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는 볼 수 없다 - 제로노블 Zero Novel 83

눈먼 자는 볼 수 없다 - 제로노블 Zero Novel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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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눈앞에서 부모를 잃고 눈이 멀어 버린 세다스의 왕녀 예레나.
가족을 모조리 잃은 그녀는 제국의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고국을 위해 제 몸 하나쯤은 희생하리라 마음먹지만,
뜻대로 일은 풀리지 않고 왕녀는 저주받았다는 누명과 함께 탑에 갇힌다.

“……잘 부탁드립니다. 키안이라 합니다.”

왕녀가 눈멀기 전 마지막으로 본 고국의 원수, 로샨 비스티우스 황태제는
첫눈에 예레나에게 끌린 나머지 호위 기사라는 거짓 신분을 만들어 그녀의 곁을 맴돈다.

기만당하는 것도 모른 채 적국의 기사에게 점차 의지하게 된 왕녀.
거짓된 신분으로 왕녀의 곁에 머물며 기만으로 점철된 사랑을 말하는 침략자.

예레나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
로샨은 제 원죄를 후회하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한다.

한편 아름다운 왕녀가 탐났으나 저주가 두려워 품길 주저했던 황제는
이 모든 게 로샨의 술수임을 깨닫고 예레나를 찾는데…….

진실을 언제까지 가릴 수 있을 것인가.
여신의 뜻 아래 저주가 풀린 왕녀가 눈 뜨는 순간…….

눈먼 자는 볼 것인가.
저자

틸리빌리

글을읽으시는모든분들께하쿠나마타타!

목차

프롤로그
1장.눈먼왕녀
2장.전리품
3장.회색탑과저주받은왕녀
4장.호위기사
5장.봄날
6장.자각
7장.얄팍한거짓
8장.남은사람
9장.붕괴
10장.진실
알리시아외전.신녀인가마녀인가
11장.눈먼자
에필로그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왕의머리가허공을날았다.비스듬히비산한피가황금권좌에흩뿌려졌다.
반듯한검의궤적이그려진목아래장엄한빛깔의푸른망토가처참히구겨졌다.동시에망토에휘감긴몸또한쿵둔중한소리와함께허물어져내렸다.만인의위에서지고하게군림하던왕의허무한끝이었다.
바닥을뒹구는몸보다아주조금늦게떨어진머리에서사슴뿔을흉내낸황금관이추락했다.깡.대리석바닥에부딪힌그것은가진무게에비해너무나가벼운소리를내더니작은원을그리며바닥을굴렀다.그리고끝내주인을단번에벤극악무도한침략자,세다스왕국을불바다로만든비스티우스제국의황태제(皇太弟;황위를계승할황제의아우)이자이번전쟁의총사령관로샨비스티우스의발치에툭닿았다.
“네이놈!”
왕이생전앉았던권좌바로옆에자리한왕비가머리채를어지럽게풀어헤치며피눈물을쏟았다.가녀린몸에서나오리라상상이되지않는괴성이울음과함께침략자를향했다.
중년의왕비가거의평생을함께한남편의피로얼룩진바닥에발을딛더니품안에서화려한단검하나를꺼내들었다.여러귀한보석들로장식된작은단검은누군가를해하기는적합해보이지않았다.하지만검집안숨겨진날은예상외로왕비의표정만큼이나잘벼려져있었다.
고개를꺾어나뒹구는왕의머리를한번더본왕비가무모한도전을했다.그녀는단검을양손에쥔채남편의피로만들어진웅덩이위,검을든침략자를향해돌진했다.
“내아들들을도륙하더니이제내남편까지죽이는구나.내가너만은하데스신께데려가마!”
혼신을다한몸짓이제법날카로웠다.그러나그렇다한들평생검이라고는들어보지않았을,평소에는꽃이나보석을쥐었을고귀한여인이었다.로샨에게서조금떨어져있던그의기사들은제주인의실력과성미를잘알았기에여인의어설픈공격을크게걱정하지않았다.어차피여인은주인의사정거리안에들어오기전남편의피를먹은검에똑같이쓰러질것이뻔했다.
한데이상한일이었다.왕비의단검이성큼가까워지고있음에도침략자는그자리에못박힌듯서서조금도움직이지않았다.로샨의기사들은왕비가팔을뻗기직전에야제주군의상태가어딘가이상함을깨닫고급박히움직였다.
그들의주인은머리카락색만큼이나검디검은망토아래길고예리한검을쥐고있었다.그러나검끝은바닥을향했고손의힘은느슨히풀려있었다.표정은언뜻보기에평소와다름없이무표정에가까웠지만가까이서그를보필한이들은알수있었다.
주군께서평소와다르다고.로샨비스티우스의붉은눈은알수없는빛으로번뜩이고있었다.
“죽어!”
왕비가단검을쥔손을높게들어올린순간까지침략자의시선은왕비를비켜나있었다.그는왕비의뒤,정확히는제가베어죽인왕이앉았던권좌쪽을뚫어져라보고있었다.
“전하!”
녹스,하이든과더불어전장에서로샨을보필하는최측근중하나인루데타가문의프레드릭이그의무기인장창을쭉뻗었다.루데타가문의상징인환도상어문양이새겨진창의뾰족한끝이단숨에왕비의옆구리를꿰뚫었다.
창이날아가는소리뒤로붉은생명이흘렀다.기세좋게달려들던왕비는비명조차제대로내지못한채남편과마찬가지로허물어졌다.머리가없는왕의옆에쓰러진왕비가엎드려누운채가까스로목을가누었다.평생살아온나라를짓밟고,남편과아들들을모조리죽인원수를올려다보는그녀의푸른눈에는지독한감정이넘실거렸다.
“아악!”
프레드릭보다한발늦게달려온,로샨을광신도처럼따르는녹스가왕비를당장에라도쳐죽일듯형형한눈으로내려다볼때였다.외마디비명이울리고권좌의뒤에서작은몸이튀어나왔다.
“왕녀님!”
뒤늦게늙은여인의목소리가뒤따랐다.그러나권좌뒤에숨어있다나온젊은여인은조금의지체도없이쓰러진왕비를향해달렸다.
“어딜감히!”
녹스가검을움켜쥔손에힘을줬다.여인이라무시했던왕비가주군의지척까지오는걸본뒤였다.한번은몰랐으나두번은용납할수없는일이었다.
하나여인의얼굴을본순간녹스는자신도모르게움찔대며손을멈추고말았다.길게물결치는금발사이희게떠오른얼굴,깊은숲속감춰진연못같은푸른눈동자.실크로만든키톤을다리에휘감으며달려오는여인의외관은눈물과비통함에엉망이었음에도조금도바래지않았다.아니,오히려본래가진처연한아름다움이그녀가처한비극으로인해더욱돋보였다.
‘저여인이소문의왕녀인가.과연…….이번전쟁의원인이라칭하기에부족함이없어.’
녹스는속으로찬탄을쏟아냈다.하지만언제까지감탄만하고있을수는없는일.그는입술을꾹물며정신을차렸다.그리고주군앞,쓰러진왕비에게달려드는왕녀를막기위해몸을움직이려했다.
그러나녹스가발걸음을떼기도전먼저움직인이가있었다.피를흘린채늘어진왕비앞에가장가까이자리한그의주군로샨이었다.그는팔을슬며시들어수하들의움직임을멈춰세웠다.
녹스를비롯한기사들의시선이그들의주군을향했다.그러나제게모인시선에도로샨의눈은한참전부터고정한상대에게서벗어나지않았다.그는왕의목에검을휘두른순간부터왕녀만을지긋이바라보고있었다.
“어,어머니…….”
침략자의우두머리로샨의제지에왕녀는아직생명이꺼지지않은어미의몸을안을수있었다.그러나누가보더라도왕비에게남은시간은수분이채되지않는시간이었다.
“정신좀차려보세요.네?어머니!”
왕녀의절절한울음에도왕비는목소리를제대로내지못했다.올라오는피거품이이미목을완전히메운것같았다.꾸르륵.소름끼치는소리가몇번이고왕비의입에서났다.
“예,예레……나.가,가여운내……아가.”
여식의이름조차제대로부르지못함에도왕비는왕녀를향해계속무어라속삭였다.왕녀는뻐금거리는어미의입모양을읽었는지고개를강하게내저으며연신싫다외쳤다.그모습이참으로안타까워로샨의측근중이런자리에서만큼은냉철하기로유명한하이든마저고개를살짝떨궜다.
“이대로가시면안돼요!저만남는건싫어요.제발…….”
왕녀의처절한애원에도왕비는결국숨을거뒀다.아래로힘없이떨어진고개와손이금세푸르스름해져갔다.눈도제대로감지못한왕비의얼굴에는비통함과남은딸에대한걱정이묻어났다.
왕녀는고개를저으며왕비를연신흔들었다.그러나그럴수록죽은자와산자의차이는극명하게느껴졌다.
“아악!”
자신에게닥친비극을받아들이지못한왕녀가찢어질듯높은비명을지르다오열하기시작했다.어미를품에안은작은몸이비맞은어린새처럼파르르떨렸다.
왕과왕비를죽음에이르게한침략자는그런왕녀를물끄러미바라보다왕녀가왕비의몸위에엎어져몸을들썩이자팔을뻗었다.피가묻은금속재질장갑이달그락소리를내며왕녀에게다가가는모습이왠지모르게섬뜩했다.
죽은어미위에쓰러져있던왕녀가다가오는그림자를느끼고본능적으로고개를살짝틀었다.그리고순간왕녀의새파란눈과침략자의새빨간눈이허공에서부딪혔다.
그러나그것도잠시,두사람이서로를눈에담기무섭게왕녀에게변화가생겼다.맑은하늘을머금은듯청명한색은그대로였으나죽은이들이그러하듯동공은딱딱하게굳었으며절망속에서도분명자리한생기가서서히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