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장석남의 적막 예찬)

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장석남의 적막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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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등단 35년 차, 자연과 시의 세계를 누비며
장석남이 발견한 지혜의 문장들
유년 시절부터 시와 자연에 조숙했던 시인 장석남. 등단 35년 차를 맞은 지금도 그는 세상의 구부러진 지점에 주목하고 노래하는 시인의 의무에 한결같이 복무하고 있다. 13년 만에 새 옷을 입은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을 만나보자.

나이라는 돌덩이를 하나둘 쌓아오며 시인의 시선은 어떻게 무르익어 왔을까.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의 시선을 닮을까, 한겨울의 찬바람에도 꼿꼿하게 서는 대의 청정을 닮을까. 산책하듯 흘러가는 문장 속에서 자연을 닮아가는 자세를 발견할 수 있겠다.
사랑하는 것들과 거리를 두며 적막을 예찬하는 시인은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외로움을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애인의 발자국을 따라 밟는 마음으로 찬찬히 응시해보자. 삶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가 어렴풋이 구분되는 순간이다.
저자

장석남

1987년경향신문신춘문예를통해시를발표하기시작했다.시집으로《새떼들에게로의망명》《지금은간신히아무도그립지않을무렵》《젖은눈》《왼쪽가슴아래께에온통증》《미소는,어디로가시려는가》《뺨에서쪽을빛내다》《고요는도망가지말아라》《꽃밟을일을근심하다》등이있다.김수영문학상,현대문학상,정지용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새옷을입으며4
물긷는소리를닮고싶다6

1부

탁깨우는한구절13
눈의식량,귀의식량15
돌과사귀기18
논어를권함24
물긷는소리27
밤에물소리를듣고초서가아름다워졌다30
취미는적적해지는것35
햇빛의일42
내가사랑하는장소,골짜기의백합46
나는빨리늙고싶다52
음악속에있는고요에닿기위하여56
나무라는종교59
간이역은일상을기다린다63
보랏빛구절초앞에앉아보는일70

2부

대를심는일75
초승달아래우리들의주소지79
처마에서떨어지는빗물로쓴글86
고향에만있는,낮은한가위달90
소중한나의스승95
유자나무가지러곧영동에가야한다102
모과향기속110
겸손의간단명료114
인왕제색하였으나123
조그만집짓기130
어느비오는밤현동용슬재에서있었던일140
나는왜문학을하는가148
비유,카메라157
어둠에새긴다167

3부

음의물위에배를띄우고173
가을의병을낫게하는것178
옛한옥에서아를의여인을듣다185
겨울에혼자서들어야하는비창190
외로움의품격195
찬물소리속겨울나그네200
모든음악의땔감이자저수지206
사철나무와상추210
인간의운명과신에대한엄숙214
풍죽의브람스218
집수리음악223
사랑하는것은모두멀리있다227

출판사 서평

▶누가시인보다슬픔을오래들여다볼수있을까
같은피사체를촬영하는여러가지의구도와초점이있고이에따라사진의결과물이천차만별달라지듯이,어떤분야에서건뭇사람과다르게해석하는관점이개인에게는필요하다.자아를잃지않기위함이다.흔히접하지못하는색다른시각은개인의중심을지키며사소한사건을바꿔놓는것에서멈추지않고,하나의사회를변화시키는밈(Meme)이되기도한다.사회를풍요롭게만드는존재는다양한사람이라기보다다양한관점이라고보는편이정확하다.

그런차원에서시인의산문집을읽는다는것은자아를,혹은대상을해석하는최첨단의시각을접한다는것아닐까.가장새롭다는의미보다가장날카롭다는의미에서그렇다.예리한칼같은시선으로단단하게굳어있는대상의내면을해체하고틈을파헤치는시인의시도는,감정의이면을적나라하게드러내면서독자로하여금낯선대상과감정을맞닥뜨리게하는것이다.

돌파는것을좋아한다.거기에꽃도파봤고산도내나이에맞게봉우리를만들어파봤다.새는돌속으로날아갔고물은돌밖으로흘렀다.달은돌뒤로졌으며눈보라는세찼다.돌의까칠한표면에드러난형상들은가장원시적이면서도가장모던한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단지바위속의무엇을풀어주었을뿐’이라했던가?그안에무엇이있기라도한듯이그렇게하고싶다.아마도종국엔나를닮은무엇이되려나?그건내가슴을새기는심정이되지않을까.어쩌면꿈일지도.
_〈돌과사귀기〉중에서

슬픔,고요같은낱말들은그렇게자연스레시인과어울린다.그가보여주는슬픔과고요는어딘지다른구석이있을것만같다.산문속에서빛나는이남다른시선은감각의새로운경지를제시한다.쉬지않고수런거리는듯한자연속에서발견하는고요와인간의감정에국한되었던슬픔은시인이응시하는대상곳곳에스며든다.물긷는소리부터날아가는새의깃털까지,서정에닿아있는객관적상관물을기꺼이삶에품은시인이써내려간문장들은소낙비처럼느닷없이쏟아지며독자의‘왼쪽가슴아래께’를적시고만다.

▶상처받은문장의틈에서피어나는향기
독일의시인베르톨트브레히트는문학의사용가치를주창하며‘사회적메시지가담긴문학’의중요성을설파했지만,오늘날그가강조한문학적요소는대개축소되거나,남아있다고할만한일부의목소리들은산문으로옮겨가겨우명맥을유지하고있다.현대대중들에게있어문학,특히시는지적계몽과유희라는두기능사이에서설곳을잃은‘무용한것’에불과하다.수세기간이어져온‘문학이란무엇인가’라는물음이그어느때보다자조적으로들리는것은착각이아니다.굳건해보였던문학의가치는어디로숨어버린것일까.

그러나여전히문학의쓸모를믿는존재가있다.설령그쓸모가없더라도바짓가랑이를붙잡고놓지않는사람이있다.바로시인이다.‘내글품은구투를벗지못하지만그래도그게녹은더디앉을것’이라고믿는시인은자신은물론,보편적인사람들의삶과닮은문학에대해끊임없이공부한다.여전히문학은삶의지혜를담은보물창고였다.시인은단지지금까지지켜온특유의예리한시선으로변치않는가치를알아보는것뿐이다.

역시글이라는것은맨땅에서파낼수있는게아니라는사실을요즘에와서더더욱절감한다.묻은게없으면나오는게없다는것은만고진리지만그토양마저도굳고거칠면도
통좋은씨앗도배겨나질못한다.아무리깊이파서땅을뒤집어놓아도비한번오고나면굳어져서호미조차들어가질않는다.돌덩이처럼굳어버리고마는것이다…….그나마토양을비옥하게하는것은옛책들일수밖에없다.
_〈밤에물소리를듣고초서가아름다워졌다〉중에서

옛책에담긴문학적향취는사라지지않는다.오래전묶었던원고에새옷을입히는시인의의도가여기에서비롯되었으리라.문학은상처없이존재할수없는것이라고했던가.세상의천태만상과우여곡절을보고겪으며다져진,무수한상흔이비치는시인의문장을곱씹는일도하나의공부일것이다.

모과라는열매는아주매혹적이다.저빛깔을보라.저빛깔이야말로늦은가을저녁을닮은빛이아닐수없다.한쪽에상처가나있다.상처는짙은자주색이다.길가에뒹굴던것을주워왔던것이다.상처때문에버림받은놈일게뻔하다.
그런데온방을물들이는이향기는상처에서부터쏟아져나온것이리라.상처가향기를짙게만들어낸다.
_〈모과향기속〉중에서

▶음악속의적막,적막속의인생
스스로음악마니아의지경은아니지만‘어지간히음악을좋아한다’고여기는시인은음악을듣는가운데적막을붙들어맨다.맞닿지않을것만같은두쌍곡선,음악과적막이시인의세계안에서는교차점을지닌다.오랜적막이곧음악이되고,흐르는선율에서적막을발견하는그의사유는유쾌하면서동시에침착하다.

인간은그래도그러한자연의순환을여러번경험할수있어서삶과죽음의원리를짐작할수있게된다.신이준기회다.우리는늦은가을저녁나절이면숲길을걸으면서‘자연
이저러하거늘…….’하고는혼자중얼거리면서걷다가다시오래침묵한다.침묵이바로깊은생각의대지이고지혜의대지이다.음악도침묵을대지로삼지아니한가.
_〈풍죽의브람스〉중에서

시인은자신의일부를이루는음악속에들어앉아고요를오래도록추상한다.‘몇겹의자연속에’파고들었을그역사깊은적막의본질을알아본다.멀리있지만,다행히도감각할수있다.마침내독자는우연히접한음악이귀에맞는기쁨을,한편의연주같은산문속에서발견한다.그발견은적막을닮았다.어쩌면인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