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홀로 빛나는 미등

그리움은 홀로 빛나는 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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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김채영 시인에게 있어 기억과 그리움은 단순히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현재성을 통해 살아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기억은 ‘과거의 잔존물’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의미화하는 ‘생성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물을 찾아 사막을 건너는/목마른 그림자”(「해갈의 기억」)처럼, 기억에 천착하는 것은 현재적 실존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기억과 시간은 장소와 만나 구체화된다. 태백을 중심으로 하는 장소애(Topophilia)가 표출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시간의 무게”(「손등 위의 세월」)에서 드러나듯, 시인이 제시하는 시간은 선형적 흐름이 아닌 중층적이고 순환적인 구조를 갖는다. 시간은 신체적 흔적을 통해 현재화되며, 개인적 체험과 역사적 경험이 교직하는 복합적 시공간을 형성한다. “그리움은 은하의 끝에서 홀로 빛나는 미등”(「그리움은 홀로 빛나는 미등」)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그리움은 존재의 본질을 사유하도록 이끈다. 결국 그리움은 부재를 현존으로 전환시키는 존재론적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면서 장소로서의 ‘태백’이거나, 소외층으로서의 ‘광부’를 호명한다.
시에 나타난 다양한 기호들 ‘손, 계단, 별빛, 샘, 새, 사진첩, 갱도, 안개’ 등의 문화적 의미는 개인적 체험과 만나면서 다양한 변주를 이룬다. 이 기호들은 기억과 시간 의식의 새로운 양상을 펼쳐나가는 매개체가 된다. 노동과 희생의 의미화 방식이라든가, 단시 구조를 통해 침묵과 언어의 변증법적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시적 실험이기도 할 것이다. 디카시의 시도 역시 새로운 형식 시도일 것이다.
주름진 손등을 가만히 쓸어보며
낯선 이의 손금 안에
내가 걸어온 길 펼쳐진다
말보다 깊은 이야기
손끝으로 전해지는 시간의 무게
-「손등 위의 세월」 전문

타인 속에 각인된 자기 삶의 궤적을 발견하면서, 과거를 감각적으로 되짚는다. “낯선 이의 손금 안에/내가 걸어온 길”에서 보듯, 타자의 손등에 새겨진 주름은 곧 화자의 삶이다. ‘나’는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타자 또한 ‘나’ 없이 규정되지 않는다. ‘나와 타자’의 구별이 사라지고, 자아와 타자의 고정된 경계가 해체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에서 관계는 상호 구성적이거나 유동적 존재로 나아간다. 끝 행의 “손끝으로 전해지는 시간의 무게”는 비가시적인 과거를 가시화하는 촉각적 장치이다. 이는 비언어적 전승과 세대 간 기억의 연속성에 주목하며,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피부에 각인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시간은 육체의 흔적을 통해 다시 회상되며, ‘손’이라는 매개체는 그 자체로 삶의 기록으로 남는다.
이러한 시간의 응시는 「기억을 만나다」에서도 이어진다. “쓰다만 일기/덮어둔 사진첩/먼지 쌓인 지도책” 같은 구체적 사물들은 잊힌 기억의 저장고로 기능하다가, “오늘/꽃 한 송이 피었다”는 문장에 이르러 현재성을 회복한다. 사물에 축적된 기억을 통해 사라졌던 감정이 꽃 한 송이로 시각화되는 과정은 기억이 생명성을 획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세상 어둔 곳으로 동안거에 들었네”(「육쪽마늘」)라고 고백하듯, 김채영 시인은 말해지지 않은 것, 지나간 것, 손 닿지 않는 대상들에 잔잔한 애정을 보낸다. ‘손등, 물결, 불빛, 발자국’ 등을 통해 무형의 감정과 기억을 감각적으로 구체화하는 것 역시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난간에 기대어떠난 사람의 이름을 풀어놓자저편 허공에서 일어선 기척
물무늬 하나가물살 속에 스며들었다
(중략)
나는 흔들리는 물빛에손끝을 적셨다가
파문 속으로그 손을 다시 밀어 넣었다

저무는 입술로
봄을 불러본다
귀 기울이면달빛 아래, 아직 사라지지 않은그 이름이
물결처럼 되돌아온다
-「월영교의 밤」 부분


떠난 이를 불러내거나 부재를 견디는 데 머물지 않고, 남겨진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흔적에 눈길을 준다. 상실의 순간을 ‘기척’이라는 감각적 환영으로 재현하면서 상실 이후의 감각적 회복에 나설 수 있는 것도 현재성을 놓치지 않은 덕분이다. 물속에 스며드는 물무늬나 “파문 속으로/그 손을 다시 밀어 넣”는 장면은, 그리움의 감정이 감각적으로 되살아나는 과정이다. 사랑 혹은 존재의 부재가 ‘기억’과 ‘자연’ 속에서 조응하면서 생명 혹은 존재를 획득한다. “난간에 기대어/떠난 사람의 이름을 풀어놓자/저편 허공에서 일어선 기척”이라거나, “아직 사라지지 않은/그 이름이/물결처럼 되돌아온다” 등의 구절에서 확인되듯 부재의 존재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회복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시선은 「그리움은 홀로 빛나는 미등」에서도 확인된다.

노을 타서 마시던 술잔에 이윽고 밤이 그득하다
구름으로는 가릴 수 없는 푸른 달빛
그리움은 은하의 끝에서 홀로 빛나는 미등
그 빛은 어둠 위에 놓인, 사라지지 않는 나의 이정표
내일은 하늘 가장 가까운 고원에서
가장 늦게 사라지는 별을 보리
-「그리움은 홀로 빛나는 미등」 전문

그리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는 등불이다. ‘미등’은 어두운 밤을 밝히며 길을 안내하는 존재로, 그리움의 본질을 상징한다. 부재가 빚은 그리움을 통해 오히려 역설적으로 존재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 점에서 그리움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면의 이정표이자, 현재를 살아내게 하는 실존으로 기능한다.
“그리움은 은하의 끝에서 홀로 빛나는 미등”에서 ‘그리움’은 감정의 차원을 넘어 존재론적 징후로 격상한다. ‘미등’은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빛으로, 자아의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타자의 흔적을 상징한다. 이는 시적 자아가 어떤 다른 존재, 즉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구성되고 인도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둠 위에 놓인, 사라지지 않는 나의 이정표”는 자아가 ‘외부의 신호-타자의 빛’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빛은 단순한 회상의 잔광이 아니라, 자아가 타자를 향해 갖는 책임과 응답의 윤리적 상징이 된다. 따라서 시 속의 그리움은 자아가 어떤 결핍의 감정을 느끼는 상태라기보다는, 존재의 방향성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재정립되는 자아의 좌표라 할 수 있다.
“은하의 끝”, “홀로 빛나는 미등”, “사라지지 않는 이정표” 등은 모두 자아가 중심이 되어 세상을 인식하는 근대적 주체 모델을 해체하고, 외부의 타자적 시선(빛, 시간, 공간)에 의해 자아가 구성되는 탈중심적 세계관을 구현한다. ‘그리움’이라는 정서가 단지 과거의 회상이나 감상적 유희에 머무르지 않고, ‘이정표’를 확인하는 현재적 실존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저자

김채영

저자:김채영
강원정선출생으로서울사이버대학교웹문예창작학과를졸업했으며,2009년월간『한맥문학』신인작품상을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푸른심장의노래』,포토에세이『춘식이와나의사계절』이있다.현재한국문인협회,강원문인협회,한국문인협회태백지부회원으로활동중이다.문학과문화기획을아우르며,지역에서『인향만리협동조합』회원들과『시시한책방』을운영하고있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그리움의始原,그푸른시작
경계에는봄이온다__13/월영교의밤__14/하늘에닿은돌들,그침묵아래__17/시간의샘,검룡소__19/감자꽃필무렵__20/기후의얼굴__22/눈내린아침__24/시간이멈춘마을__25/겨울속의봄__27/太白,그큰순수에부쳐__28/가거도봉구의가을__30/어떤가을__32태백에눈이내리지않는다면__34/맑고고운계산*鷄山을깨우고__36/고구마__38/

제2부홀로빛나는미등,내안의심연
조개를주우며__43/그대잠곁에__44/노란동심__46/사랑한다는것은__47/심연深淵__48/그림자의길목에서__49/그리움__50/그리움은홀로빛나는미등__51/열아홉살에__52/투명의벽__54/해갈의기억__56/그해봄,우리는__58/사랑,고이다__60/편지__61/고마운당신__62/

제3부발자국마다스며든시간
손등위의세월__65/어머니의쇼핑백__66/하루치의무게__68/아버지의초상__70/눈물__71/방랑시인김삿갓__72/정한재靜閑齋__75/계단을오르며__76/한번의가을을더만날수있을까__78/기억을만나다__80초록이슬__81/회상__82/소통의부재__84/여름날의하루__86/달__87/

제4부잊히지않는풍경들
만항재__91/흙속에서피어난별들__92/규폐병동에서__94/피지못한말,봉정사에머물다__96/하얀새__98/추전杻田역에서__100/수수깡인형__102/슬리퍼소리의오후__104/육쪽마늘__105/부유浮游__106/매미의죽음__108/반짝이는모래알처럼__109/눈내리는밤__110/물풀의서약__111/사랑이지나간자리__112/

작품해설|정연수
기억의현재성과존재론적성찰_115/

출판사 서평

김채영시인에게있어기억과그리움은단순히과거로되돌아가는것이아니라,기억의현재성을통해살아있는존재로나타난다.기억은‘과거의잔존물’이아니라,현재의삶을의미화하는‘생성적동력’으로기능하는것이다.“물을찾아사막을건너는/목마른그림자”(「해갈의기억」)처럼,기억에천착하는것은현재적실존의근거를확보하기위한것이기도하다.
기억과시간은장소와만나구체화된다.태백을중심으로하는장소애(Topophilia)가표출되는것도그때문이다.“손끝으로전해지는시간의무게”(「손등위의세월」)에서드러나듯,시인이제시하는시간은선형적흐름이아닌중층적이고순환적인구조를갖는다.시간은신체적흔적을통해현재화되며,개인적체험과역사적경험이교직하는복합적시공간을형성한다.“그리움은은하의끝에서홀로빛나는미등”(「그리움은홀로빛나는미등」)이라는구절에서드러나듯,그리움은존재의본질을사유하도록이끈다.결국그리움은부재를현존으로전환시키는존재론적메커니즘으로기능하면서장소로서의‘태백’이거나,소외층으로서의‘광부’를호명한다.
시에나타난다양한기호들‘손,계단,별빛,샘,새,사진첩,갱도,안개’등의문화적의미는개인적체험과만나면서다양한변주를이룬다.이기호들은기억과시간의식의새로운양상을펼쳐나가는매개체가된다.노동과희생의의미화방식이라든가,단시구조를통해침묵과언어의변증법적관계를탐구하는것은시적실험이기도할것이다.디카시의시도역시새로운형식시도일것이다.

주름진손등을가만히쓸어보며
낯선이의손금안에
내가걸어온길펼쳐진다
말보다깊은이야기
손끝으로전해지는시간의무게
―「손등위의세월」전문

타인속에각인된자기삶의궤적을발견하면서,과거를감각적으로되짚는다.“낯선이의손금안에/내가걸어온길”에서보듯,타자의손등에새겨진주름은곧화자의삶이다.‘나’는타자없이는존재할수없고,타자또한‘나’없이규정되지않는다.‘나와타자’의구별이사라지고,자아와타자의고정된경계가해체되는포스트모더니즘세계에서관계는상호구성적이거나유동적존재로나아간다.끝행의“손끝으로전해지는시간의무게”는비가시적인과거를가시화하는촉각적장치이다.이는비언어적전승과세대간기억의연속성에주목하며,시간은단순히흐르는것이아니라피부에각인되는것임을보여준다.시간은육체의흔적을통해다시회상되며,‘손’이라는매개체는그자체로삶의기록으로남는다.
이러한시간의응시는「기억을만나다」에서도이어진다.“쓰다만일기/덮어둔사진첩/먼지쌓인지도책”같은구체적사물들은잊힌기억의저장고로기능하다가,“오늘/꽃한송이피었다”는문장에이르러현재성을회복한다.사물에축적된기억을통해사라졌던감정이꽃한송이로시각화되는과정은기억이생명성을획득하는일이기도하다.“이세상어둔곳으로동안거에들었네”(「육쪽마늘」)라고고백하듯,김채영시인은말해지지않은것,지나간것,손닿지않는대상들에잔잔한애정을보낸다.‘손등,물결,불빛,발자국’등을통해무형의감정과기억을감각적으로구체화하는것역시존재를확인하는과정이기도하다.

난간에기대어떠난사람의이름을풀어놓자저편허공에서일어선기척
물무늬하나가물살속에스며들었다
(중략)
나는흔들리는물빛에손끝을적셨다가
파문속으로그손을다시밀어넣었다

저무는입술로
봄을불러본다
귀기울이면달빛아래,아직사라지지않은그이름이
물결처럼되돌아온다
―「월영교의밤」부분


떠난이를불러내거나부재를견디는데머물지않고,남겨진세계에여전히존재하는흔적에눈길을준다.상실의순간을‘기척’이라는감각적환영으로재현하면서상실이후의감각적회복에나설수있는것도현재성을놓치지않은덕분이다.물속에스며드는물무늬나“파문속으로/그손을다시밀어넣”는장면은,그리움의감정이감각적으로되살아나는과정이다.사랑혹은존재의부재가‘기억’과‘자연’속에서조응하면서생명혹은존재를획득한다.“난간에기대어/떠난사람의이름을풀어놓자/저편허공에서일어선기척”이라거나,“아직사라지지않은/그이름이/물결처럼되돌아온다”등의구절에서확인되듯부재의존재가자연의질서속에서회복력을발휘한다.이러한시선은「그리움은홀로빛나는미등」에서도확인된다.

노을타서마시던술잔에이윽고밤이그득하다
구름으로는가릴수없는푸른달빛
그리움은은하의끝에서홀로빛나는미등
그빛은어둠위에놓인,사라지지않는나의이정표
내일은하늘가장가까운고원에서
가장늦게사라지는별을보리
―「그리움은홀로빛나는미등」전문

그리움은단순한감정이아니라,존재를확인하는등불이다.‘미등’은어두운밤을밝히며길을안내하는존재로,그리움의본질을상징한다.부재가빚은그리움을통해오히려역설적으로존재를확인하는계기가된다.그런점에서그리움은단지과거의회고가아니라미래의방향을제시하는내면의이정표이자,현재를살아내게하는실존으로기능한다.
“그리움은은하의끝에서홀로빛나는미등”에서‘그리움’은감정의차원을넘어존재론적징후로격상한다.‘미등’은어둠속에서도사라지지않는빛으로,자아의내부가아닌외부로부터오는타자의흔적을상징한다.이는시적자아가어떤다른존재,즉타자에의해끊임없이구성되고인도된다는의미이기도하다.“어둠위에놓인,사라지지않는나의이정표”는자아가‘외부의신호-타자의빛’을통해이루어진다는것을드러낸다.이빛은단순한회상의잔광이아니라,자아가타자를향해갖는책임과응답의윤리적상징이된다.따라서시속의그리움은자아가어떤결핍의감정을느끼는상태라기보다는,존재의방향성과타자와의관계를통해재정립되는자아의좌표라할수있다.
“은하의끝”,“홀로빛나는미등”,“사라지지않는이정표”등은모두자아가중심이되어세상을인식하는근대적주체모델을해체하고,외부의타자적시선(빛,시간,공간)에의해자아가구성되는탈중심적세계관을구현한다.‘그리움’이라는정서가단지과거의회상이나감상적유희에머무르지않고,‘이정표’를확인하는현재적실존으로전환되는것이다.