이늦어도상관없응께오기만하세요.나야여기앉아서수놓고있으면되니께.”(p.61)

홍장인은나가면서인호한테다가와다시다짐을두었다.
“절대밖에나가지말고공장안에만있어야한다.너무흉흉해.저놈들은지금괴물이야.알았지?”
“예.알겄지라.”
인호는그렇게대답은했지만속으로는찔렸다.(p.80)

총에맞은몸으로도그는어딘가를향해기어가려고온힘을다하고있었다.인호는그의마음을들여다본듯알수있었다.그는아내와아들에게로가고있었다!
인호의머릿속으로언젠가그랬듯이한번도보지못한그의아내와아들이떠올랐다.다가가그들을안으며활짝웃는홍장인의모습도생생하게그려졌다.그는지금그들에게로가고있었다.그는그들에게로반드시돌아가야할사람이었다.
“아저씨!”
인호는미친듯이그를향해달려갔다.(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